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루비치는 불가시의 영역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작가 중 하나다. 빌리 와일더가 ‘루비치 터치’에 대해 설명하며 예로 들었던 <미소짓는 중위>(1931)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모든 상황을 시시콜콜 설명하는 대신 닫힌 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즉 우리가 볼 수 없는 부분들을 남겨 두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 불가시의 영역만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나가는 놀라운 솜씨는 세련되고 우아한 루비치식 유머를 만들어나간다. 루비치 스스로가 “내가 살면서 만든 가장 훌륭한 영화”라고 표현한 <모퉁이 가게>(1940)에서 또한 이러한 불가시성이 영화의 전체를 작동시켜나간다.

부다페스트의 작은 거리에 위치한 마더첵 상사는 그리 인기 있는 상점이 아니다. 몇 안 되는 직원들이 소담히 가게를 꾸려나가는 가운데, 크랄릭(제임스 스튜어트)은 사장인 마더첵(프랭크 모건)에게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사장과 크랄릭의 관계가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때마침 들어온 노박(마가렛 설리번)이라는 새 직원은 크랄릭과 사사건건 부딪친다. 크랄릭과 노박은 얼마 전부터 펜팔로 사랑을 키워오던 상대가 서로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모퉁이 가게>에서 불가시성은 특정 장면이나 유머를 위해 사용되는 기술적 장치를 넘어서 플롯을 작동시키는 일관된 방식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불가시의 영역은 관객들뿐만 아니라 극중 인물들에게도 주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마더첵이 크랄릭과 자신의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 역시 인물들 각자가 갖게 되는 서로에 대한 불가시성에서 기인하는 문제이다. 동시에, 이 영화는 그것을 제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메인플롯에서 불가시성의 대상과 범위를 조율해나가는 루비치의 솜씨 또한 노련하다. 처음 노박이 마더첵 상사에 취직할 때까지는 관객조차도 그녀와 크랄릭의 관계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노박과 크랄릭이 같은 시간에 잡힌 저녁 약속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가 주어지는 순간, 그 관계는 일차적으로 관객에게 노출된다.

루비치는 이때 발생하는 서스펜스를 유지하며 남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대신 크랄릭에게 노박이 그의 펜팔 상대임을 알려 준다. 이를 통해 인물들 간의 불가시의 영역이 불평등해지며, 이전보다 훨씬 다양하고 섬세한 사랑의 감정들이 교차하기 시작한다. 앙숙처럼 생각하던 직장 동료와 이상적인 여인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크랄릭의 당황스러움, 그러나 점점 확신하게 되는 노박에 대한 사랑, 노박에게 선뜻 자신을 알릴 수 없는 답답함이 있다. 반면 이 상황을 까맣게 모르는 노박이 갖고 있는 펜팔 상대에 대한 기대와 애정, 동시에 영화의 후반에서 드러나는 크랄릭에 대한 끌림에서 복잡하게 교차되는 감정들 가운데 훨씬 더 깊고 애틋한 서스펜스가 만들어진다. 모든 오해와 불가시의 영역이 일순 명료해지고 잔뜩 엇갈린 채 미세하게 떨리던 감정들이 제자리를 찾게 되는 <모퉁이 가게>의 라스트는 그 덕분에 가장 기적적이고 행복한 순간이 된다.(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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