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언제나 육지에 사는 이들의 철저한 편견과 대상화의 공간이었다. 바다 너머에 있는, 말도 풍습도 다른 신비로운 곳, 제주. 그곳을 배경으로 한 배창호 감독의 신작 <여행>에서 그려지는 제주 역시 그렇게 ‘여행지’로서의 공간이다. 하지만 <여행>이 단순히 육지인들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으로서의 피상적인 제주를 그리거나, 그저 표피적인 낭만적 도피로서의 여행을 그리는 건 아니다. 옴니버스 구성을 취하고 있는 <여행>의 세 에피소드는 오히려 사람의 마음의 풍경을 담아내는 데에 집중한다.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은 마음의 풍경 뒤를 받쳐줄 뿐이다.

흔히 여행을 ‘너른 세상과의 대면’이라 한다. 뒤집어보면 그 말은 오히려 자신을 스스로 타자의 위치에 놓는 경험이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정체성을 대변해주는 친근하고 낯익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통해 다른 맥락에 속한 자신의 위치를 보는 것,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대상화하여 또 다른 자신의 눈으로 스스로를 보는 것.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풍경과 새로운 사람이란, 결국 타자로서의 자신을 보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배창호 감독의 <여행>이 보여주는 것 역시 바로 그런 것들이다. <여행>의 세 에피소드 모두 제주에서의 여행을 통해 새로이 발견하는 마음의 풍경을 그린다. 심지어 제주도에 살면서 제주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두 번째 에피소드마저 그렇다. 다만 다른 두 개의 에피소드가 밖에서 제주로 들어온 이들의 여행을 다룬다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제주 안에서 또 다른 제주를 여행하는 일종의 ‘내면의 여행’을 그린다. 안과 밖이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다.


당연히 에피소드마다 분위기도 다르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서툴게 머뭇거리는 이십대 초반 청춘들의 이야기는 풋풋하고 싱그럽다. 십여 년 만에 엄마를 찾게 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두 번째 에피소드는 좀 더 짠하지만 따뜻하다. 얼결에 가출했다가 작정하고 제주에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주부의 작은 일탈(!) 이야기는 귀엽고도 유쾌하며 여유롭다. 이 모두를 관통하는 것은 삶에 대한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와 따뜻한 시선이다. 세 에피소드들이 외부의 이 시선과 서로 맞물리면서, <여행>은 삶에 대한 찬가이자 제주 찬가가 된다. 제주가 너무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곳이어서? 글쎄, 오히려 어깨 위의 무거운 삶의 고난을 내려놓고,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그 고난을 기꺼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배창호 감독이 90년대 말부터 만들어온 ‘작은’ 영화들은 대체로 삶에 대한 번뜩이고 깊이 있는 통찰 사이로 유머와 해학을 드러내면서 일종의 ‘구도’적인 특징들을 드러내왔다. <여행>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유쾌한 작은 섬 같은 작품이다. 인생과 예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 그 자체를 들여다보며 잠시 쉬어가는 듯, 말하자면 이 영화 자체가 ‘여행’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많은 관객들이 나와 비슷한 반응을 하게 될 듯하다. <여행>에서 별 것 아닌 것 같았던 장면들을 불현듯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짓게 되는 것 말이다. (김숙현: 프레시안무비 기자)


 >> 상영일정
1월 23일 토요일 6시 30분 <여행> 상영후 관객과의 대화
장소: 서울아트시네마(시네마테크 전용관)


 

배창호, 한국영화의 길을 묻다

[핫피플] 신작 <여행> 완성한 배창호 감독


1980년대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라 불리며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던 배창호 감독은, 전설의 명감독으로 잊혀지길 거부하며 끈질기게 지금껏 현장에 남아있는 몇안되는 인물에 속한다. 실제로 배창호급 감독은 현재 충무로에 남아있지 않다. 그의 위급으로 유일하게 임권택 감독이 활동하고 있을 정도다.


배창호 감독은 영화계가 자신에게 공룡 화석이 되라며 자꾸만 등을 떠밀어도 악착같이 원 안에 남아 영화를 만들어 왔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 그는, 이때껏 자신이 만들어 왔던 상업영화 방식을 버리고 새 길을 선택했다. 1998년부터 지금껏 그는 네편의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러브 스토리>와 <정> 그리고 <흑수선>과 <길> 등이 그것이다. <흑수선> 때 잠시 상업영화권으로 외도를 했다가 다시 독립영화의 길로 컴백한 배창호는 최근 또 다른 비상업, 저예산영화 한편을 완성했다. 새영화는 다소 고답적이고 옛스러워서 고색창연한 느낌이 드는데, 바로 <여행>이란 제목이기 때문이다. 총 150분짜리로 상업영화권이라면 깜짝 놀라게도 '단 돈' 1억6천만 원으로 찍었다. 기획은 아리랑TV와 제작사 디앤디미디어가 했다.

