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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Talk

[시네토크] 힘들 때마다 자꾸 생각나는 영화 - 장준환 감독이 선택한 <정복자 펠레>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서 선택한 영화는 빌 오거스트 감독의 <정복자 펠레>(1989)다. 대학 시절 하숙집에서 브라운관으로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는 장준환 감독은 스크린의 필름으로 다시 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고 한다. 150분의 러닝타임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정복자 펠레>에 대한 소감을 나누면서 장준환 감독의 영화 창작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여기 그 현장 풍경을 전한다.


허남웅(영화칼럼니스트): 방금 보신 영화를 선택해주신 장준환 감독을 모셨다.
장준환(영화감독): ‘이것이 영화다’라는 주제에 저는 아직 영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데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정복자 펠레>였다. 대학 다닐 때 하숙집에서 형들이랑 두 권짜리 비디오테이프로 처음 봤다. 그때 이상하게 오래 남아있는 영화, 계속 마음속에서 어느 순간 떠오르게 되고, 되짚어 보게 되고, 어떤 장면들이 지워지지 않고, 그런 영화중 하나였다. 실은 제가 그때 열악한 환경에서 조그만 브라운관으로 본 영화를 필름으로 다시 보고 싶다는 개인적 욕심도 있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굉장히 좋다.

허남웅: 브라운관 이후에 스크린으로는 처음 보시는 건지. 아무래도 브라운관과 스크린의 감흥이 다를 것 같다.
장준환: 그때는 이렇게 긴지 몰랐다. 길지 않다고 느꼈다. 지루한 건 아니었고 많은 이야기를 한 영화 안에 담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북구의 몽환적인 자연의 느낌, 북쪽이어서인지 낮이 짧고 석양이 긴 점, 촬영의 묘미들이 필름으로 보니 더 자세하게 보인다.

허남웅: 관객과의 대화를 하기에 앞서 감독님과 인터뷰를 했을 때, 영화 속에서 펠레가 친구를 때리면서 동전을 주는 장면이 가장 슬펐고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는데.
장준환: 감정의 층이 다양한 장면이다. 펠레가 그 아이를 때리는 심정이 단순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이해는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에게 동전 하나를 주면서까지 자기 삶에 대한 울분이나 답답함을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 저는 안타깝고 슬프다. 그 친구 아이도 동전 하나를 갖기 위해서 맞으면서도 동전을 쳐다보고 있다. 느낌들이 굉장히 섬세하면서 깊이가 있고,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허남웅:
한편으로는 <지구를 지켜라> 같은 영화가 갖고 있는 정서와 <정복자 펠레>가 가지고 있는 정서가 공유되는 지점이 있다. 약한 인물들이 좌절하게 되는 이야기다.
장준환: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서 보고 싶은 것은 너무나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보다는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어떤 감정들의 층위를 증폭시킨 것이라고 본다. 그것들을 보면서 쾌감 내지는 즐거움을 얻는 것 같다. 당연히 이런 인물들에 대해서 관심이 가고 특히나 어린 시절에, 흔히 성장 영화라고 하는 큰 사건을 겪으면서 세상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가 자꾸 저는 끌린다. 그래서 단편 때부터 어린 시절이 주는 트라우마나 그때 밖에 가질 수 없었던 즐거움, 감동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허남웅: 영화가 굉장히 슬플 수도 있는 영화인데 절제되어 있다. 좌절만 하는 아버지 역할의 막스 폰 시도우의 연기가 절제된 영화의 느낌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장준환: 감탄했다. 어떻게 저렇게 디테일하고 자연스러우면서 때로는 강한 느낌을 잘 표현했을까. 마지막에 같이 못 떠나겠다고 말하기 전 뒷모습으로 울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연기는 온 몸으로 하는 것이구나, 새삼 느꼈다. 사실 이 영화는 지구상에서 멀리 떨어진 북구의 영화지만 우리네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디 동네에서 봤을 법한 이야기, 자라면서 소설에서 봤든 일상이든 한번 봤을 법한 이야기다. 실제 외국에 나가보면 문화적으로 충격을 받을 때도 있지만 사는 게 다 비슷한 것은 아닐까 싶다. 마치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느낌도 든다. 다시 보면서도 참 재미있게 보았다. 처음 보신 분들의 소감이 궁금하다.

