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전/로만 폴란스키 + 시네마테크 필름라이브러리 컬렉션'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1.07.06 마테오 가로네의 영화세계
  2. 2011.06.20 [리뷰] 로만 폴란스키 '궁지'
  3. 2011.06.20 [리뷰] 로만 폴란스키 '혐오'
  4. 2011.06.20 [리뷰] 로만 폴란스키 '물 속의 칼'
  5. 2011.06.20 로만 폴란스키, 학살의 시대의 유령적 증언

지난 6월 12일 오후 이탈리아의 신예 마테오 가로네의 <고모라> 상영 후 ‘마테오 가로네의 영화세계’란 주제로 한창호 영화평론가의 강연이 이어졌다. 가로네의 영화적 토대부터 이탈리아의 현재까지 영화보다 더 흥미로운 얘기들이 오간 그 현장은 가로네 영화를 좀 더 깊게 조망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그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한창호(영화평론가): 마테오 가로네의 영화적 토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하나는 이탈리아 영화계의 큰 전통인 네오리얼리즘이다. 네오리얼리즘은 카메라를 들고 무엇을 판단하는 입장이 아니다. 자신이 관찰하는 대상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관객들에게 제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제한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관객들로 하여금 제시된 사실들을 보고 스스로 판단하게 만든다. 네오리얼리즘은 마테오 가로네의 데뷔작 <이민자들의 땅>의 첫 번째 미학의 토대였다. 또 하나는 마테오 가로네의 영화적 교양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인데, 네오리얼리즘과 같은 윤리적 사실주의 한편에 이탈리아식 코미디가 있다. 이탈리아식 코미디의 특징이라면, 그 당시 사회가 갖고 있는 사회적 이슈를 가지고 패러디하는 것이다. 거울을 비추듯 사회적 이면을 다루기 때문에 헛웃음이 나고 때로 눈물이 나기도 하는 그런 웃음을 준다. 이런 코미디 장르는 1960년대에 유행했는데, 60년대에 들어서면 네오리얼리즘은 거의 없어진 상태였고, 소위 작가감독들 중에서는 펠리니나 비스콘티 정도만 대중들과 소통되는 정도이지, 안토니오니나 파솔리니 같은 감독들의 영화는 대중들에겐 어려웠다. 대신 일반 관객들은 주로 코미디영화들을 봤다. 가로네가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코미디적인 부분들을 자신의 데뷔작에 담았다는 데에는 관객들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싶어 하는 태도가 보인다. 비교적 출발을 잘한 것 같다. 그 이후에 계속해서, 가로네는 사실주의에 토대를 둔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2002년 <박제사>를 만들면서 그런 자신의 미학적 태도를 180도 바꾸는 변화를 보여준다. <박제사>를 만든 제작사는 판당고라는 현재 이탈리아의 영화계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제작사다. 판당고의 프로듀서가 도미니코 프로카치라는 능력있는 제작사인데, 가로네는 <박제사>를 만들면서 그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미학적 방향을 틀었다고 볼 수 있다. 화가가 되고 싶어 했던 본인의 꿈을 영화적으로 실현한 영화가 바로 <박제사>라고 할 수 있다. 필름 느와르 장르 영화로 대단히 표현주의적이고 장식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로네의 영화를 보고 ‘필름 블루’라고 표현하듯이, 느와르영화인데 주로 검은색보다는 푸른 색에 대한 감각이 두드러진다. 현재 마테오 가로네의 영화와 함께 프로그래밍되어 상영되고 있는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들을 가로네가 굉장히 좋아했다. 특히 <박제사>를 보면 폴란스키의 영화가 많이 떠오를 것이다.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심리드라마이고, 장신적인 표현들이나 색깔들, 조명들과 같은 인공적인 부분들이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 또 한 가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서울아트시네마의 다음 프로그램으로 준비되어 있는 마리오 바바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마리오 바바를 소개할 때 보통 B급 호러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으로 주로 소개되지만 마리오 바바가 다른 많은 영화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그런 부분들만은 아닌 듯 하다. 마리오 바바는 화가다. 그의 표현력, 특히 색을 이용한 표현력은 웬만한 화가보다 낫다. 가로네 같은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마리오 바바의 영화들을 보고 자랐을 것이다. 노란색, 푸른색, 붉은색 들을 대단히 잘 이용하고 있는데 분명히 가로네가 마리오 바바에게서 배운 점이 있다. 가로네 영화에 관심있는 분들은 그와 폴란스키, 마리오 바바 사이에는 공통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가로네는 <박제사>로 칸 감독주간에 초청을 받아 호평을 받고서 다음으로 <첫사랑>을 만든다. <박제사>와 <첫사랑>은 미학적으로 같은 카테고리 안에 있다. 그리고 만든 영화가 바로 <고모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로네는 네오리얼리즘에서 출발했던 사람인데, 판당고 제작사를 만나면서 <박제사>와 <첫사랑>이라는 폴란스키 스타일의 심리드라마를 연속해서 만들고서, <고모라>를 통해 처음에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네오리얼리즘 미학으로 돌아왔다. 이 영화는 아시다시피 2008년 칸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마테오 가로네는 <일 디보>의 파올로 소렌티노와 함께 현재 이탈리아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히게 된다. <고모라>의 원작은 로베르토 사비아노의 논픽션이다. 사비아노는 앞으로 더 두고 봐야겠지만 가로네보다 더 멀리 갈지 모르는 작가이다. 이 책이 나왔을 때 사비아노는 27살 이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나폴리 출신으로 철학과를 나왔다. 마피아라는 말은 특정한 집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조직범죄를 말한다. 마피아들은 주로 이탈리아 나부에서 활동하는데, 활동하는 지역에 따라 조직의 고유 이름이 있다. 사비아노의 원작과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캄파니아에서 활동하는 카모라이다. 우리가 코폴라나 스콜세지의 영화를 통해서 알고 있고 국제적으로도 시칠리아의 마피아가 더 유명하지만 최근에 이탈리아에서는 이 카모라에 관한 문제들이 더 많이 기사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 카모라 조직을 사비아노가 취재 하면서 대학생때부터 지방지나 잡지에 르포를 썼었고, 본격적으로 써낸 작품이 바로 『고모라』이다. 책이 나오자 카모라는 공개적으로 사비아노에 대해 살해명령을 내렸다. 움베르토 에코는 작가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표했고 다른 많은 지식인·작가들이 나서서 이탈리아 정부는 사비아노의 신변을 보호해야한다고 말했다. 독자들의 반응 역시 대단하다. 사비아노를 지지하는 독서모임 같은 것을 하면서 함께 모여 『고모라』를 읽는 행사를 한다. 작가에 대한 지지와 열성이 높지만 불행하게도 현재까지도 카모라는 사비아노에 대한 살해위협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런 원작을 가로네는 용기있게 영화로 옮기게 된 것이다.



