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섬뜩함

-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몰로흐>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권력 4부작’ 중 첫 번째 영화인 <몰로흐>는 히틀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권력의 민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두 번째 영화인 <황소자리>는 레닌을, <태양>은 히로히토 일왕을 등장시켰다. 구체적인 뉘앙스는 조금씩 다르지만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던 자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세 영화는 같은 화법을 취한다. <파우스트>는 전작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야기하려면 다른 접근법이 필요할 것이다). 감독은 히틀러의 권력이 기세등등하던 1942년을 배경으로 히틀러와 괴벨스, 히틀러의 부관이었던 마틴 보르만, 그리고 히틀러의 애인인 에바 브라운 등이 알프스의 고립된 저택에서 보내는 하루를 그린다.

그런데 정치적,역사적으로 굵직한 인물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특별한 사건이나 팽팽한 긴장이 가득한 분위기를 그리는 건 아니다. 반대로 감독은 그냥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일상적인 풍경을 그린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잠자리에 드는 그런 보통의 풍경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몰로흐>가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심지어 몇몇 장면은 블랙 코미디 같다는 느낌마저 준다. 이를테면 국가 운영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마틴 보르만은 그 육중한 덩치 때문에 의자에서 뒤로 넘어지는 ‘몸개그’를 선보이며, 히틀러는 눈밭에 나가 용변을 보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에바와의 잠자리를 피하려는 히틀러의 신경질과 우울증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감독은 최고 권력자들이 지닌 인간적인 모습들을 노골적으로 강조하며 이들이 두른 상징적 이미지를 부순다.


소쿠로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끌어들인다. 이미 영화가 시작할 때 감독은 죽은 개와 그 사체가 뿜는 악취를 강조하며 이 영화에 죽음의 기운을 드리운다. 그리고 틈틈이 무기력하게 늘어진 히틀러를 보여준 뒤, 마지막 장면에서 에바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히틀러에게 말하게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어요.” 즉 <몰로흐>는 수백 만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주역들을 등장시킨 뒤 이들을 조롱하고, 나아가 이 권력자 역시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히틀러 역시 약한 인간일 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몰로흐>의 이런 주제는 일견 당연한 것이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너무 보편타당한 이야기를 역사의 특별한 사례에 적용시킬 때는 어떤 허무함이 동시에 발생하기도 한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학살한 권력자 중 하나인 히틀러도 죽음이라는 절대적 관점에서 보면 한 명의 초라한 인간일 뿐이라는 허망한 결론 말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히틀러에 대한 연민으로도(‘그 역시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보통 사람이었다’), 또는 역사에 대한 지독히 냉소적인 태도(‘히틀러가 죽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결국 죽고 말았다’)로도 읽히는 <몰로흐>의 이런 접근 방식은 어떤 당혹감마저 안겨준다. 영화 공개 후 작품과 소쿠로프에 대해 반동적이라는 비판이 나온 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동의 여부를 잠시 미뤄놓고 생각해보면 <몰로흐>는 절대적인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질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몰로흐>는 히틀러의 인간적인 약함 그 자체에 방점을 찍기 보다는 이를 통해 ‘히틀러’로 상징되는 절대적인 권력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규정짓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드러내려 한다. 이미 작동 중인 절대적인 권력과 그 권력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자 사이에 필연적인, 또는 개연성 있는 연결 고리가 없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즉 <몰로흐>는 권력의 비인간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 그려진, 히틀러가 가졌다고 가정되는 권력은 더욱 공포스러운 것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논리적인 이해 너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저렇게 무기력해 보이고 죽음을 피할 수도 없는 히틀러가 어떻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까, 란 질문. 그리고 그렇게 행사되는 권력이 불러들인 파국 앞에 어떤 그럴듯한 설명도 내놓을 수 없을 때 발생하는 무력감과 공포.


그런 맥락에서 <몰로흐>의 가장 문제적인 장면 중 하나를 보자. 히틀러와 측근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에바 브라운이 마음에 안 드는 자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자는 농담을 한다. 그러자 히틀러는 묻는다.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가 어디지?” 분위기는 금새 냉랭해지고, 사람들은 서둘러 화제를 바꾼다. 많은 전범들이 실제로 홀로코스트의 존재를 부인했음을 상기하면 이는 끔찍한 농담이자 도발적인 문제 제기다. 그러나 이 장면은 히틀러의 권력이 실은 이미 히틀러라는 개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수백 만명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정작 ‘권력의 핵심’이라 여겨지는 인물이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말이다.