관객1: 아이가 매 맞는 장면을 보면서 공감했다. 우리는 채찍질을 맞지는 않지만 저런 감정들을 견디면서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번다. 매 맞은 아이가 매를 맞으면서도 반짝이는 은화를 보고 행복해한다. 우리에게는 돈보다 더 소중한 분노의 감정을 처리해야만 살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저 한 장면으로 돈에 대해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너무 놀라웠다. 여자로서 본 관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콩스트룹 부인이 콩스트룹을 거세하는 장면이 나온다. 혹시 남자들이 거세를 당하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는지. 거세당하는 남자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주시면 한국의 밤마다 울부짖는 부인들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좌중 웃음)
장준환: 소감 감사드린다. 처음 시작부터 펠레가 새로운 세계로 오는 건데 농장이 어떻게 보면 큰 다른 세계다. 그 농장에서 가지고 있는 권력, 남성성으로 인한 억압과 핍박이 모든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저는 난봉꾼 콩스트룹이나 콩스트룹 부인이나 모든 인물들이 나쁘게만 그려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당연히 여러 가지 차원들을 가지고 있고 그런 디테일과 사람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각, 이런 부분들이 있다. 거세에 대한 부분은 딱히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앞으로 가정이 평안하시길 바란다.
허남웅: 영화에서 가난한 스웨덴 사람들이 먹을 것과 일자리를 찾아서 덴마크로 온다. 그런데 펠레가 가지고 있는 꿈은 아메리카 정복이다. 마지막에 펠레는 아메리카로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 갔을 때 느끼는 감정은 덴마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성적으로 지배된 세계에서 여자들은 억압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도 이 영화가 잘 담고 있는 부분으로, 말씀해주신 부분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관객2:
인물들이 다들 자기 삶의 우여곡절을 갖고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캐릭터는 없었던 것 같다. 감독님께서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누구인지 알고 싶다.
장준환: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은 펠레다. 그가 이 모든 역경과 수난과 좌절 속에서 마지막에 자기 혼자서라도 떠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이 힘들 때마다 이 영화를 자꾸 생각나게 한다. 마지막에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 또 다른 세계에서 똑같은 일을 겪을지, 에릭처럼 될 것인지 그런 모든 부분을 열어놓고 영화가 끝났다. 이 결말이 영화 한 편의 완성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은 펠레는 관찰자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겪고 가슴 속에 깨달음 내지는 상처와 어우러진 또 다른 희망을 가지고 떠난다는 게, 그런 면에서 펠레가 제일 사랑스럽고 멋진 캐릭터다.

허남웅:
아무래도 이 영화는 기교보다는 캐릭터와 이야기의 힘을 가지고 2시간 40분을 끌고 간다. 감독님이 전에 기교보다는 캐릭터나 이야기를 통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장준환: 창작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겠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다양한 욕망들이 공존한다. 만들고 싶은 것과 만들게 되는 것과는 간극이 있다. 자꾸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고민하고 어떤 영화를 만들까, 어떤 즐거움을 같이 나눌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결국에는 캐릭터이고 이야기다. 그 부분으로 돌아간다. 그것 없이 어떤 스타일, 스펙터클은 많은 힘을 못 받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저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하는 거짓말을 잘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잘 할까 하는 부분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드린 말씀이다.


허남웅: 감독님이 이 영화를 대학교 하숙생 시절에 보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독님이 어떻게 영화감독이 되려는 결심을 하셨는지, 그 시절이 궁금하다.
장준환: 저는 영화광까지는 아니었지만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이긴 했다. 어렸을 때 독서실 간다고 하고 동시상영관에 갔다. 거기서 비디오 보고 영화 두 편 보고 집으로 가면 어머니가 공부 열심히 했다며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다. 그렇게 영화를 즐겨 보았다. 원래는 대학교를 그림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집안의 반대로 영문과에 진학했다. 그러다 대학교 4학년 때 우연히 영화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화에는 이런 또 다른 세계가 있구나 하는 걸 그때 깨달은 것 같다. 영화도 만들고 창작하는 일이고 그것이 굉장히 어렵고 힘들지만 충분히 재미있는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한국 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해 처음으로 필름을 만져봤다. 거기서 영화를 동료들과 재밌게 만들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화인의 길로 흘러들었다.

관객3: 창작을 하는 게 타고 나야 하는지, 아니면 많이 보고 느끼면서 그런 것을 키워나가면서 창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인지 궁금하다.
장준환: 타고난 자기 재능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고 꾸준히 열심히 해서 만드는 감독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영화는 창작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들어가 생기가 살아나는 유기체 같은 것이다. 자기 일부분을 떼어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재능이 있는 게 유리하다. 요즘에는 핸드폰이나 캠코더 등 누구나 손쉽게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대단한 영화를 만들려면 운도 있어야 하고 재능도 있어야 하고 자기 노력도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섞여서 나오는 게 아닐까 막연히 생각할 따름이다. 자기 비전이 있는 게 중요한 것 같다. 하고 싶은 게 있는 것이 재능을 떠나 그것을 계속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

정리|손소담 관객 에디터 사진|최미연 자원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