<고모라>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전지식이 필요할 것 같다. 먼저 나폴리라는 도시는 자연풍광이 굉장히 아름답고, 베네치아와 더불어 반드시 가봐야 하는 이탈리아 도시 중의 하나지만 수위 이탈리아의 남북문제의 상징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의 차이는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적인 것만 따져도 남부는 북부의 절반이 안 된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마피아들의 활동 지역 역시 대부분 남쪽에 있다. 오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어서 이탈리아를 대표하고 사랑받는 도시이지만, 실업률도 굉장히 높고, 영화에도 나오지만 중국인들이 많이 들어와서 지역경제의 일정부분을 빼어가고 있는 부분도 있다. 그 지역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조직이 바로 카모라이다. 시칠리아의 마피아와 다른 점은 영화에서도 강조되듯이, 경제 쪽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시칠리아의 마피아들은 과거에 독립운동도 있었을 정도로, 육지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앙 정부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특히 70년대 시칠리아에서는 중앙 정부에서 보낸 관리들을 마피아들이 암살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과정에서 정부측과 전면전 비슷한 면모를 띄게 될 때 나폴리 마피아는 정부와 싸우는 대신 경제 활동에 더 많이 집중하게 된 것이다. 영화의 대사들은 모두 나폴리 지역어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막이 없다면 이탈리아 사람도 이해하지 못하는, 악센트가 대단히 센 나폴리 지역어를 쓰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음악 역시 지역어로 가사를 붙여 부른 노래들이 주로 나온다. 음악을 쓰는 부분에 있어서는 마피아들이 나올 때 대중음악이나 락음악을 들려주는 점들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을 참조한 듯하다. 또 한 가지 이탈리아 남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일하다’는 말에 있는 것 같다. ‘일하다’는 말을 남부 사람들은 ‘피곤하다’는 단어로 표현한다. 이런 표현은 일반적인 편견들, 남부 사람들의 노동률이 낮은 것, 게으름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예가 되었다. 물론 그런 부분들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 속에는 남부와 북부 문제의 차별이 응축되어 있다. 남부는 과거에 대부분 농촌지역이었고, 북부는 공업지역이었다. 과거에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지주의 입장에서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소작농의 입장에서는 일을 한다는 말을 쓰기 주저되었을 것 같다. 착취당했던 남부 사람들의 피해의식 같은 것이 말 속에도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모라>는 크게 4개의 에피소드로 진행 된다. 첫 번째는 나폴리 북부의 스캄피아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자막에도 나왔지만 유럽에서 마약밀매 거래량이 제일 많은 지역 중의 한 곳이다. 그곳의 아파트가 나오는데, 과거에 60~70년대를 거치면서 하층민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 지은 건물인데, 지금은 보시다시피 범죄지역으로 빈민굴로 바꾸어버렸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는 토토와 살해당하는 마리아, 돈 치로 그 세 사람이 나온다. 토토는 커서 카모라 단원이 되는게 꿈인 소년이다. 마리아의 남편은 감옥에 있는데 아들이 다른 파의 조직에 들어 가버리는 바람에 보복을 당하게 된다. 돈 치로는 그저 돈심부름하고 대가를 받으면 되는 사람인데 조직원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어느 한쪽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는다. 토토의 입장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했던 그 지역의 질서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가로네는 마피아의 질서가 자연으로 변해있는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폴리 혹은 스캄피아만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잘 만들어진 갱스터 영화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마피아의 질서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라는 것은 단지 나폴리의 이야기로만 보이진 않는다. 두 번째는 에피소드는 마르코와 치로, 십대 갱스터의 이야기다. 이 에피소드는 갱스터 장르를 많이 이용하고 있고, 또 <박제사>나 <첫사랑>같은 영화에서 보여줬던 장식적인 화면들을 많이 쓰고 있다. 마르코와 치로는 드팔마의 <스카페이스>의 주인공에 매혹된 소년들이다. <스카페이스>에서 알파치노가 연기하는 토니 몬타나 흉내를 내면서 자기들도 언젠가는 조직의 두목이 되고, 나폴리지역을 장악하는 그런 꿈을 꾸는 친구들이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폭력이다. 역시 알레고리적인 부분이 많이 들어가 있다. 