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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상영작 소개

너머에 존재하는 믿을 수 없는 진실

[영화읽기] 프리츠 랑의 <이유없는 의심>



소설을 쓰는 톰 캐럿은 신문사를 운영하는 오스틴 스펜서의 딸 수전과 약혼한 사이다. 사형 집행에 톰과 함께 입회한 어느 날, 오스틴 스펜서는 언론의 영향력을 업고 사형 제도의 잔인함을 고발하려는 극단적인 구상을 떠올린다. 무고한 죄수가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형 집행 직전에 밝혀진다면 사형찬성론자와 사법당국도 개심하리라는 것. 그렇다면 문제는, 누가 과연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무고한 죄수 역할을 할 것인가이다. 오스틴은 미래의 사위 톰 개럿에게 증거를 위조하여 패티 그레이의 살인범으로 잡혀 사형선고를 받은 뒤 결백함을 밝히라고 권유한다. 톰 개럿은 처음엔 내켜하지 않지만 종국에는 수전과의 결혼을 미루면서까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실행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기획은 그들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고, 오스틴 스펜서의 의도 ‘너머’에는 ‘믿을 수 없는 진실(<이유없는 의심>의 프랑스 개봉 제목이다)’이 존재한다.

 

<이유없는 의심>은 살인과 범죄를 소구하는 언론을 소재로 하여 <도시가 잠든 사이에>, <블루 가디니아>와 함께 프리츠 랑의 ‘언론 누아르 3부작’으로도 불린다. 프리츠 랑이 미국에 건너와 처음 만든 작품 <분노>처럼, 영화는 필부가 억울한 혐의를 쓴 채 부조리한 거대 제도와 싸우는 이야기의 변주처럼 시작한다. 프리츠 랑이 이러한 소재를 계속 변주하는 것의 심인을 그의 사생활에서 찾은 호사가들도 많았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인이 ‘자살’이었던 첫 아내의 살인범으로 그가 여러 해 동안 수사선상에 올랐던 사실, 그녀가 욕실에서 자살하는 동안 자신의 두 번째 아내가 될 작가 테아 폰 하르보우와 살롱에 있었다는 그의 알리바이 등. 반세기도 넘은 거장의 과거사는 선정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보다는 그 사건들을 겪은 프리츠 랑이 바라본 세계가 띄는 혹독한 차가움을 이해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다난한 개인사는 물론이고, 나치즘 발호와 그에 경도된 하르보우와의 이혼 등을 겪고 독일을 떠난 후(또 다른 호사가들의 증언을 빌자면, 괴벨스와 면담한 다음 날 독일을 떠났다는 프리츠 랑의 증언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겨우 도달한 피난처 미국서 겪게 된 창작의 어려움과 상업적 실패, 영화제작자들과의 투쟁, 심지어 매카시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체험 등. 이 모든 것을 모두 겪고 난 프리츠 랑이 바라보는 세계는 차라리 처형 장면, 톰 개럿의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고 자동차와 함께 불타버리는 오스틴 스펜서의 사고장면, 사면 받지 못하고 감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톰 개럿의 마지막 뒷모습마저 핍진성 넘치지만, 냉정한 미장센으로 표현한다. 미국서 마지막 영화를 만들던 랑의 속내는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뱅골의 호랑이>, <인도의 무덤>이 구축한 자신만의 피안으로 이미 건너가 버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장 뤽 고다르 등 50년 대 말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진으로 활약했던 누벨바그 감독들이 재발견하기까지 이 작품은 대중의 냉대와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 <이유없는 의심>은 미국에 도착한 직후, 아마도 일말의 희망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었을 랑이 두 번째로 만들었던 <한번뿐인 삶>과 같은 형태를 지녔으나 다른 색조를 지닌 짝패와도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비관적인 정조 속에서도 죄 없이 아름다운 연인들을 그리던 <한번뿐인 삶>과 관객들을 배심원 취급하며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살인과 계략, 그 너머의 소름끼치는 진실을 재현하는 이 영화 사이에는 얼마나 깊은 심연이 흐르는지. (신은실_시네마디지털서울 프로그램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