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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2013 베니스 인 서울

네오리얼리즘을 넘어서- 2013 이탈리아 영화기행

“2013 베니스 인 서울” 특집

네오리얼리즘을 넘어서- 2013 이탈리아 영화기행


올해의 ‘베니스 클래식’ 섹션에서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연대기를 살펴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시작으로 다미아노 다미아니, 엘리오 페트리, 프란체스코 로지, 로셀리니의 대표작과 파졸리니, 베르톨루치에 관한 다큐멘터리 등 이탈리아 현대영화를 개괄할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신작으로 소개하는 지안프란코 로지와 지아니 아멜리오의 작품 또한 전후 이탈리아의 위기를 반영한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면모가 있다. 1950년대의 네오리얼리즘에서 시작해 현재에 이르는 이탈리아 영화의 어떤 경향을 살펴본다.





네오리얼리즘 영화혁명


“1940년대의 영화 혁명인 네오리얼리즘과 1400년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간에 공통점이 있습니까?” 갈릴레오 박물관에 들어선 한 남자가 과학사 연구소의 박물관 관장에게 던진 질문이다. 박물관의 관장은 둘 간에 공통적인 흔적이 발견된다며 미술, 과학, 기술에 걸쳐 강한 연관성이 있었고 네오리얼리즘이 영화사에 변화를 일으켰듯이 르네상스 미술에 있어서 직선 원근법이 도입되면서 미술사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지아니 보차키의 <네오리얼리즘 강의>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하는 다큐멘터리다. 그는 다양한 영화인들(베르톨루치, 에르마노 올미, 파울로 타비아니,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 등)과 영화에서 발췌한 특정한 장면들을 병치하면서 네오리얼리즘으로 향한 영화의 창문을 열어 보인다. 내레이터는 올해 세상을 떠난 카를로 리차니이다. 그는 영화평론가로 출발해 로셀리니의 <독일영년>의 각본을 썼고, 네오리얼리즘을 이끈 영화감독이다.


영화와 미술, 혹은 과학사와의 관련성이 논의의 중심은 아니다. 요점은 ‘획기적인 변화’ 혹은 ‘영화 혁명’이라는 표현에 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아직 전쟁 중이던 1940년대 초부터 50년대 초까지 10년간 지속된 것으로 제한된 그룹의 이태리 영화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단어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심지어는 어떤 영화가 네오리얼리즘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거나 또는 그 영화들의 수를 몇 편으로 할지(총 1,000편의 이탈리아 영화 중 몇 편이 네오리얼리즘 영화인가?)를 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네오리얼리즘은 시기적으로 대략 10여년간 지속됐지만, 그럼에도 20세기의 나머지 절반 동안 유럽을 포함한 전세계의 영화감독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던 영화 혁명이었다. 만약, 네오리얼리즘이 영화 혁명이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이러한 영화적 경향이 역사적 위기의 순간에 국민적 정체성의 부활의 수단으로서 새로운 영화의 역량을 보여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네오리얼리즘은 단지 하나의 사조가 아니라 미학적 저항, 즉 영화적 형식 그 자체의 새로운 관념에 근거한 미학적 저항이었다. 


카를로 리차니의 충실한 강의에 고다르가 <영화사>의 3A에서 제안한 네오리얼리즘의 혁명적 의미를 덧붙이고 싶다. 고다르는 영화가 역사적 위기의 순간에 국민적 정체성을 갱신하는 수단이라 설명한다. 3A에서 고다르는 제도화된 회상, 즉 파리수복 45주년  기념식의 장면에서 영화와 텔레비전의 현재 상태에 애도를 표한다. 왜냐하면 프랑스 영화는 결코 독일과 미국에서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과 할리우드의 점령에 저항한 유일한 영화로서 로셀리니의 영화를 손꼽고,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평범한 제작방식에 경의를 표한다. 완전히 예견치 못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예술적 행위, 그리고 스튜디오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서서 적대적인 조건에서 촬영된, 영화의 완전한 잠재성의 실현, 시각예술의 독특한 형식, 대중적이고 국민적인 규모에서 작동하는 국민의 미래의 자아를 투사한 영화들. 