제도권의 질서에 따라 노력을 했을 때 그 노력의 상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문명사회에서의 당연한 바람인데, 나폴리처럼 카모라들이 장악하고 있는 곳에선 문명사회에서 제공하는 질서를 지키려고 노력했을 때 돌아오는 대가가 대단히 낮고 그 가능성이 낮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십대들이 폭력에 호소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다. 그게 정말 나폴리만의 문제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영화가 던지는 경고가 분명히 있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프랑코 역할을 맡은 사람은 현재 이탈리아를 대표적인 배우인 토니 세르빌로이다. <일 디보>에서 줄리오 안드레오티를 연기하기도 했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는 이탈리아 북부지역 산업지역에서 독극물을 받아와 남부에 묻는 과정을 다룬다. 합법을 가장한 불법행위로 소위 전형적인 카모라의 사업이기도 하다. 나폴리의 카모라가 시칠리아의 마피아 코자노스트라와 다른 점은 서류상으로는 사실상 모두 합법적인 것으로 꾸며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거다. 그 같은 경제행위가 과연 나폴리에서만 일어나는 경제행위일까. 가로네는 그런 부분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참고로 원작에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있고, 그 에피소드들 가운데 가로네가 선택을 한 것이다. 따라서 영화에서 다뤄지는 부분들에 대해서 가로네가 강조하고 싶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대단히 상징적인 에피소드다. 사실상 일반적인 경제행위라고 할 수 없는 행위가 벌어졌을 때 마피아는 축적을 하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죽어간다 것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들어있다. 마지막으로는 재단사 파스콸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가 중국인들을 교육할 때 하는 말이 있다. 휼륭한 재단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두 가지가 있는데, 인내와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 두 단어는 영화의 재단사 뿐 아니라 이탈리아 사람들을 상징하는 단어다. 이탈리아의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편견 같은 것 중에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말이 많고 하는 특징들이 있지만 사실 파스콸레같은 캐릭터가 전형적인 이탈리아인의 모습 중의 하나이다. 파스콸레는 차분하고, 조용하고, 자신이 갖춘 실력으로 묵묵히 일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카모라가 사업을 장악하고 있는 탓에 카모라와 관련된 쪽이 아니면 일을 할 수가 없다.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어 기사화되는 것으로 짐작컨대 그 지역에 불법으로 들어온 굉장히 많은 중국인들이 노예처럼 일하고 있는 상황이다. 의류산업은 고급패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국인들 또는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영화는 착취의 부분, 이웃의 문제가 바로 우리의 문제로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로네는 <고모라>를 통해 마피아의 질서가 스캄피아의 아파트에서만 한정적으로 일어나면 좋겠지만 그곳의 매카니즘이 이탈리아의 다른 곳, 나아가 유럽문명에 미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정리 | 장지혜 (관객 에디터) 사진 | 이호규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궁지>는 폴란스키가 할리우드로 가기 직전에 영국에서 연출한 영화다. 그 해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폴란스키의 데뷔작 <물속의 칼>과 마찬가지로 한 여자와 두 남자를 둘러싼 고립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만 <물속의 칼>이 권태기에 접어든 부르주아 부부 사이에 등장한 섹시하고 위험한 젊은 남성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을 다루고 있다면, <궁지>에서 세 사람의 관계는 좀 더 초현실적인 측면이 있다. 부상당한 두 명의 미국인 범죄자가 불가피하게 부르주아 부부가 살고 있는 대저택에 몸을 숨기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 영화의 이야기의 시작은 흔한 스릴러 의 그것과 같지만 전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는 듯 보이는 전형적 범죄자형 인간인 리처드 디키(라이오넬 스탠더)와 그의 유약한 동료 앨비. 리처드는 인적 없는 바닷가에서 고장 난 차와 앨비를 남겨두고 공중전화를 찾으러 가다가 외딴 곳에 자리 잡은 대저택을 발견한다. 리처드는 집에 들어가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며 동태를 살핀 후 저택에 살고 있는 조지와 테레사(프랑수아 돌리악) 부부를 협박하여 앨비와 함께 그 곳에 머물며 보스의 연락을 기다린다. 탈진한 동료 앨비가 죽자, 리처드는 조지를 위협하여 바닷가에 땅을 파고 앨비를 묻는다. 조지를 묻고 함께 술을 마시던 세 사람은 술에 취해 신세타령을 하며 기묘한 우정에 가까운 관계로 발전한다. 기다리던 보스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조지의 신경쇠약과 거의 어린아이의 정신 연령에 가까운 테레사의 장난은 어느 순간 도를 넘는다. 범죄자와 인질에서 시작해 기묘한 동거자로 발전한 세 사람의 관계는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타협점을 찾는다.

