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중계] 홍성남 영화평론가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 강연

지난 11일 저녁 서울아트시네마에서 3월 첫 프로그램으로 열리고 있는 ‘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 작품 중 <붉은 천사> 상영 후 일본영화 전문가인 홍성남 영화평론가의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일본 뉴웨이브에 전조가 되었다고 뒤늦게 재평가된 마스무라 야스조를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강연 일부를 옮긴다.


홍성남(영화평론가):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가 한국에서 스크린으로 처음 소개된 것은 2005년이었고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은 <눈 먼 짐승>이다. <눈 먼 짐승>이나 <붉은 천사> 등은 너무 센세이션해서 간혹 그의 영화에 대해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색깔에 대해 ‘과도한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자칫 잘못 이해하면 어떤 엽기를 추구하는 감독이 아닌가 착각할 수 도 있는데, 그 엽기적인 측면은 단순히 욕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야스조만의 상상이 담긴 엽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야스조는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시스템 안에서 오랜 시간동안 영화를 만들었다. 총 58편의 영화를 만든 야스조의 영화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미국에서 마스무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평론가 조너던 로젠봄은 반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영화들은 <거인과 완구>, <검정 테스트카>, 반전영화는 <붉은 천사>와 <세이사쿠의 아내>, <야쿠자 군대>, 변태적인 섹스영화는 <만지>, <붉은 사랑>, <눈 먼 짐승> 등이고 강한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는 <아내는 고백한다>와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문신> 등이 있다고 분류했다. 그만큼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였다. 하스미 시게이코는 예전에 마스무라를 높게 평가하며 ‘마스무라 야스조는 대표작이 없는 감독’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비평가로도 활동한 야스조는 아키라의 이미지와 구도, 그리고 편집능력을 호평하며 아키라를 지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라의 편집방식이 빠르고 리드미컬하지 않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야스조는 편집리듬이 강렬하고 빠르며 이것에 플러스해서 사회를 분석적으로 볼 수 있는 지성을 가진 감독을 원했고 당시 이런 마스무라의 이야기가 앞으로 그가 영화를 만들며 추구했던 바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야스조는 탁월한 시각적 능력을 스크린에 구사할 줄 아는 감독이었고 냉철한 분석과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1950년대 중반에 이탈리아로 간 야스조는 그곳에서 유명한 영화학교를 다녔고 이탈리아에서 일본영화에 대한 글들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유명 영화잡지 등에 일본영화에 대한 평도 썼는데 항상 마지막에 ‘왜 서구는 일본의 한 측면, 특히 정련되고 오밀조밀하고 서구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미학에만 열광할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이것은 오즈의 영화에 반하는 것으로 굉장히 현실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의 다름 아니다. 이탈리아 유학 후 일본 다이에이사에 들어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그는 처음 미조구치 겐지의 조감독을 지냈는데 야스조의 영화는 어떤 면으로는 이찌가와 곤과 맞닿아있다. 이를테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 사회 상층에 있는 집단보다 아래, 주변인들에 대해 공감했다는 측면이 그렇다.


마스무라 감독은 시스템에 대한 반대, 특히 인간을 억누르고 질식시키는 시스템에 대한 반대가 자주 보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붉은 천사>에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듯 욕망이 이상 분출된다. 하지만 선정적으로만 흐를 수 있는 것을 비판적시선과 결합시키는 능력을 마스무라는 가지고 있다. 마스무라는 인간의 욕망을 그리되 그것을 현실적 욕망, 일상에서 보는 욕망보다 과도하게 표출하고 그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미친 사람들’을 그리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마무라 쇼헤이도 마스무라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고 자체가 닮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은 ‘리얼 재팬’의 모습을 그렸다는 것이다. 강인하고 늠름하고 그 이전의 일본에서는 찾을 수 없던, 예전에는 일본에 존재했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사라져버린 새로운 일본인상의 모색이 아닐까 싶다.

 

다른 한편으론 마스무라는 일본 뉴웨이브 그룹에게 감화를 주고 호의를 받고 작업할 바탕을 마련해준 뉴웨이브 이전의 뉴웨이브-‘프리 뉴웨이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일본 뉴웨이브와 매우 미묘한 위치에 있었으며 모더니즘적 태도의 미세한 위치에 놓였던 감독이다. 하나로 설명될 수 없는 분류들이 마스무라의 위치를 제대로 잡아주기 어려우면서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매혹을 주고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주는 역할을 했던 그는 계속해서 탐구할 가치를 생성시켜주는 자원이 풍부한 시네아스트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정리: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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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붉은 천사>

<붉은 천사>에서 간과하기 쉬운 부분 중에 하나는 영화가 사진들(정지 화면)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부상당한 군인들 혹은 널 부러진 시체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제공하고, 전쟁의 분위기는 총소리와 대포소리로 청각화 한다. 일종의 역사적 상흔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붉은 천사>가 전쟁의 부당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사건의 시작과 끝에 대해 파헤치기 보다는, 참전자들의 참혹한 모습, 즉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전쟁이라는 사회적 문제의 모순적인 거대 구조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전쟁이 인간을 억압하는 지를 드러낸다.