그렇기에 <몰로흐>는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시 강조하자면, 이 영화는 권력과 권력자의 성격에 대해 어떤 명쾌한 설명을 제시하기 보다는 이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차원에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른 어떤 영화보다 2차 대전 당시의 역사를 오싹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우스꽝스러운 언행을 보이는 영화 속 권력자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과 전쟁으로 부서져 가는 세상의 이미지가 아무렇지 않게 같이 제시될 때 권력은 결국 불가해한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즉 <몰로흐>가 그리는 건 우리의 이해 자체를 거부한 채 버티고 서 있는 권력의 섬뜩한 모습 그 자체이다.



김보년 프로그램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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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운명의 멜랑콜리

-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




알렉산더 소쿠로프는 러시아의 영욕이 ‘겨울 궁전’ 속에 모두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겨울 궁전은 러시아의 마지막 왕조인 로마노프 왕가의 궁전으로,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당한 곳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10월>(1927)에서 화려함의 극치로 묘사된 바로 그 궁전인데, 지금은 세계 최대 규모인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만약 대홍수로 세상이 파멸 직전에 놓인다면, 소쿠로프는 에르미타주를 ‘노아의 방주’에 싣고자 한다. 그곳엔 러시아를 넘어 인류의 찬란한 영광이, 또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이 모두 들어 있어서다.

바로크 회화의 경외감


<러시아 방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겨울 궁전에서 시작한다. 로코코 스타일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귀족, 군인들이 궁전 안으로 몰려 들어가고, 막 잠에서 깬 듯 내레이터는 “여기가 어디지?”하면서 관객의 의문을 대신 묻는다. 곧 이어 우리는 표트르 대제(그의 이름에서 도시 이름 페테르부르크가 나왔다)가 자기 신하를 때리며 심하게 꾸짖는 장면을 본다. 말하자면 지금 내레이터는 18세기 초에 와 있고, 그는 곧이어 프랑스 외교관을 만난다. 이 외교관이 궁전을 본격적으로 산책할 것이고, 우리는 그의 발걸음에 따라 앞으로 95분간 이어질 원테이크 영화를 볼 것이다. <러시아 방주>는 처음으로 원 숏 원 시퀀스(One Shot One Sequence) 형식을 선보인 경이로운 작품으로 영화사에 기록된다.

프랑스 외교관은 서구중심주의자로서, 러시아는 유럽이 아니라며, 러시아적인 아름다움을 폄하한다. 이를테면 러시아의 영웅인 표트르 대제는 걸핏하면 신하를 때리는 폭군에 가깝고, 에르미타주의 미술관은 바티칸의 복제물이라는 식이다. 내레이터는 외교관과 대화를 나누며, 종종 논쟁도 하고, 그의 궁전 내 여행에 동참한다.


외교관이 주목하는 궁전 내의 대상은 크게 세 가지다. 미술, 정치적 군사적 의례(의전과 의장), 그리고 음악이다. <러시아 방주>는 이 세 가지를 대상으로 18세기부터 현재까지 대략 3백 년의 역사를 넘나든다. 여행은 연대기순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먼저 외교관은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건립한 계몽군주 예카테리나 여제가 참관한 연극 공연을 본 뒤, 궁전 내의 그림들을 감상하기 시작한다. 만약 수집품이 그 나라의 미술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라면, 외교관은 에르미타주에는 라파엘로 급의 걸작은 없다며 러시아의 미술 문화를 애써 무시하려 든다. 곧 이어 외교관이 본 것이 신고전주의의 거장인 안토니오 카노바의 조각들이다. 우윳빛 대리석에 새겨놓은 그리스 로마의 찬란한 문화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지자 외교관은 조금씩 태도를 바꾼다.