 

폴란스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세 사람을 둘러싼 <궁지>의 이야기 전개 방식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유사한 방식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실제로 흥미진진한 스릴러의 방식으로 시작되는 듯 했던 <궁지>는 리처드가 부부가 머물고 있는 저택으로 들어오고 동료인 앨비가 사망한 순간부터 일종의 부조리극으로 탈바꿈한다. 그들이 머무는 저택은 마치 폐허처럼 정돈되어 있지 않으며, 인적 없는 바닷가와 더불어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정서를 전달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리처드는 보스가 자신을 구해주러 오기를 기다리지만, 보스는 결국 끝까지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남아있는 것은 오직 세 사람을 둘러싼 장광설과 쾌와 불쾌를 오가는 그들의 관계망에 있다. 폴란스키는 고립된 세 사람의 심리 분석에 치중하는 대신 성격과 사회적 배경이 판이하게 다른 그들의 외양과 행동 방식에 보다 관심을 기울인다. 마치 괴물처럼 느껴지는 침입자 리처드의 거대한 몸집과 거친 외모와 말투, 그에 반해 작고 소심하고 열등감에 가득 찬 조지, 마치 어린애처럼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난잡한 여인 테레사의 외양은 화면 안에서 물리적으로 대조를 이루며, 폴란스키는 매 순간 이러한 외적 차이들을 극대화시키는 구도와 앵글을 선택함으로써 이미지의 긴장감을 주조한다.

이렇듯 <궁지>는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대저택에서 서로 다른 욕망과 성격을 지니고 있는 세 사람이 각자의 앞에 놓인 긴장감을 견디는 과정에 치중하고 있다. 보스는 과연 리처드를 구하러 오기는 하는 것일까. 조지와 테레사 부부는 이 기묘한 인질극에서 놓여날 수 있을 것인가. 조지와 리처드는 죽은 앨비를 땅에 묻는 과정에서 서로의 불안감을 은연중에 토로하고, 백치에 가까운 테레사는 그들 주변을 맴돌며 아이 같은 장난을 되풀이한다. 이 영화에서 배경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쇠락한 대저택은 그 자체로 세 사람이 머물고 있는 유일한 세계이자 요새, 성으로 자리매김한다. 조지와 테레사 부부의 떠들썩한 친구들이 저택을 방문했을 때, 급작스럽게 모든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폴란스키 감독은 세 사람을 둘러싼 무언의 절망과 권태를 이야기를 끌고 가기 보다는 그들의 의미 없는 행동 하나 하나를 주시함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분위기로 표현한다. 영화의 초반부 리처드가 저택을 뒤지고 다니는 장면들은 필요 이상으로 길게 보이며, 영화의 대부분은 세 사람의 의미 없는 행동을 좇아 마치 저택을 구심점으로 맴도는 꼭두각시처럼 인물들을 묘사한다. 폴란스키는 <궁지>를 통해 어디로도 탈출할 수 없는 거대한 삶의 부조리에 직면한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글/ 최은영(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만 폴란스키는 장편 데뷔작 <물속의 칼> 완성 이후 폴란드인의 삶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공산당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다는 이유로 의회로부터 고발 조치를 당했다. 예술을 옥죄는 환경에 환멸을 느낀 로만 폴란스키는 고국을 탈출해 영국으로 향했고, <쉘부르의 우산>의 카트린 드뇌브를 캐스팅해 <혐오>를 완성했다. 연약한 감정의 틈 속에 똬리 튼 검은 사연을 탐구하길 즐겼던 폴란스키는 <혐오>를 통해 성적 폭력에 따른 강박증으로 무너진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에 주목했다.

뷰티 살롱에서 근무하는 미모의 여인 캐롤(카트린 드뇌브)은 성적으로 억압된 기억에 사로 잡혀 늘 불안에 시달린다. 직장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에게마저 혐오감을 드러내는 그녀는 언니 소유의 아파트에서 거의 칩거하다시피 생활한다. 마침 언니가 남자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며 집에 홀로 남게 되자 캐롤은 깊은 우울 속으로 빠져들고 급기야 강간당하는 환각에 사로잡힌다.

선명한 플롯이 주가 되는 대다수 영화들과 달리 <혐오>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 위에서 광기를 드러내는 캐롤의 심리적 지옥도를 그려낸다. 인간 감정의 깊은 우물 속을 헤엄쳐 문제작을 건져내는 폴란스키의 연출의 특징은 늘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하고는 했다. 입버릇처럼 “이야기의 힘에 매혹된다"고 말하지만 이야기를 시각화하는 연출을 보노라면 그가 추구하는 영화의 개념은 회화에 가깝다. “영화는 그림이나 조각과 같다. 영화는 바라보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혐오>가 극중 아파트와 같은 좁은 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것도 폴란스키의 영화적 성향을 반영한다. 아파트처럼 일상적인 장소를 환각의 지옥도로 그려내기 위해 그가 추구한 표현주의적 면모는 화가의 손길을 연상시킬 만큼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털이 모두 벗겨진 채 말라비틀어진 토끼 고기랄지, 귀청을 찌르는 초침 소리에 맞춰 벽이 쩍쩍 갈라지는 장면은 단순한 시각적 스타일을 넘어 보는 이의 심리를 동요케 할 정도로 충격을 선사한다. 특히 강간당하는 캐롤의 환각을 표현하기 위해 좁은 복도의 벽을 뚫고 나오는 수많은 손의 이미지는 세계영화사를 바꾼 문제적 장면, 아니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인상적인 이미지뿐 아니라 그 속에는 불안에 잠식당한 개인, 무의식적 폭력에 대항하는 인간의 싸움이라는 주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후에도 <테넌트> <악마의 씨> <차이나타운> <비터문> <피아니스트> <유령작가>와 같은 걸작을 쉬지 않고 발표했지만 <혐오>가 중요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폴란스키 영화의 원형이라 할 만한 것들을 대부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악마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폴란스키의 영화를 두고 혹자는 그의 비극적인 삶을 이유로 제시하기도 한다. 실제로 로만 폴란스키에게 삶은 거대 악에 맞선 투쟁이자 싸움이었다. "친구들이 서구에서 사는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행복해할 때 나는 가능한 빨리 폴란드를 탈출하고 싶었다."는 그의 심리적 압박감은 <혐오>로 보건데 그대로 영화 속에 적용해도 무방하다.