또한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진행되어 한 인물의 주관적인 회상과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영화가 끝나고 나면 화자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회상의 영화라고 해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철저하다 싶은 정도로 카메라와 인물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시점 숏을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영화는 객관성을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에 가려진 여주인공의 심리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이처럼 <붉은 천사>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들 사이로 사쿠라라는 회상 주체의 내레이션이 개입하면서 자신의 심리상태를 대변한다. 즉 일어나는 사건사고에는 객관성을 부여하지만,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 한 인물의 감정적 상태가 부연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가령, 후반부에서 동료 간호사가 참호 바깥으로 나갔을 때 '이로써 나는 세 명을 죽였다'라는 말을 한다. 이 대사는 죽었던 다른 두 명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간호사로서 사람들 살리긴 커녕 오히려 죽게 했다는 점에 대해 자책하는 사쿠라의 심정을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사람을 살리는 직업으로서의 간호사와 의사, 사람을 죽이는 직업으로서의 군인이 대립하고 충돌하지만 전쟁이라는 사건 속에서는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드러낸다.

<붉은 천사>는 (이미지로만 드러나는) 외적인 측면에서 육체적인 억압이 발생한다. 부상으로 인해 잘린 다리와 팔 등이 프레임을 가득 메우는 숏들도 있으며, 심지어 절단하는 장면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정상적인 육체가 절단되고 잘려서 이 숏, 저 숏에서 던져진다. <붉은 천사>라는 제목과 다르게 붉은색의 피는 등장하지 않지만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비록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육체가 파편화되는 것도 있지만, 영화가 갖고 있는 프레임이라는 경계에서 인물들의 육체가 잘려나가는 상황도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또한 내적으로 인물들은 심리적인 억압을 당한다. 예컨대 사쿠라와 와카베와의 사랑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만 꽃피울 수 있었지만, 결국 그 한계 속에서 죽음으로 좌절된다(이렇게 심리적인 억압은 육체적인 억압과 함께 얼개를 이룬다). 둘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클로즈업 장면에서, 그들을 둘러싼 침대 망이 마치 그들을 가둔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붉은 천사>는 전쟁이 어떻게 인간을 억압하고 좌절시키는지, 다시 말해 생에 대한 인간의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욕망과 그것을 좌절시키는 전쟁(과 그로 인한 질병)이라는 억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와카베가 죽고 쑥대밭이 되어버린 전쟁터를 보여주는 엔딩 씬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것이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잘 보여준다. (최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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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섹스 체크>

 

방탕하게 살아가던 왕년의 천재 육상선수가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반항적이며 재능 있는 한 여공을 스프린터로 키워내 올림픽에 출전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가 올림픽에 출전하는 데는 한 가지 장애물이 있다.

 

이 짤막한 시놉시스만 보면 짐작하기가 쉽지 않지만 <섹스 체크>는 정말 괴악한 영화다. 이 영화의 뼈대는 스포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인데 숨은 재능을 가진 소녀가 세상으로부터 배척받는 명 코치를 만나고 정상에 서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인데, 영화 중반에 스포츠 영화의 틀을 깨는 양성인간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며, 양성인간의 성별을 바꾸기 위한 섹스 행각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괴이한 소재와 전개는 영화의 주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섹스 체크>는 스포츠물이라는 장르 안에 있되 그 어떤 스포츠물과 다르다. 특히 엽색 행각을 일삼는 최악의 인간 말종 미야지 코치의 존재는 영화에서 그 무엇보다 눈에 띤다.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영화 가운데 몇몇 작품들, 특히 <세이사쿠의 아내>, <아내는 고백한다> 등은 상투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과 사회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어떤 특별한 욕망을 가진 개인이 있고 사회는 그 욕망을 용납하지 않기에 필연적이고도 격렬한 대립이 발생한다. 그런데 영화 <섹스 체크>는 마스무라의 그런 자장 안에 있는 듯하지만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미야지 코치라는 인물을 통해 변주해서 보여준다.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겠다는 미야지의 꿈이 좌절된 것은 중일 전쟁에 병사로서 참전하느라 올림픽에 출전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그는 전쟁을 혐오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메달을 획득하고 일장기를 올린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사회적인 가치와 대립되지 않는다. 미야지는 친구의 아내를 강간하는 반사회적인 인물이지만 또한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가치, 즉 사회적 가치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사회적 가치란 이 영화에서는 국가주의적 가치와 동일한 것이다. <섹스 체크>는 그렇게 국가가 개인의 신체를 어떻게 사유화, 도구화하는지 보여준다. 가령 영화에서 미야지가 자신의 친구 미네, 그리고 미네의 부인과 함께 부르는 올림픽 노래의 가사에는 “너의 팔과 너의 다리는 자랑스러운 일본의 팔과 다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즉 개인의 팔과 다리는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미야지 역시 자신이 조련하는 히로코의 신체를 철저히 미야지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킨다. 미야지가 미네 앞에서 히로코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주무르며 육상 선수로서 타고난 신체라고 싱글벙글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 장면은 미야지 자신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일장기를 휘날려야 한다는 국가적 소명을 실현하는 자이며 히로코의 신체와 인격은 그 소명 앞에 종속된 것에 불과하다는 미야지의 내면적 가치이다. 이 장면에서 미야지는 마치 기수가 훌륭한 경주마를 보듯 히로코를 본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욕망은 미야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기록 갱신이라든지)과 혼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영화의 현실성을 잘 살려주고 있다.