파졸리니와 베르톨루치에 관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 윌터 파사노의 <베르톨루치가 말하는 베르톨루치>(2013)와 엔리코 멘두니의 <예언 : 파졸리니의 아프리카>(2013)에서는 네오리얼리즘의 짧은 시기를 거친 이후의 이탈리아 영화에 어떤 변경이 있었는지 두 명의 작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가령, 파졸리니는 네오리얼리즘의 영향 하에 있던 <아카토네>와 <맘마 로마>를 만든 후에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그는 수난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모순적인 충돌을 그리던 초기의 시기에서 전통적인 맑시즘의 위기와 현실사회주의의 문제들, 신자본주의와 파시즘의 등장이라는 명백한 위기를 정식화하는 것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파졸리니는 1950년대의 작가들이 노동계급과 인간성에의 공통된 희망을 논의하는 성스러운 불꽃의 수호자였다면 이제 작가들에게,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시도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파졸리니는 이 시기에 또한 세계로의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이탈리아적인 지식인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 여행을 떠난 것이다. 1961년, 파졸리니는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와 처음으로 인도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 새로운 여행은 새로운 신화, 제3세계에 대한 점차적인 발견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영화작업과 여행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이국적인 문화들과 먼 곳의 장소들을 탐구하는 행위로 확장된다. <예언 : 파졸리니의 아프리카>는 스스로를 ‘현대보다 더 현대적인 방랑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형제를 찾는 방랑자’라 여긴 파졸리니의 제 3세계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60-70년대 정치영화의 두 전선 - 프란체스코 로지와 엘리오 페트리  


지난해 ‘베니스 인 서울’에서 <마테이 사건>이란 작품으로 소개한 바 있는 프란체스코 로지는 전후, 그리고 포스트-네오리얼리스트 영화적 세계에서 단연 주목할 만한 작가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영화는 이탈리아 사회의 현대적인 부패, 절대권력, 그리고 ‘총탄의 시대’라 불린 70년대의 테러리즘을 다룬다. 로지는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의 조감독을 했고, 마피아 문제를 다룬 <살바토레 쥘리아노>(1961)로 데뷔해 유명세를 얻었다. 로지의 특징이라면 그가 전형적인 이야기의 작가라는 점이다. 그는 신화, 전설, 역사 속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가령, <살바토레 쥘리아노>를 시작으로 <마테이 사건>(1972), 그리고 <럭키 루치아노>(1973)로 이어지는 작품들은 모두 정치적이고 산업적인 유명인들의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러나 단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매버릭들의 개성과 성취, 삶을 다루는 전기 영화로 흐르지 않는다. 로지가 이러한 인물들을 다룬 것은 그들이 이태리 공화국의 삶에서 명백한 위기를 체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무법자이고, 또 다른 이는 정부의 독점가, 혹은 범죄자이다. 로지가 꼽은 인물들의 삶은 그러므로 이탈리아의 현대사, 그리고 국가의 일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로지의 관심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맥락에서 권력, 통치, 경제적 지배를 인물들의 삶을 빌어 영화로 표상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로지는 타비아니 형제, 올미, 베르톨루치, 마르코 페레리, 마르코 벨로키오와 차이를 보인다.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작가가 아니었다. 좌파 정치학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권력과 정치의 파워게임을 표상하는 데 더 관심을 보였다.



이번 ‘2013 베니스 인 서울’에서 최초로 소개하는 <도시 위에 군림하는 손>(1963)은 그런 로지의 정치적 영화의 출발점의 작품이다. 현대 이탈리아의 권력구조가 주제이다. 나폴리의 주택지구 재개발 뒤에 숨겨진 거대한 부패가 관심사이다. 로지의 카메라는 정치적 언설들이 쏟아져 나오는 회의실, 법정, 의사당, 사무실, 바 등을 오가며 여기서의 발언들로 권력의 비가시적인 구조들에 접근해 들어간다. 로지의 영화는 강렬한 정치성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본성적으로 과격하거나 프로파간다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특정 정당에 속하지 않았고, 계몽주의적인 태도나 주장을 전달하는 데에 덜 관심을 보였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그의 방식은 먼저 조사와 탐사에서 시작해 주제들이 논의되고, 그러한 사실들과 사건들에 대한 해석의 여지들을 비록 모호하고 복잡하더라도 풀어놓는 것이다. 권력과 지배의 매커니즘에 접근해 들어가는 것,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절대적 진실을 발견하는 것의 불가능성, 곤란함에서 정치성을 사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로지의 영화가 지닌 흥미로움이다.