<혐오>와 함께 곧잘 ‘아파트 삼부작’으로 소개되는 <테넌트>와 <악마의 씨>는 극단적 감정의 세계를 넘어 거대 악의 탐구로 옮겨간 폴란스키의 영화적 진화의 형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악마의 씨>에서 악마의 자식을 낳은 로즈마리(미아 패로우)가 엄마의 본능으로 아이를 품는 장면은 폴란스키의 악에 대한 견해를 잘 보여준다. 일개 개인의 악마성이 ‘씨’가 되어 세상에 폭력과 악을 퍼뜨린다는 것. 이처럼 그의 필모그래프는 인간의 악마성, 그리고 거대 악에 맞선 개인의 비극적 싸움, 두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모두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인간성의 극단으로 귀결되는데 <혐오>는 그의 영화적 주제가 가장 명징하게 드러난 경우라 할 만하다. 더군다나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심리를 구체화하기 위해 동원된 회화적 이미지는 그의 영화가 여전히 영화 팬들을 사로잡는 결정적 이유로 작용한다.

글/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영화사 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데뷔작 중 한 편으로 꼽히는 로만 폴란스키의 장편 데뷔작 <물속의 칼>은 폴란스키가 유일하게 폴란드에서 연출한 영화이기도 하다. 해외 영화제에서 공개되자마자 약관의 폴란스키에게 쏟아진 찬사로 인해 <물속의 칼>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그 해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 영화로 단박에 유명해진 폴란스키는 창작 활동이 원활하지 않았던 조국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그리고 마침내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궁지> <혐오> <악마의 씨> 등 화제작을 연거푸 쏟아내며 단숨에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혐오>와 <궁지>는 각각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과 금곰상을 수상하며 폴란스키의 재능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초기 폴란스키 영화의 걸작들이기도 하다.

폐소공포증과 관음증, 섹슈얼리티 탐구로 특징 지워진 폴란스키의 영화 세계는 데뷔작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권태에 찌든 부르주아 부부와 그 사이에 갑자기 끼어든 젊고 건장한 청년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대결 구도, 육체적, 계급적, 지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긴장감은 세 남녀와 그들이 머물고 있는 개인용 요트를 배경으로 점차 증대된다. 폴란스키는 이 영화에서 인물의 성격과 그들 간의 관계의 심리적 줄다리기를 그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타이트한 클로즈업 화면과 익스트림 롱 숏을 오가는 화면 구성 또한 그 긴장감을 관객으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는데 있어 더 없는 효과를 제공한다.

스포츠 칼럼니스트인 안제이(리온 니엠직)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크리스티나(조란타 우멕카)는 주말의 요트 여행을 위해 차를 몰고 가던 중 우연히 젊은 히치하이커(지그문트 말라노위즈)와 동행하게 된다.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과 몸뚱이밖에 없는 이 청년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안제이가 지닌 수컷의 본능을 일깨운다. 안제이는 만나는 순간부터 청년을 끊임없이 조롱하고 업신여기며 모든 면에서 청년을 누르려 한다. 이는 아내와 청년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언의 섹슈얼한 긴장감에 대한 열등의식과 불안,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혈기 방장한 청년은 안제이의 위압적인 태도에 모욕감과 반항심을 느끼고, 세 사람의 요트 여행은 안제이와 청년의 팽팽한 심리적 대결 상태로 인해 시종일관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 아래 지속된다. 청년이 애지중지하는 칼을 충동적으로 숨긴 안제이는 칼을 물속에 떨어뜨리고, 청년 또한 물속에 빠진다. 수영을 못한다던 청년이 익사했을까 노심초사하는 아내는 안제이와 말다툼을 벌이고 부부는 청년을 찾아 물속에 뛰어들지만, 청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과연 청년은 익사한 것일까.

이 영화의 제목인 ‘물속의 칼’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청년이 지니고 있는 칼은 공격성과 동물적 위계의 상징처럼 보인다. 폴란스키는 유난히 자신의 작품에 물의 이미지를 자주 등장시키는데, 여기서 요트가 떠다니는 거대한 호수는 부르주아 부부의 평온한 주말 여행 아래 도사리고 있는 온갖 추악한 감정들을 감추고 있는 장막에 다름 아니다. 무엇이 있는지 모를 호수의 심연 아래 감추어진 것들을 폴란스키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끄집어낸다.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 차창 안에서 가벼운 말다툼을 벌이는 부부의 대화는 마치 물속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관객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곧이어 이어지는 불편한 부부의 침묵이 영화의 불길한 정조의 시작이라면, 안제이가 띄엄띄엄 들려주는 무모한 선원의 이야기, 배를 다루는 안제이의 명령조의 태도, 뜨거운 냄비를 둘러싼 소동, 배 안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에피소드들은 이러한 세 사람 간의 불편한 긴장감을 수렴하며 조금씩 배가시키는 장치이다. 그 중에서도 칼은 안제이와 청년 간에 은연 중 벌어지고 있는 주도권 싸움의 정점에 있는 가장 위험한 동물적 본능을 자극한다. 청년이 지니고 있는 육체적 젊음의 위용은 은연 중 안제이의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며, 칼을 가지고 위험한 장난을 치는 청년을 바라보는 안제이의 시선은 그 칼이 지닌 야성에 대한 질투와 매혹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칼이 물속에 빠지고, 곧이어 청년이 물에 빠지면서, 안제이가 가장 두려워하던 아내와 청년의 섹스가 이루어진다. <물속의 칼>은 치밀한 내러티브 구조를 통해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폭력성을 탐구한다. 이는 단순한 게임에서 가장 잔인한 홀로코스트까지 확장될 수 있는 이성의 가면 너머에 존재하는 야성에 대한 폴란스키의 집요한 시선이기도 하다.