태도의 변화는 바로크 그림들을 보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외교관이 바로크의 걸작 회화들을 볼 때, <러시아 방주>는 소쿠로프 특유의 숭고의 시간에 이른다. 곧 걸작에 압도되는 경외감과 함께, 아름다운 대상에서 느끼는 쾌감 같은 이중적인 감정이 밀려오는 것이다. 외교관은 플랑드르의 바로크 거장인 반 다이크의 『이집트로의 탈출 중의 휴식』(1630)부터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때 카메라는 아기 예수를 지키려는 성모의 불안과 예수를 찬양하는 아기 천사들의 기쁨을 자세히 전달하려는 듯, 그들의 얼굴을 천천히 클로즈업하며, 외교관의 흥분된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루벤스의 『바리새인 시몬 집에서의 만찬』(1629) 속 바리새 여성이 예수의 씻은 발을 금발 머리칼로 정성스럽게 말리는 장면, 엘 그레코의 『베드로와 바울』(1592)에서 두 성인이 아직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서로 실망하고 있는 모습, 렘브란트의 『다나에』(1636)에서의 황금빛 여성의 누드, 그리고 역시 렘브란트의 『탕아의 귀환』(1669)에서의 용서와 사랑이라는 부친의 관용의 태도에 눈을 떼지 못한다. 에르미타주의 바로크 회화들은 아마 대홍수 이후의 ‘러시아 방주’ 속의 가장 안전한 자리에 놓일 것 같다.




비스콘티의 멜랑콜리 닮은 무도회 피날레


소쿠로프의 영화세계에서 군인, 전쟁, 군사(軍事)는 자주 등장하는 주요한 테마다. 과거는 물론 현대에도 러시아는 여러 전쟁에 개입했고, 이는 현대 러시아 사회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소쿠로프는 1994년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역에 주둔하는 러시아 군대에 가서, 군인들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혼의 목소리: 전쟁의 기록>을 제작하기도 했다. 군사와 관련해서, <러시아 방주>에서 특별히 다루는 것은 러시아 황제의 의전과 그에 따른 군인들의 의장이다. 19세기 페르시아와의 갈등에서, 페르시아 주재 러시아대사관의 외교관들이 현지인들에 의해 학살된 비극이 있었다. 영화는 이제 관계가 정상화되어, 페르시아의 외교관이 러시아 황제를 방문하여, 과거의 사건에 대해 사과하는 의전 행사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장면은 의전이기보다는 웅장하게 안무된 무용에 가깝다. 황제와 외교관은 마치 무용극의 주인공처럼 마주 서서 의례적인 발언을 하고 있고, 화려한 홀 안엔 드레스와 군복으로 최고의 멋을 부린 상류층 인사들이 합창단처럼 둘러서서, 역사적인 장면을 더욱 빛내고 있다. 말하자면 겨울궁전 안엔 러시아의 영욕의 역사가 모두 새겨져 있는 것이다.


<러시아 방주>의 피날레는 주로 18세기, 19세기 복장을 한 상류층 사람들의 무도회다.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여제의 통치를 거쳐 러시아가 제국으로 성장하던 시기와 볼셰비키 혁명 전야, 곧 19세기 로마노프 왕가의 퇴보의 역사가 동시에 기억되는 시간이다. 화려한 홀 안의 중앙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표 악단인 마린스키 오케스트라가 거장 발레리 게르기에프의 지휘로 마주르카를 연주하고 있다. 이 곡은 마하일 글린카의 오페라 『황제를 위한 삶』의 춤곡이다. 글린카는 러시아 음악의 시조로, 『황제를 위한 삶』은 러시아 오페라의 선구작으로 평가된다. 말하자면 러시아의 자긍심을 한창 북돋는 작품이 연주되고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 역사의 절정을 향유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무도회는 마냥 흥겨운 것만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무도회가 끝난 뒤 이들이 전부 궁을 빠져나가는 장면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옷을 자랑하며 모두 걸어 나오면, 카메라는 마치 겨울궁전이 종말의 대홍수 속으로 떠날 듯 시커먼 바다를 조용히 비춘다. 말하자면 겨울궁전은 원래의 자기의 삶을 다 마쳤고, 그 삶을 누렸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화려한 의상과 빛나는 무대에서의 춤 장면은 마치 비스콘티의 <레오파드>(1963)의 마지막 장면 같다. 춤은 죽음을 앞둔 역사 속 사람들의 마지막 축제여서, 사라질 운명의 망각에 대한 멜랑콜리의 정서까지 전달하고 있어서다.


한창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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