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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 talk

"불가능한 현실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기적"

[시네토크] 영화평론가 정성일 감독이 추천한 에릭 로메르의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어느덧 2주차에 접어들었다. 지난 25일은 에릭 로메르의 영화 세 편을 상영했던, 일명 '로메르 데이'였다. 마지막 회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가 상영 후에는 이 영화를 추천했던 정성일 영화평론가 겸 감독과 함께하는 시네토크도 이어졌다. 정성일 감독은 로메르의 영화세계 전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매우 긴 시간동안 열성적이고 유쾌하게 들려주었다. 객석을 가득 매운 관객들은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끝까지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정성일(영화감독/영화평론가): 올해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6년째 개근이다. 올해에도 백지수표가 도착해서 매우 기뻤고 어떤 영화를 써 넣을까 생각했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 편 중 하나이며, 이 영화가 로메르 영화의 정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로메르 영화세계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보고, 더불어 이 영화에 대한 짧은 생각을 말씀드리려 한다.

로메르는 1920년 4월 4일 생이다. 영화가 아직 무성영화에 머물러 있던 시절, 장편영화가 막 시작했던 시절에 태어났단 뜻이다. 다른 누벨바그 동료들은 모두 토키영화가 시작된 후에 시작했다. 로메르 영화를 보면서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의 영화와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로메르가 그들과 아주 다른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며, 영화를 경유하여 세상의 리듬을 느끼는 방식에 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로메르는 2차 대전 당시, 다른 누벨바그 세대 감독들처럼 어린 아이로서 보낸 게 아니다. 10대에서 20대를 통과하는 나이에 전쟁을 겪었고, 자의식을 갖고 고스란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20살에 게슈타포에게 잡혀가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형을 고발하라는 위협을 받기도 했다. 로메르는 이때,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의 변화에 관여하지 않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왔다고 한다. 로메르는 1948년에 '영화, 공간의 예술'이라는 글을 썼다. 이처럼 로메르는 공간을 통해 영화에 다가갔던 사람이다. 여기서 로메르는 영화 공간에 두 개의 가능성이 앞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오슨 웰즈의 딥 포커스의 공간, 또 하나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갔던 로셀리니의 공간이다. 로메르는 두 개의 공간을 다 활용하고 싶어 했다. 도덕이야기, 희극과 격언, 사계절 이야기 같은 영화들은 로셀리니의 길을 따르며, 70년대 만들어진 시대극들은 웰스의 전통을 따른다. 또한 그는 파울로 우첼로나 엘 그레코 등, 화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 1960년대 후반에 네스토르 알멘드로스라는 촬영기사를 만나면서 그와 함께 인상주의 화가들이 해냈었던 것과 같이 영화작업을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로메르를 이끌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독일적인 문화였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작가정책'은 영화에서 스타일의 혁신을 이야기했다. 로메르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로메르는 영화는 스타일이 아니라 테마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고전주의자였던 셈이다. 로메르는 사물을 거기에 배치했을 때, 그것이 주는 가짜스러움을 끔찍하게 혐오했다. 일례로 트뤼포의 영화에서 나오는 눈은 다 가짜 눈이었던데 반해, 로메르의 영화에서는 가짜 눈이 내린 적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 로메르는 그 지역을 찍기 3년 전부터 일기예보를 계속 체크했다고 한다. 로메르는 좋은 영화는 어떻게 스타일을 혁신해서 새로운 영화를 만드느냐가 아니라, 테마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나온다고 말했다.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테마와 주제를 연결시킬 때, 그에게 핵심은 도덕이라는 문제였다. 자기 영화에서 끌어안아야만 하는 것은 도덕이었다. 반대로 고다르에게 영화는 스타일이고, 스타일이 모든 것이었다. 고다르가 정치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무정부주의자였던 이유다. 모든 것에 대한 와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자기의 세계관과 영화를 분리했을 때, 대부분 그 영화는 사기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직 영화를 만들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라고 밀어붙였을 때, 로메르에게는 결국 도덕이라는 문제로 귀결된 것처럼, 또한 고다르가 무정부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감독이라면 자기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 원칙이 되는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믿는다.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로메르의 영화를 물으면, 목록이 겹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신기한 것은 로메르의 경우, 상대방이 어떤 영화를 이야기했을 때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으며, 그 사람이 어떤 영화의 취향과 미감을 가진 사람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사실상 로메르 영화의 테마는 간단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이 두 가지의 끝없는 변주이고 반복이다. 차이는 단지 영화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계절에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만나느냐의 문제다. 이 말의 방점은 '만남'에 있다. 이 만남을 어떤 방식으로 조직하느냐에 따라 많은 변주가 발생한다.