글 / 최은영(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13세 소녀 강간 혐의로 전 세계를 시끄럽게 했던 로만 폴란스키가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 신작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때마침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로만 폴란스키의 초기 걸작선’이 상영 중이다. <물속의 칼> <혐오> <궁지> 모두 세 편으로, 폴란스키를 대표하는 영화들이지만 40년 넘는 그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건대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폴란스키에 대해서는 좀 더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영화평론가 정지연이 로만 폴란스키의 비극적인 과거사와 영화 세계를 엮은 글을 보내왔다. ‘로만 폴란스키의 초기 걸작선’ 상영작에 대한 좀 더 세밀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뒤에 실린 리뷰를 참조하시길.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쓰>(1971)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왕비의 죽음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한밤 중, 고성의 숨 막히는 적막을 가르는 여성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홀로 남은 맥베스는 나지막이 읊조린다. “이제 공포는 실컷 맛보았다. 살기등등한 생각도 이제 예사가 되어 그 어떤 무서운 일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게 되었다” 차가운 돌바닥에 관절이 끊어지고 시뻘건 피를 뿜으며 처참하게 죽은 왕비의 시신을 확인한 왕은 역시 태연하게 말한다. “언제든 죽어야할 사람이었다. 한번은 듣게 될 소식 아니었던가.”

맥베스의 심리적 공포를 극적인 스펙터클로 몰아붙였던 구로사와 아키라나 오손 웰즈의 버전과 비교했을 때,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쓰>는 가장 건조하지만 살의는 강렬하다. 여느 호러 영화에서도 쉬이 등장하지 않았을 정도로 처참한 주검을 묘사해놓고 폴란스키는 정작 그것을 목격하는 맥베스의 무심한 태도를 연출한다. 그것이 단순히 영화적인 연출의 방식이었다고 한다면 그리 주목할 만한 것이 못된다. 하지만 그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까지 수상했던 <피아니스트>(2002)를 상기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의 영화보다도 더 비극적이고 센세이셔널 했던 삶의 연대기까지 보태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연출의 방식이 아니라 그의 역사 혹은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증언적 태도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피아니스트>는 폴란드계 유대인이자 피아니스트였으며, 모든 가족을 아우슈비츠에서 잃고 그 홀로 게토에서 살아남은 스필만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지점은 학살과 폭력, 그리고 폴란드인들에게 멍에로 남은 죽음에 대한 무력한 순응과 방조에 대한 증언적 이미지다. 이것은 확실히 <쉰들러 리스트>(1993)와 같은 그간의 유태인 수용소 영화들의 그것과는 차별된다. 이러한 영화들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독일인의 잔악한 폭력과 유태인들의 비극적 삶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애도를 전면으로 내세웠다면, <피아니스트>에는 연민과 분노가 부재한다. <피아니스트>를 지배하는 가장 압도적인 이미지는 주검과 폭력에 대해 살아남은 자들이 보여주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무심한 태도들에 있다. 그들은 그 모든 폭력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 모든 폭력은 이내 일상이 된다. 이윽고 그 비좁은 게토에서 조차 부유한 자와 굶주리는 자가 나뉘고 장사치가 넘쳐난다. 거리 여기저기에는 어린 아이들을 비롯한 시신들이 흔한 돌멩이처럼 널브러져 있다. 악취를 내며 썪어가는 시신들을 삶의 조건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인 게토 안 유태인들의 모습은 흡사 공포에 무심해진 맥베스의 고백처럼 체념적이다.

프리모 레비(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작가)는 수용소의 대학살에 대해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 남은 자의 이야기는 죽음의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을 누군가 재현한다면 현존하는 감독 중 폴란스키를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33년, 파리에서 폴란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로만 폴란스키는 3살이 되던 해 폴란드로 이주한다. 그리고 8살 때, 게토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던 죽음의 열차에서 폴란스키의 어머니는 그를 열차 밖으로 밀어내 살려낸다. 혼자가 된 어린 폴란스키는 감시를 피해 노숙을 하며 고향으로 달아났고, 그곳에서 가톨릭계 폴란드인 가족의 도움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살아 남았다. 미국의 평론가 짐 호버만은 <피아니스트>에서 강제노역장으로 이주하던 가족들에게, 캐러멜 한 조각을 비싼 값으로 팔아치우던 어린 소년이 어쩌면 폴란스키의 자화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역사적 학살의 순간에 폴란스키가 목도하고 각인했던 것은 거대한 폭력의 구조였으며 죽음 혹은 생존이라는 백짓장 같은 양면을 지닌 처참한 삶의 몸부림 이었을 것이다. 이 트라우마는 이후 폴란스키 겪게 될 또 다른 비극들 (만삭의 아내 샤론 테이트가 찰스 맨슨의 신봉자들에 의해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당한 사건과, 이후 13세 소녀 강간혐의로 30년이 넘도록 미국 사법부에 의해 수배 등)과 더불어 그의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주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는다. 제한적 공간이 압박하는 폐소공포증, 죽은 자들의 망령들, 가학의 기묘하고도 본성적인 쾌락들, 그리고 이성적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신경증과 강박증, 자본주의 정치체제라는 거대한 구조 내 옥죄인 숙명적이고 비극적인 인간들이 그것이다.

