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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한 겨울의 클래식

운명론적이며 사실주의적으로 구축된 비관적 세계- 줄스 다신의 <리피피>




도시 범죄영화와 필름 누아르가 번영했던 1940년대 중반 이후의 미국 영화계에서, 줄스 다신은 그 장르를 대표하는 몇 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1950년대가 되자, 다신은 메카시 광풍에 휘말려 유럽으로 건너오게 되고, 프랑스에서 도시 범죄영화의 걸작 <리피피>(1955)를 만든다. 동시대의 어떤 영화보다도 파리라는 도시 공간과 그곳의 어두운 면을 잘 담아낸 영화였다. 감옥에서 막 출소한 주인공 토니 스페파노(장 세르베)는 다소 피로하고 무기력해 보이며, 친구의 범행 제의도 단번에 거절한다. 그러나 그는 곧 변심하여 동료들을 모아 더욱 큰 규모의 범행을 계획하게 되는데, 그 심리적 동기를 부여한 것은 옛 애인인 마도(마리 사보레)와 그녀의 새로운 정부인 갱단의 리더 루이(피에르 그라쎄)의 존재다.


<리피피>는 마치 비극의 구성처럼, 3막의 내적 구성을 취한다. 그 중간이자 변경점인 보석절도 시퀀스를 중심으로, 이 이전과 이후의 영화의 스타일과 템포가 확연이 달라진다. 즉, 이 시퀀스 이전에 토니를 중심으로 벌이는 범행의 준비과정은 느리고 무감각하게 진행되는데 반해, 이후에 벌어지는 다른 범죄 집단(루이의 패거리)과의 결투는 보다 빠르고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28분에 이르는 보석 절도 시퀀스는 어떠한 대사와 음악도 없이 그들의 행위와 그들이 발생시키는 소음만으로 이뤄진다. 절도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와 진동을 내지 않기 위한 싸움이며, 이것은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절도의 과정은 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매우 육체적인 작업이다. 영화는 이 과정을 매우 긴 시간동안 물리적으로 보여주면서, 범죄 행위에 대한 사실적인 체험의 느낌을 제공한다. 범죄 영화의 역사에서도 독보적으로 빛나는 이 시퀀스의 영향력은 프랑스 범죄 영화의 또 하나의 걸작인 장 피에르 멜빌의 <암흑가의 세 사람>(1970)에서 드러난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토니와 그의 동료들과 루이의 패거리 간에 다툼이 벌어진다. 완벽한 것처럼 보였던 범죄행위는 일순간에 발각되어 무너져 내리는데, 이는 이태리인 금고털이 전문가 세자르(줄스 다신)가 클럽 여가수를 유혹하기 위해 준 선물인 반지 때문이다. 이 여가수와 토니의 옛 애인인 마도는 극적 비중이 별로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는 필름 누아르적 팜므 파탈이 갖는 치명성의 변주라 할 것이다. 토니와 루이 패거리들의 죽음은, 그 절멸은 마치 숙명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와 함께, 느릿느릿하게 진행되던 영화의 서사는 후반부로 갈수록 단속적이고 급진적으로 변하는 몽타주를 통해 점점 빠르게 진행된다. 마치 그들이 이 숙명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멈출 수 없음을 드러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토니는 죽어가는 몸으로 친구의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마지막 질주를 한다. 토니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의 풍경은 정신없이 뒤흔들리고 일그러진다. 토니의 이 마지막 시선에 담긴 이미지는, 그리고 <리피피> 전체에 담긴 운명론적이며 실존주의적인 어두움은, 메카시 광풍에 휘말린 줄스 다신이 바라본 그 당시 현실세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박영석: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