불행하게도 짧은 영화적 경력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난(그는 1929년에 태어나 1983년에 세상을 떠났다) 엘리오 페트리는 로지와 동시대에 다른 경로로 정치적인 영화를 시도한다. 로지의 영화가 특수하게 이탈리아적인 반면 페트리는 국제적 성공을 거뒀는데, 무엇보다 정치학과 이데올로기를 흥미로운 영화적 형식과 대중적인 기호들과 연결해 대중적 보편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페트리는 노동계급 출신이고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영화비평가로서 활동을 시작해 카를로 리차니, 푸치니, 디노 리치 등의 이탈리아 감독의 각본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네오리얼리즘의 유산 아래서 영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객관적 현실의 재현보다는 사회적 의식의 형성에서 개인의 심리학을 고려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분석의 객관적 요소만이 아니라 개인의 의식, 주관성의 문제를 사회비평과 정치적 참여의 문제와 결합한다. 로지가 지리-정치학의 문제를 다뤘다면, 페트리는 사회의 병리학을 탐구하는 것에 더 관심을 보였다.


<사적 소유는 절도가 아니다>는 권력의 졸개인 경찰에게 면죄부를 보장하는 사회의 매커니즘을 다룬 <완전범죄>(1970),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계급의 정신병리적인 문제를 다룬 <노동자 계급 천국에 가다>(1972)에 이어 ‘사회적 신경증 삼부작’을 이루는 작품이다. 페트리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병리적 탐구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그리고 비평가들에게도 외면 받은 저주받은 영화다.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하고 그로테스크한 초상을 그렸던 탓에 그 대담한 시도가 아마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탓이다. 이 영화에서 페트리는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변태적 가치를 양산하는가를 탐구한다. 젊은 은행원인 토탈은 드문 피부 질병을 갖고 있다. 그는 돈에 알레르기를 보인다. 그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돈은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다. 하지만 돈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사적 소유를 대변한다는 것에 있다. 페트리는 자본주의적인 질병을 소유에의 열망으로 표현하는데, 이 질병에 면역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다. 페트리는 소유와 돈의 폐쇄된 방에 갇혀 우리의 무의식이 방출하는 유독성 개스에 질식되지 않으려면 그것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해야 한다고 말한다.



네오리얼리즘의 유산 - 두 편의 이탈리아 신작


네오리얼리즘의 유산은 두 편의 이탈리아 신작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가령,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지안프란코 로시의 <성스러운 도로>와 지아니 아멜리오의 <용감무쌍>이 그러하다. 각각, 다큐멘터리와 픽션이지만 이 두 편의 영화는 1950년대 네오리얼리즘 영화가 전후 이탈리아의 위기적 상황에서 담아낸 실직, 빈곤, 고독의 문제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성스러운 도로>는 감독 지안프란코 로시가 2년간 미니밴을 타고 로마의 거대한 외곽순환도로 ‘GRA’ 주변을 다니며 그 주변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낸 작품이다. 영화의 제목에 담긴 ‘성스러운’은 감독의 표현을 빌자면 신비로움, 혹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외곽순환도로라는 설정은 중심과 주변의 차이를 강조하는데, 대략 이 외곽지역에는 300만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고, 로마 중심부에는 15만 정도의 인구가 있다고 한다. 


이런 중심과 주변의 차이는 1950년대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주제를 또한 떠올리게 한다. 가령,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은 발 멜라이나Val Melaina라는 로마 성벽에서 5마일 떨어진 지구에서 시작하는데, 이곳은 아직 완성조차 되지 않은 신지구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중심지로부터의 거리 때문에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으러 도시로 갈 수도 없었다. <움베르토 D>는 더 이상 로마의 중심지에서 살 수 없어 변두리에 아파트를 구해야만 하는 노인의 절망을 그렸다. 중심지는 점점 현대화되어가고 돈을 갖지 못한 이들은 주변부로 계속 이주해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구두닦이>의 소년들은 끔찍한 도시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들의 환경에서 결코 탈출할 수 없는, 가장 가난한 지역에 살던 희망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미지의 작가이지만 80년대 난니 모레티와 더불어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한 작가인 지아니 아멜리오 감독의 신작 <용감무쌍> 또한 비토리오 데 시카의 네오리얼리즘적인 시정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아멜리오 감독은 1990년작 <선고>, 1992년작 <도둑맞은 아이들>, 1994년작 <라메리카>로 유럽영화상을 수상했고, <도둑맞은 아이들>은 또한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1998년작인 <우리가 웃는 법>으로는 베니스영화제 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아멜리오 감독은 특정한 시대와 역사 속에서 힘겨운 삶을 겪은 한계적인 인물들에 주목했고, 특히나 인간적 관계의 어려움 가운데 인간의 존엄성과 휴머니티를 담아내는 데 주력해 왔다.