 

그러나 미야지는 그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히로코를 여자로 대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끝내 무너지는 순간, 그리고 나중에 미쳐버린 미네의 부인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되는 장면에서 직관적으로 찾아온다. <섹스 체크>는 국가주의적 가치에 순응하는 개인의 좌절을 통해 국가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영화다. 이는 당시 일본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는데, 특히 미야지가 중일 전쟁에 참전해서 민간인 여성을 강간하고 포로를 살해하는 장면은 현재 일본에서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이만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제작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게 만들 정도로 사실적이고 냉정하다. (홍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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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문신>


전당포집 딸 오츠야는 혼처가 정해지자 종업원 신스케와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 신스케와 살겠다는 일념으로 그녀는 부모도 재물도 안정된 미래도 버린다. 신분상의 차이로 이루어지기 힘든 두 사람의 사랑이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환기시키지만 <문신>은 그러한 관객의 기대를 일찍부터 배신한다.

일본의 멜로드라마는 예정된 파국에 순응하는 개인의 비극을 죽음의 미화를 통해 해결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사내들의 계략에 빠져 연인을 잃고 유곽의 기녀로 전락한 순간, 그러니까 멜로드라마의 히로인들이 비껴갈 수 없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삶을 체념하는 그 순간, 도리어 오츠야는 남자들을 희롱하며 그들의 돈을 쥐어짜는 요부로 다시 태어난다. 멜로드라마의 세계에서 출발한 영화는 어느새 팜므파탈이 지배하는 느와르적인 세계로 변모한다. 욕망과 그 실천에 몰두하는 인물들이 스크린을 장악하고 나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에 선행한다는 불문율이 사나운 기세를 드러낸다.

운명에 순종하며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일본영화 특유의 처연한 풍경을 <문신>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실제로 <문신>의 살인 장면은 죽음에 저항하며 최후까지 발악하는 몸뚱이의 물질성을 최대한 부각시킨다. 보스 곤지의 사주를 받아 신스케를 살해하려는 산타가 도리어 신스케에 의해 죽음을 맞는 씬은 조악하기까지 하다. 산타의 단도는 애처로울 정도로 헛 칼질을 반복하고 우산 하나로 방어하는 신스케의 몸은 진창을 구르고 바닥을 긴다. 무려 5분 가까이 지속되는 두 사내의 어설픈 육탄전은 신스케가 산타의 이마에 단도를 박는 것으로 끝이 난다. 카메라는 격렬한 고통에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산타의 얼굴과 버둥거리는 두 다리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거친 육탄전과 낭자한 혈전은 이후에 벌어지는 수차례의 살인에서도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문신>의 살인 장면들은 유려한 영상미보다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육체의 중량감을 고집한다. 그 육체들은 치명상을 입고도 좀처럼 죽지 않는 생명력을 자랑한다. 몇 번씩이나 억센 신음소리를 토하면서 꽤나 긴 시간을 버틴다. 그래서 죽은 오츠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마지막 쇼트는 마치 좀비처럼 그녀가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은 기괴한 착각을 자아낸다. 죽여도 죽지 않는 몸의 질긴 생명력 또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듯한 몸의 비논리성은 강한 생존의 욕구가 이성으로 가늠할 수 없는 차원임을 지적한다.

