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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서울아트시네마 개관 9주년 기념 영화제

[리뷰] 시드니 루멧의 '뱀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

시드니 루멧의 <뱀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1960)는 사실 정확한 제목은 아니다. 이외에도 <기타 치는 사나이> <말론 브란도의 도망자> 등으로 소개가 됐는데 이들 제목 모두 영화의 본질을 압축했다기보다는 극중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사비에르의 특징을 가져와 제목으로 둔갑시킨 경우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Orpheus Descending>을 테네시 윌리엄스 본인이 직접 각색한 <뱀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는 당시의 미국 사회를 겨냥해 관계의 부조리를 묘사한 거대한 우화다.


기타를 애지중지 아끼는 사비에르는 뱀가죽 재킷을 입고 다녀 ‘스네이크 스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뉴올리언스에서 악사생활을 하던 중 예기치 않은 소동에 휩싸여 새로운 도시로 떠나던 중 이름 모를 작은 마을에 기거하게 된다. 마을 주민의 도움으로 옷가게 점원 일자리를 얻게 돼지만 그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오래 전 병들어 누운 남편의 감시 속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토렌스 부인(안나 마냐니)은 사비에르의 처지에 호감을 느낀다. 아니 그를 위안의 안식처로 삼으려 한다. 그러자 남편의 의심의 눈초리가 점점 이들을 조여오기 시작한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은 대개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속한 환경과 시대에 굴절된 양상을 보인다. <뱀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 역시 마찬가지다. 사비에르와 토렌스 부인의 사랑이 극의 중심을 차지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사비에르는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마을의 기득권 세력, 즉 백인 남자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그와 가깝게 지내는 토렌스 부인을 방해하기 위한 남편은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세를 규합하려 든다.



반목하는 집단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시드니 루멧은 인물의 설정과 공간의 활용 등을 통해 은근한 방식으로 이를 시각화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시각적 콘셉트는 ‘고립’과 ‘분할’이라 할만하다. 고립의 측면에서 사비에르와 토렌스 부인은 확실히 옷가지에서부터 남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사비에르의 뱀가죽 잠바는 일상복 일색인 마을에서 어딜 가나 튀기 마련이고 검은 옷으로 일관하는 토렌스 부인의 경우, 마치 상복을 입은 듯 매사가 침울하고 음산하다. 그러다보니 공간 역시도 철저히 분할된 형태를 보인다. (그것은 희곡이 원작이기에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매장을 가운데 두고 사비에르와 토렌스 부인은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매장의 사각지대에서 몰래 사랑을 나누고, 철창 패턴으로 이뤄진 이층의 방에서 토렌스 부인의 남편이 기거하는 식이다.

기득권은 기득권끼리, 소외된 이들은 소외된 이들끼리 그들만의 공간을 점유하지만 결국 공간의 싸움에서 사비에르는 그 자신이 이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백인의 룰을 따르지 않을 경우, 이방인인 사비에르가 차지할 자리 따위는 없다. (그가 왜 뉴올리언스에서 쫓겨났는지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이런 경험이 처음일 토렌스 부인에게 몸을 사리는 사비에르의 입장은 이해 불가능한 처사로 비친다. 여기서 시드니 루멧의 혜안이 돋보이는 이유는 토렌스 부인 역에 미국인이 아닌 이탈리아 배우 안나 마냐니를 과감히 캐스팅한 까닭이다. 외부인이면서 (극중 그녀의 영어 연기는 그녀가 미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늘 남편의 감시에 있었던 탓에 집 바깥에서 벌어지는 소동의 메커니즘을 알 수 없는 그녀는 결국 사비에르를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다.

영화가 발표된 시기를 감안하면 <뱀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를 빨갱이 사냥에 대한 은유로 읽는 것도 가능하지만 사실 이와 같은 내용은 시드니 루멧의 영화에서 일관되게 목격되는 주제의식이라 할만하다. 그런 점에서 시드니 루멧이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을 영화화한 이유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루멧의 영화적 제재는 늘 거대한 시스템에 편입하지 못하는 이들의 비극이었다. <뱀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를 시드니 루멧의 최고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영화적 특징을 드러내는 단적인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