유령과 공포, 숙명의 서클

<유령 작가>(2010)는 미국 누아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했던 그의 걸작 <차이나타운>(1974)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전통적인 누아르 영화들이 팜므파탈의 덫에 걸린 남성들의 곤경을 흑백의 숙명론적 미학으로 묘사하면서, 웨스턴과 갱스터의 영웅이 기묘하게 얽혀있는 자기 파괴적인 고독한 남성 영웅이라는 캐릭터를 창출해냈다면, <차이나타운>은 선악의 이분법과 캐릭터를 역전시키는 것으로 구조화한다. 전통적 누아르에서 보험금과 치정으로 얽혀있던 사적 욕망들은 멕시코 접경지역의 수력발전을 둘러싼 이권 사업과 연결되면서 공권력 및 자본의 문제로 확장되고, 탐욕스런 욕정과 물욕의 화신이었던 여성들은 남성 가부장적 자본주의 권력 구조의 비련한 희생자로 묘사된다. 또한 잭 니콜슨이 연기하는 냉소적인 사립탐정은 진실의 주변을 맴돌지만, 결국 예정된 운명의 서클 안에서 탈주하지 못하고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실패하는 사나이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를 대표하는 예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탐욕스러운 자본가 아버지로부터 강간당해 딸임과 동시에 동생을 낳게 되는 비련의 여주인공은 모든 추악한 권력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달아나지만, 경찰의 총탄에 결국 살해당한다. 이 장면에서 경찰은 탐정에게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여기는 차이나타운이야”라고 말한다. 이것은 위로와 치유의 말이 아니라, 그가 넘어설 수 없는 권력과 공간의 정치에 관한 충고이자 체념이다.

<유령작가> 역시 권력과 욕망의 구조 안에서 이용당하고 결국 실패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학살극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전직 영국 총리가 대필 작가를 통해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 거의 완성단계에서 작가가 사고로 죽게 된다. 그러자 그 업무가 새로운 유령작가(이완 맥그리거)에게 맡겨진다. 그러나 정계의 복잡한 권력관계, 그리고 영국과 미국을 둘러싼 전쟁의 밀약들, 심지어 총리와 그의 아내 및 비서 간에 얽혀있는 치정 드라마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연을 알 수 없는 음모에 휩싸인 미궁이다. <유령작가>를 누아르의 계보에서 <차이나타운>에 비교한다면, 캐릭터와 관계들은 다시 한번 전도된다. 눈에 보이고 명백한 권력들은 허상이자 꼭두각시며, 진실은 언제나 추악한 욕망과 함께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 ‘유령’이라 말하는 작가는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차이나타운>의 변주이다. 작가는 총리의 회고록 출판기념파티에서 총리의 아내에게 진실을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파티장을 나선다. 그리고 거리로 나서는 순간 교통사고를 당한다. 이때 사고를 알리는 충돌 음이 들려오고, 그가 지녔던 회고록 원본이 공중으로 흩날려 사라진다. 극중 자신을 언제나 ‘유령’이라고 소개했던 남자는 이 순간 흩날려 쓰레기로 전락하게 될 진실의 조각들과 함께, 그의 전임자가 그랬던 것처럼 진짜 유령이 되어 공중으로 부유한다.

이 기이한 주술적 운명의 실타래는 폴란스키의 오컬트적 취향과 유령에 대한 매혹, 그리고 현대사에 대한 은유로서 지속적으로 관철된다. 유령들은 자신이 죽어간 자리를 배회하고, 산자들은 망령들에 의해 그 공간에 강박된다. 유령은 진실을 알고 있으며, 진실은 산자에게 속삭여지지만(<유령작가>에서 전임 작가가 남긴 메시지들, 자동차에 입력된 네비게이션의 주소지, 그의 행적들을 알리는 우연적 사건들), 산자가 진실에 다가가는 순간 이는 죽음이라는 실타래가 되어 그의 운명을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유령작가>에서 서로의 운명을 속박하며 위장하는 권력자들의 진실은 오로지 유령들의 발자취에서만 드러나고, <차이나타운>에서 모든 진실은 결국 어둠 속에서 살해되고 잊혀진다. 결국 폴란스키에게 유령은 비극에 죽어간 자들이자,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며, 산자에게 속삭이나 그것이 결국 죽음을 재촉하는 망령의 저주와도 같은 것이다.