온갖 종류의 기상변화를 동반하는 <문신>의 살인 장면은 삶에 천착하는 인간의 욕망을 가치판단이 불가능한 일종의 자연현상으로 제시한다. 신스케의 살인이 법이 아니라 원혼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에서 비롯된 자살로 처벌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차게 퍼붓는 빗속에서 신스케는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다. 곤지가 죽기 직전에는 바람이 불고 포주 토쿠베가 죽은 숲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신스케와 오츠야와 문신사 세이키치가 죽어가는 결말에서는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내린다.

거듭되는 살육전의 룰은 순수한 약육강식의 논리이다. 누구도 죽음을 원하지 않으며 오로지 내가 살기 위해 네가 죽어야 한다는 논리. 따라서 그 누구도 아름답게 죽지 못한다.

<문신>의 세계는 결국 죽음을 미화하는 일본영화의 신파적 전통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가를 증명한다. 죽음을 이상화하는 신파적 결말이란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욕망이 거세된 식물인간을 양산하는 폭력일 뿐이다. 아름다운 죽음보다 살고자 하는 추잡한 욕망이 차라리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영화 <문신>은 날 것 그대로의 몸과 그 몸이 발하는 삶의 욕망을 긍정한다. (최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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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모더니스트라 불리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세계는 일본영화사에서 어떤 분기점을 이룬다.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가 일본적인 정신성을 대표하는 예의바름, 절제의 미덕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슬픔을 우아하게 표상했다면, 마스무라 야스조는 생동하는 삶의 원초적인 충동과 욕망을 파격적으로 표출, 또 다른 일본성을 드러낸다. 이는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등 일본 뉴웨이브 계열의 감독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마스무라가 바라본 60년대의 일본은 치유될 길이 없을 정도로 병든 사회였고, 그의 영화에는 그러한 비관적 세계관이 담겨있다. 사회가 병들었고, 사람들의 감정이 병들었으며, 욕망은 뒤틀려있다. 그의 영화에서 전쟁과 관련된 시기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욕망은 다른 욕망이나 공동체에 의해 억압되는데, 그 공동체란 집안, 마을, 혹은 국가이다. 군국주의 사회 속의 ‘전체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희생됐던 개인의 삶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눌린 욕망들이 있고, 그 억압된 욕망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상을 뚫고 강렬히 분출된다. 또한 전후의 초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끝없는 성공을 꿈꾸며, 성적 욕망을 자유로이 표출한다. 이에 대한 과대망상적인 집착은 쉽사리 광기로 전이되고 그들 욕망의 충돌은 일종의 게임처럼 펼쳐진다.

이처럼 마스무라는 인간의 마성을 극단적으로 탐구한다. 특히 마스무라의 페르소나 와카오 아야코를 통해 자유롭게 표출된 여성의 욕망은 그 자체로 급진적이다. 아울러 사랑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정신적 뒤틀림과 신체에 대한 페티시즘적 욕구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병든 에로스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에로스는 결국 타나토스, 즉 죽음으로 이끌린다. 가령 <만지>의 부부는 “사랑만이 전부야.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라며, 정말로 죽음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간다. 마치 죽음만이 삶을 증명할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마스무라가 일본 영화계에서 이뤄낸 전복적 성취는 격정적 감정의 표출이 엄격하게 형식화된 미장센과 몽타주 스타일 속에서 정동의 변증법을 구축해낸다는 점에 있다. 오즈와 마찬가지로 그의 카메라는 고정되어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카메라 셋업으로 하나의 숏만을 찍고, 계속 셋업을 바꿔가며 360도 공간을 전면적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오즈와 달리 마스무라가 만들어내는 숏들의 프레이밍은 매우 탈중심적(파스칼 보니체가 말한 데카드라주 décadrage)이다. 

그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의 빈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하여 파편화되고 잘려진 느낌을 갖게 되는 숏들의 몽타주로 구축되는 영화적 공간은 시각적이라기보다는 촉각적인 접속에 의해 구성되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엄격한 형식적 스타일 안에 놓인 인물들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를 뚫고 나갈 것 같은 감정적 격동을 만들어내고, 그 감정들을 파편화해 다시 이어붙이는 몽타주가 강렬한 정동을 이룬다.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마침내 카메라가 움직이는 순간, 그 감흥의 강렬함은 말할 것도 없다.

가령 <아내는 고백한다>의 마지막 순간 비틀비틀 파멸을 향해 걸어가는 여자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트래블링 숏이 그러하다. 또한 <만지>의 최종적 순간에 세 명의 인물이 기도를 하고 수면제를 먹고 나란히 누워 죽음을 기다릴 때, 불교의 여보살화를 따라 수직으로 이동하는 카메라의 상승과 하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와 그 이행을 보여준다.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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