- 언제부턴가 당신은 고집스러운 저예산주의자로 읽힌다.
"그렇지 않다. 다만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 자본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졌을 뿐이다. 큰 영화라면 <흑수선>이 있었지 않나. 물론 앞으로 상업영화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영화 풍토라고 하는 것이 지나치게 돈,돈한다.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감독의 창작정신, 예술적 영혼을 자본에 종속시키게 만든다. 인간을 깊이있게 느낄 수 있는 정서와 주제를 담은 작품이 만들어질 수 없는 환경이다. 그렇다면 독립영화 방식의 영화만들기가 지금의 내게는 맞다고 본다."
- 이번 영화는 어떤 작품인지 독자들을 위해 직접 설명해 달라.
"제주도에 대한 영화다. 제주도 홍보영화가 아니고 제주도가 배경인 영화. 원래 제작비는 문화관광부의 관광진흥기금에서 나왔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돈을 댄 사람(정부)은 공간에 대한 영화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 영화의 목적성은 사실 그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작품을 찍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1억6천만원에 불과했지만 전혀 창작의 제한이나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냥 제주도를 로케 장소로만 사용해 달라고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제주도에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찍었다. 공간은 뒤로 가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앞에 나왔다. 자본의 당초 목적이 무엇이었든 보통 우리가 해왔듯 극영화 한편을 만들었다. 근데 그게 오히려 더 좋았던 모양이다."
- 더 좋았다는 건 무슨 말인가?
"<로마의 휴일>같은 영화를 생각해 보면 된다. 맞다. 이번 영화를 찍을 때 <로마의 휴일> 생각을 많이 했다. 영화 속에서 로마 얘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자신의 예술적 고향인 것처럼 생각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지로 로마를 꼽았을 것이다. 이번 영화 <여행>이 그렇다고 보면 된다."
- 공간는 뒤로 가고 스토리가 앞으로 나왔다고 했는데 그 내용은?
"이 영화는 사실 3부 옴니버스다. 50분씩 세편. 1부는 젊은 연인이 제주를 여행하며 사랑의 교감을 하는 내용이고 2부는 제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심리를 담았다. 마지막 장은 홀로 제주를 찾은 중년 여인의 외출을 다뤘다."
- 사실 세편 모두 미리 봤다. 마지막 장에서 여주인공이 홀로 벤치에 앉아 읽는 워즈워드의 시 <초원의 빛>이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은 싯구 중에,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정도를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시의 전문 가까이를 주인공의 독백으로 낭송하게 했다. 의외로 좋지 않던가.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으로서/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져가는/돌이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우리는 서러워하지 않으며/뒤에 남아서 굳세리라 등등. 어때? 좋지 않은가?"
- 문어적인데도 좋다. 사람들은 종종 문어적으로, 문예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당신의 영화는 일깨워준다. 당신의 영화의 실체는 그래서, '퓨어리즘(Purism)'이다.
"(웃음)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다. 돌이켜 보면 그런 게 좋은 것이다. 그런 게 오래 남는 것이다. 우리는 오래 남는 영화를 만들고 오래 남는 영화를 봐야 한다."
- 그거 아시는가?
"뭘?"
- 이번 영화에서 매 에피소드 마지막 장면이 모두 길로 끝난다.
"아 그랬던가? 몰랐는데 난?"
- 모른 척 하시는 걸로 믿겠다.
"(웃음)"
- 아직 배감독이 걸어야 할 영화의 길은 끝나지 않았는가?
"길은 끝나지 않는 법이다. 난 언제나 그랬지만, 지금도 영화를 찍고 싶다.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 젊은 감독들, 젊은이들과 흉허물없이 지내시는게 보기 좋다는 사람이 많다.
"작가연, 거장인 양하는 것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길일 뿐이다. 그러면 뭐하겠는가. 젊은 사람들과 지내 보면 여러 아이디어가 솟아 나온다. 난 그걸 즐긴다."
- 다음 행보는 무엇이신가?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난 늘 열려있다는 것이다. 배창호 감독이 이런 영화를 할 수 있을까 혹은 저런 영화를 할 수 있을까,하는 식의 생각들을 갖지 않도록 계속해서 움직일 것이다. 코미디도 하고 싶다. 예전에 내가 출연했던 <개그맨>같은 영화. 요즘 세대들이 즐길 수 있는 코미디 한편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 이 인터뷰는 프레시안의 '오동진의 영화갤러리' 에서 부분 인용했습니다.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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