총탄의 시대에 테러리즘을 배경으로 부자 간의 갈등을 그린 처녀작 <마음의 통증>(1983)을 시작으로, 아멜리오 감독은 파시즘기의 팔레르모를 무대로 사형제도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그린 <선고>(1990)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도둑맞은 아이들>은 어머니로부터 성매매를 강요당한 11살 소녀와 그의 동생이 젊은 경찰에 끌려 고아원으로 호송되어 가는 과정 중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힘든 현실에 노출되어 사회에 내던져진 아이들과 그들을 지키려는 경찰이 서로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이 시정 넘치는 화면으로(특히 금빛으로 물드는 바닷가의 백사장에서 호송 중에 잠시 일탈해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잊기 힘들다) 아름답게 그려진다. <하우스 키>(2004)는 15년간 떨어져 살던 아버지와 아들이 갑자기 만나게 되면서 겪는 부자의 정을 그린 작품이다. 어색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짧은 여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그들이 웃는 방법>은 1958년부터 1964년까지의 이탈리아 부흥기를 배경으로 시칠리아에서 토리노로 상경한 형제가 시대에 농락당하는 비극을 그려낸 작품이다. 최근작인 <최초의 인간>(2011)은 알베르 카뮈의 자전적 소설이자 유작을 영화화했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빈곤과 차별이 횡행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용감무쌍>은 그런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놀랍게도 공식적으로는 그의 첫 번째 코미디이다. 경기침체가 만연한 밀라노를 배경으로 주인공 안토니오는 불가피하게 하루를 쉬어야 하는 노동자들을 대신해 매일 직종을 바꿔가며 일을 한다. 피자 배달원, 전차 운전, 장미꽃 배달, 레스토랑의 요리사 등등, 그가 하는 일들은 가히 모든 노동자들의 일상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아내와 이혼한 안토니오는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20대 여성 루시아를 만나게 된다. 루시아는 미래 없는 자신의 삶에 꽤나 비관적이고 모든 일에 시니컬하게 대처한다. 영화의 전체 톤은 무성영화 코미디에 가까운데, 안토니오는 그래서 <시티 라이트>나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게 한다. 


실업의 문제를 코믹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그의 전작들에서 보인 인간들의 관계의 어려움을 어둡게 그려낸다. 젊은이들, 그리고 나이 든 이들은 피할 수 없는 실업의 문제에 시달린다. 안토니오는 조금씩 젊은 여인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고, 마찬가지로 섹소폰 연주자인 아들과의 사이도 서먹하다. 아멜리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세대의 대표자로서 젊은이들에게 죄의식을 느낀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안토니오는 두 명의 이십대 젊은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는데, 그들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에 결국 절망감을 느낀다.


성공적인 데뷔작 - 엠마 단테의 <팔레르모의 결투>  


엠마 단테의 <팔레르모의 결투>(2013)는 영화 연출보다는 무대 경력과 배우로서 더 유명세를 얻었던 그녀의 성숙한 데뷔작이다. 영화의 원제는 ‘카스텔라나 반디에라 거리Via Castellana Bandiera’. 즉, 그녀의 고향이기도 한 팔레르모의 외곽 주택지의 일방통행로를 의미한다. 이 거리에서 언덕길에서 마주오는 차를 만난 두 명의 여인이 심각한 상황으로 대치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다. 이런 내용으로도 장편영화가 성립할 수 있을까 싶은데, 때로 좋은 영화란 언제나 심플한 이야기에 근거한다고 미리 말하고 싶다. 물론 단순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진전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재능이다.


아무튼 이 좁은 일방통행로에서 대치하게 된 두 여인들 가운데, 그 한쪽은 여행 중에 다툼을 벌이는 로자와 클라라의 레즈비언 커플이다(그중 한 명이자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대치 상황을 풀 생각이 없는 고집스런 여인 로자를 연기한 이가 감독 자신이다). 반대 방향에서 차를 몰고 들어온 이는 손자와 가족을 차로 집에 데려다주고 있던 중인 마을의 고집스런 할머니 사미라. 때는 더운 여름날 오후다. 딱히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이 거리에서 벌어진 심각한 대치 상황에 마을 주민들은 문제를 해결하려기보다는 누가 먼저 물러설지에 내기를 거는 등 다소 방관적인 자세들을 보인다. 수수방관하기는 사미라의 가족들도 매한가지.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길을 양보하면 좋을 테지만 그 어느 쪽도 사태를 해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사실 뚜렷한 명분보다는 그 어떤 뒤틀린 심사와 분노가 이 둘을 심각하게 대치하게 했던 것이다. 낮이 지나 이윽고 밤이 찾아와도 저녁을 먹을 생각도 없이(심지어 이들은 화장실 갈 여유를 보이기도 싫어해 차 안에서 소변을 해결한다) 꼬박 하루를 보낸다. 몇몇 사내들이 나서 분쟁을 해결해 보려고도 하고, 손자를 불러 설득도 시도하지만 둘은 꿈쩍도 않는다. 가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있는 형국이다.