로메르의 많은 영화는 현대를 무대로 해서, 모던한 세계에서의 일상생활을 담는다. 모던한 소도구들, 건축물들, 모던한 구조 안에 둘러싸인 세계. 로메르는 실내에 들어가서조차도 망원렌즈를 쓰면서 인물과 배경을 갖다 붙이는 방식으로 밀어붙여 공간의 깊이를 없애고 몽드리앙의 그림처럼 선으로 이뤄진 세계로 화면을 쪼개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인물을 쪼개나가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이를테면 가상선을 그어 인물의 이쪽과 저쪽을 자르고 붙이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그 때 로메르는 창문을 걸어 찍으며, 이쪽과 저쪽을 연결시킨다. 로메르가 일상생활을 찍어나가는 방법에서 또한 흥미로운 점은, 핸드 헬드 카메라에 대한 여타 누벨바그 감독들과 다른 방식의 활용이다. 이는 인류학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장 루슈의 '시네마 베리떼'의 방법론과 유사하다. 루슈가 다큐멘터리에서 한 방법을 로메르는 극영화에서 한 것이다. 로메르가 확보하려 한 것은 카메라의 존재론적인 객관적 인칭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대상에 대해 탐구하는 방식으로서의 카메라를 취하는 것이었다.

로메르 영화의 이야기가 고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문제가 발생할 때, 기적이라는 것이 슬쩍 개입되면서 문제가 갑자기 해결된다. 로메르의 영화에는 기적에 대한 기대가 있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에서도 '~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문제는 늘 갑자기 해결된다. 이 기적을 즐기면서 세상이란 얼마나 신비로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의 기적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배움은 아마도 칼 드레이어에게서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데트>에서. 또한 로메르에게는 파스칼 적인 측면이 있다. "인간학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내기를 해야 하는가?" 로메르는 그 내기에 영화가 개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인간학, 그리고 탐구로부터, 기적 같은 내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 발생한다. 로메르가 그것을 유머로 긍정으로 비전으로 열어놓는 방식을 택했다면, 반대로 염세와 추락의 방식을 택했던 내기꾼이 있으니 이는 키에슬로프스키다. 의외로 이 두 사람이 편집하는 방법에 있어 상당 부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로메르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마치 그 수많은 영화들이 동시에 만들어진 것처럼 시기와 순서를 무시하곤 한다. 이는 로메르는 영화를 만들면서 자기 스타일을 발전시키거나 형식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신 결정의 선택권을 누구에게 주느냐를 놓고 영화의 네트워크를 이어나갔다. 관객은 게임의 규칙을 아는 순간 이야기가 아닌 프로세스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대해 흥미를 잃게 만들어야만 영화를 제대로 본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 네트워크를 어떻게 교란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밀고나간다. 로메르 영화에서 깜짝 놀라는 순간은, 이야기를 좇아가면서 이 이야기의 구조로는 절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갑자기 가능해지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게 기적 같은 것이다. 불가능한 현실이라는 네트워크를,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가능한 현실로 변경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19세기 탐정소설에서 가져온 서사문제의 해결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로메르의 영화중 가장 단순한 영화다. 그리고 말이 많다. 이 영화를 이야기 할 때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은가?'라는 질문이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영화가 시작하면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이게 조건법과 종속절을 설명하고, 그 이후의 영화는 모두 조건법, 종속절로 진행이 된다. 사실상 이 영화는 '말'을 찍었다. 존재하는 나무와 존재하지 않는 메디아테크.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나무와 현재에서 미래로 만들어질 준비를 했던 미디어테크 사이의 대립이, 말을 사이에 놓고 진행되고 있다. 즉 진행 중에 놓인 시제에 대해, 말을 가지고 영화를 진행하고 있다. 영화가 공간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시제를 담기 위해 택한 것은 결국 '말'이다. 영화에서 대사가 미장센의 경지에 오르며 시네마틱한 것으로 활용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말의 미장센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를 놀라게 만든 것은 스트라브와 위예의 방식이다. 로메르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말의 미장센'을 보여주었다. 가장 아름답게. 나는 이 영화가 로메르의 이례적인 영화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로메르의 영화 미학의 어떤 극단까지 밀어붙인 영화라고 믿는다.

(정리: 박영석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