결국 <유령작가>를 지배하는 숙명적이고도 음모론적 세계는 폴란스키에게 있어서 오컬트적인 마녀들의 주술적 세계의 동어반복이다. 현대 자본주의 정치사회를 음모론적 세계의 학살과 폭력으로 형상화한 <유령작가>의 계략들은 결국 <맥베쓰>에서 왕좌에 대한 무한한 권력과 탐욕을 자극했던 주술적 파워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주술에 의해 사탄의 권력을 부여받고자했던 <악마의 씨>(1968)와 <나인스 게이트>(1999)에 묘사되는 음모로 연결된다. 폴란스키의 영화적 세계에서 이 모든 음모 혹은 주술은 평범한 일상 속에 은폐되어 있으며, 그것이 특정한 순간에 인간의 선악이라는 본성을 구분하지 않고 출몰한다. 그 욕구는 절대적 폭력, 가학의 쾌락으로 형상화된다. 가장 역사적인 테제로서 <피아니스트>는 나치가 수행했던 ‘악의 평범성’에 대한 가장 직설적 묘사이다. 또 다른 정치적 버전으로서 <시고니 위버의 진실>(1994)은 폭력과 악의 상징을 잔혹했던 군부정권의 반인륜적 행위로 한정하지 않고, 그 희생자가 같은 방식으로 폭력을 앙갚음하고자 하는 가학의 쾌락과 피학의 트라우마가 어떠한 방식으로 순환하는지 보여준다.

가학과 피학에 관한 섹슈얼한 버전은 <비터문>(1992)이다. 이 영화는 남자와 여자의 지배와 소유가 어떤 식으로 역전되는지, 어떤 식으로 극단화되어 죽음의 제의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외설적인 욕망의 진술이다. 결국 폴란스키는 모든 인간의 평범한 일상에 내재된 폭력적이고 악마적 본성은 사소한 계기들에 의해서도 충분히 돌출되리라 확신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결국 <시고니 위버의 진실>의 엔딩 시퀀스에서, 가학자와 피학자는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며 공존한다. 절대적 가학자와 절대적 피학자를 구분하지 않는 이러한 공존은 학살의 시대를 경험한 감독의 냉소적이고 비관적 세계관 그 자체이다.

신경증과 강박증

폴란스키 영화의 여성들이 신경증 환자라면 남자들은 강박증 환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특정한 공간, 폐쇄적인 공간의 내부에 직접적이든 은유적이든 감금이라는 형태로 속박되어 있다. 먼저 신경증 환자로서의 여성 이미지는 <혐오>(1965)에서 잘 드러난다. 카트린느 드뇌부가 연기하는 캐롤은 성적 욕구와 결합에 대한 과민한 공포와 불안으로 스스로를 아파트에 감금하고 그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남성들을 살해한다. 그것은 <차이나타운>의 에블린(페이 더너웨이), <맥베쓰>의 왕비, 그리고 <비터문> <나인스 게이트> 등에서 연기했던 폴란스키의 세 번째 부인이자 여배우인 엠마누엘 세이그너의 캐릭터 등과 연결된다. 또한 흥미롭게도 이 모든 여성들은 신경증 환자임과 동시에 남성 성애적 대상이며, 그 이상화 과정에는 폴란스키의 소녀성애를 의심케 할 정도의 백치적 순수함이 부과된다.

반면 거의 예외 없이 죽음과 실패를 향해 가는 폴란스키의 남성 캐릭터들은 <물속의 칼>(1962)에서 거만하고 과시적이지만 정작 젊은 소년의 육체와 치기를 질투하는 부르주아 남성의 좌절감, 혹은 아내의 실종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도움주지 않는 낯선 타국에서의 분투를 다룬 <해리슨 포드의 실종자>(1988)의 인텔리 남편, 유령적 환영과 현실의 경계에서 분열하는 <테넌트>의 세입자, 성공을 위해 아내를 악마에게 바치는 <악마의 씨>의 연극배우 남편(존 카사베츠), 그리고 거대한 권력 속에서 패배와 무력감의 극단을 경험하는 <차이나타운>과 <유령작가>의 그들처럼 하나같이 자신들의 내재한 욕망과 공포에 의해 사이킥한 감금상태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이 모든 유폐는 그것이 신경증 환자인 여성이거나 강박증 환자인 남성이건 모두 제한된 공간으로 심리적 상태를 투사하며 발생한다. <물속의 칼>이나 <비터문>에서 인물들을 세계와 차단하고 고립시키는 요트 혹은 거대한 유람선, <궁지>와 <맥베쓰>에서 지배와 감금이 이루어지는 고성들, <피아니스트>에서처럼 거대한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여 아무도 쉽게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게토 혹은 수용소 등 이 모든 폐쇄적 공간들은 그 자체로 폴란스키 영화의 캐릭터가 되어 주인공들의 심리적 강박과 공포의 근원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의 영화 속에서 이미 죽은 자들은 유령이 되지만, 아직 살아남은 자들은 경계에서 망연자실한 상태로 주저한다. 하지만 폴란스키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을 도와준 나치 장교는 그와의 마지막 대면에서 “이제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살 것인지” 질문한다. 스필만의 대답은 간단하다. “피아니스트가 되어 다시 연주할 것이다”. 삶과 죽음, 진실과 은폐, 산자와 사자(死者), 구조와 개인, 폭력과 치유, 망각과 상실은 언제나 경계를 넘나들며 삶의 조건 속에 스며 있다. 일상은 그저 무심히 진행될 뿐이다. 무력하지만 그 안에서 그저 살아갈 뿐이다. <유령작가>에서 흩날리어 결국 쓰레기로 치워질 진실의 회고록 원본은 주검과 함께 유령이 되어 거리를 부유할 것이다. 험한 세상을 체감한 노장의 숙명적이고 냉소적 세계관이 여전히 쓰디쓰고 섬뜩한 이유다.

글/ 정지연(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