앞서 말했듯 아주 단순한 이야기의 설정이지만 두 여인의 고집불통의 대치가 불러오는 긴장감이 대단해 관객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여유를 주지 않는다. 여인들의 대결구도는 흡사 막다른 골목길에서 마주한 서부극 영웅들의 결투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왜 두 여인의 대치 상황이 발생했던 것일까. 단지 두 여인들의 행동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이러한 대치 상황이 무엇을 표상하는가를 깨닫기 위해서 이 질문은 불가피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초반 15분간 장면들에서 몇 가지 정황적 근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영화의 첫 시작부에서 우리는 로자와 그녀의 연인 클라라가 팔레르모로 향해 자동차를 몰고가는 것을 보게 된다. 로자는 이 마을 출신으로 결혼식의 리셉션에 참석하기 위해 내려오지만 점점 마을이 가까워져 오면서는 클라라와 불화를 보이고, 급기야 클라라는 그녀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두 여인의 초조함과 불안은 자동차 내부의 좁은 공간을 폐소적으로 잡아내는 카메라의 타이트한 클로즈업으로 극대화되어 표현된다. 둘의 감정이 고양이 이후 골목길에서 대치하는 긴장감의 전조를 이루고 있다. 반면, 사미라(엘레나 코타가 탁월한 연기를 펼쳐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이 마을의 황폐한 무덤가에서 처음 모습을 보이는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딸의 묘비 앞에서 슬픔과 상실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는 급기야 딸의 비석에 자신의 몸을 뉘어 부질없지만 불가능한 딸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영화는 내내 이런 두 고집불통의 여인에 초점을 맞춘다. 


둘은 서로 다른 이유로 대치 중이지만 그럼에도 본원적인 연결이 있어 보인다. 그 하나는 팔레르모라는 지리 장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로자에게 팔레르모는 불안의 근원적 장소처럼 보인다. 그녀는 이 고향 출신으로, 이전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끊으려 하는 상황이기에 아마도 이 마을이 그녀의 과거에서 기인한 불안을 야기하는 듯하다. 사미라의 완강함은 앞서 묘비의 장면에서 느낄 수 있듯이 가눌 수 없는 슬픔과 애도에서 기원한다. 그녀의 트라우마는 남과 어떤 타협과 소통을 이워내는 데 어려움을 야기하는 듯하다. 감독은 이러한 슬픔과 애도, 분노와 불안 등의 감정을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두 여인의 미묘한 얼굴들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특히 사미라는 거의 말을 하고 있지 않기에 그녀의 얼굴이 대사를 대신하고 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쇠약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결들을 느끼게 된다. 두 여인의 대립에서 우리는 그들의 갈등과 차이(노년과 젊음, 전통주의와 자유주의 등)를 발견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알게되는 것은 이들이 기묘한 친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대치하던 두 여인의 감정의 상태가 누그러지는 때이다. 깜빡 잠든 로자는 사미라가 차 유리창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깨닫고는 놀란다. 하지만, 다시 보았을 때 그녀는 차 안에서 잠에 들어있다. 잠깐의 착각이다. 잠시 후, 로자의 고집에 화가 나 그녀를 떠났던 클라라가 찾아온다. 그녀에게 로자는 어린 시절 화가 났을 때 참지 못해 이곳을 찾았노라고 말한다. 그 때에 자신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이제 그녀의 곁에는 클라라가 있다. 그녀는 클라라에게 노래를 불러달라 하는데, 그녀의 노래가 들리는 가운데 우리는 사미라가 손자의 집을 찾는 발걸음을 지켜보게 된다. 나중에 우리는 이 장면이 일종의 꿈 같은 순간임을 알게 된다. 사미라는 자신 없이 어떻게 이 사람들이 살아갈 것인가를 걱정한다. 이 꿈 같은 장면은 한 사람의 찾아옴과 다른 사람의 떠남으로 대구를 이루면서 로자와 사미라를 기묘하게 연결하는 인상을 준다. 한 여인은 이제 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거두고 가족들과 작별을 치렀고, 또 다른 여인은 어머니와도 같은 이를 떠나보냈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끝날 무렵에 우리는 이 두 여인의 고집스런 대치상황이 기묘한 친밀감으로 변형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연극무대와도 같은 한정된 공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기술적인 화려함보다는 삶의 본성을 깊숙이 파악하려 한 성공적인 데뷔작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