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마사키 탄생 100주년 특별전]



한없이 냉혹한 결말

- 고바야시 마사키의 <할복>



영화는 이이 가문의 저택 앞에 몰락한 히로시마 후쿠시마 가의 가신이었다는 쓰구모 한시로라는 사내가 모습을 보이면서 시작한다. 이 쓰구모라는 남자는 가문의 몰락 이후 수치스러운 삶을 이어나가고 있음을 밝힌 뒤, 사무라이다운 최후를 위해 할복을 치를 수 있도록 저택의 마당을 빌려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이 가문을 관장하는 고문 사이토 가게유는 이러한 쓰구모의 천명을 전해듣고는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또 기어 들어왔군...” 이 심드렁한 답변의 이유인즉 당시 에도에는 현관에 들이닥쳐 짐짓 호기롭게 거짓 할복을 맹세한 뒤, 사태를 지연시키고 미적거리면서 처치가 곤란해진 다이묘에게 돈 몇 푼을 구걸하는 하찮은 짓거리가 낭인들 사이에서 유행했기 때문이다. 사이토는 이미 한 차례 저택의 현관에 발을 들여 거짓 할복을 천명한 낭인 하나를 가차없이 압박하여 자결로 몰고간 바 있다. 영화는 심상치 않은 속셈을 가지고 나타난 쓰구모와 저택에 들어선 자들을 쉽게 내보내지 않으려는 사이토의 대화와 플래시백을 중심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며 전개된다.


<할복>의 서사를 수렴하는 이미지는 사변형의 틀로 시각화되어 화면에 나타난다. 그 사각의 틀의 범람이란 네모꼴로 구성된 이이 가문 저택의 설계 도면이 영화의 도입부에 제시됨으로써 일찌감치 예고된 것이며, 관객은 저택 여기저기에서 해당 무늬의 출몰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사각의 틀은 이이 가문 저택을 구성하는 일본식 전통 가옥의 구조이자, 할복 의식이 거행되는 마당 지붕의 구도이며, 마당의 중앙에서 할복자가 자리하는 다다미 받침의 형태이기도 하다. 그 사각의 틀이 최종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마루 한복판에 우물 정井 문양을 새겨 넣어가며 사변형의 기하학적 이미지를 과시하는 이이 가문, 나아가 무사 공동체의 속성이다. 저택 내부의 가신들은 저택에 들어온 낭인을 사각의 틀에 가둔 뒤, 사방에서 포위하기를 반복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 내부의 일원들은 끊임없이 사각의 틀 안에 먹잇감을 포획한다.



고바야시 마사키는 전반적으로 정적이고 엄격하게 공간을 누비는 카메라 운동을 채택함으로써 무사도 세계의 특성을 구축하는 동시에 부분적으로 빠른 줌인, 사각 앵글, 클로즈업 등 상대적으로 매우 과장된 테크닉을 사용하여 정교한 구조로 체계를 이룬 저택 한가운데에 균열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테크닉의 간헐적 사용은 저택의 한복판에서 무사 공동체의 모순과 비합리를 폭로하는 쓰구모의 역할을 은유하는 제스처이기도 한 셈이다. 텅 빈 가옥의 이곳저곳을 훑어보이던 오프닝에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조차 없던 이이 가의 가신들은 쓰구모의 생존이 지속됨에 따라 점층적으로 그 수를 늘리더니 쓰구모와의 최후의 교전이 발생하는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러서는 시네마스코프로 포착된 그 넓은 실내를 빼곡히 채울 정도로 증식되어 있다. 저택 안에서 쓰구모가 맞서는 상대는 단순히 수치로 환산되는 십수 명의 가신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를 보존해내려는 의인화된 하나의 체제이다.

무사 공동체의 모순을 꿰뚫어내는 쓰구모의 저항의 몸부림이 감동적이라면, 그 까닭은 쓰구모가 대의를 지닌 위대한 영웅이나 부조리한 기득권 세계를 전복시키려는 혁명가가 아니라는 데 있다. 최후의 액션 시퀀스에서 무사 공동체의 질서를 상징하는 정井 자 문양의 벽지를 배경으로 삼은 뒤 전투를 속행하는 쓰구모의 모습은 그 역시 무사도의 세계에 속해 있는 쇠락한 사무라이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의 언행이 공동체 내부의 환부를 날카롭게 겨냥했다면, 그것은 그가 바로 그 공동체의 질서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처음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숏에서부터 쓰구모는 이미 이이 가문의 가신들로부터 모욕을 받은 이후의, 사무라이로서 칼을 바닥에 내팽개친 이후의, 가족이 차례로 죽음을 맞이한 이후의 상태이다.


이 영화를 보고 쓰구모 한시로를 연기한 나카다이 다쓰야와 가문의 고문 사이토로 분한 미쿠니 렌타로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갈등이 폭발하는 대단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의 연기는 그저 한 편에 마주하고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미세한 반응과 떨림을 화면에 겨우 내놓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서스펜스가 성립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사적인 사건에 가깝다. 그들의 언어와 표정은 가히 대화의 활극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 격렬하고 장중하며 위엄 있다.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미를 한층 더 강화하는 것은 그들이 연기하는 자들이 유사한 이념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이다. 쓰구모와 사이토는 공통적으로 무사도의 이념에 소속된 인물이며, 그 이념의 맹점을 충분히 견지하는 인물이다. 차이는 명료하고 냉정하다. 전자는 이념의 맹점에 의해 자신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진 자이고, 후자는 그 이념의 맹점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리라는 것을 알고 필사적으로 이를 막으려는 자이다. 쓰구모와 사이토는 대척되는 인물이 아니다. 두 세계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영화는 5월 13일, 쓰구모 한시로가 저택에 찾아왔다는 기록을 일지에 적는 사이토의 내레이션에서 출발하여 그의 할복 소식을 알리는 동일 화자의 내레이션에서 종료된다. 공동체의 역사에서 쓰구모의 행적은 철저히 누락된다(이때 화면은 상황이 종료되어 텅 빈 저택의 풍경을 비춤으로써 영화의 도입부로 재귀한다). 최후의 액션 시퀀스에서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수많은 가신들의 포위망을 뚫어내고 에워싸이기를 반복하는 한 귀기 서린 육체의 길고 피로한 몸부림이다. 여기엔 영웅의 화려한 칼싸움도, 존중받을 만한 무사의 이념도 없다. 그것은 쓰구모의 회상을 통해서 간신히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 보일 뿐이다. 동시대의 찬바라 영화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지극히 반反 활극적으로 보일 정도로 화려함이 부재한 결말의 액션은 고작 개인의 폭로에 의해 존폐를 위협당한 공동체가 부리는 천박한 위악이다. 권위가 추락했을 때 무사 공동체가 실천할 수 있는 행위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집단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며 여기에 그토록 강조되던 무사다움이란 찾아볼 수 없다. <할복>의 가장 강력한 미덕은 공동체의 기능 부전과 단독자로서의 영웅의 불가능함을 동시에 선언하는 저 냉혹한 결말에 있다.

김병규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