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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탄생 100주년 : 조르조 바사니와 영화

‘부와 셀레브리티’라는 신기루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복된 사람들>(1953)

‘부와 셀레브리티’라는 신기루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복된 사람들>(1953)



<정복된 사람들>은 실제 사건에서 시작한다. 영화의 도입부, 마치 서곡처럼 제시되는 사회면 기사들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정복된 사람들>엔 파리, 로마, 런던에서 벌어졌던 세 개의 사건이 연결돼 있다. 사건의 공통점은 전후 신세대의 ‘이해되지 않는’ 살인 행위다. 그 행위들은 당대에도 충격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반향을 불러올 정도로 계시적이다. 영화가 발표될 때, 사건의 관련자들이 생존해 있는 까닭에, 또 내용의 ‘불온성’ 때문에 영화는 심각하게 훼손됐는데, 최근에야 겨우 복원돼 원래의 모습을 대부분 되찾았다.

파리 에피소드는 10대 고교생들이 주인공이다. 다들 중산층 자식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열심히 일하는 부모들과 달리, 조그만 가게 안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서 돈을 벌어 마음대로 살 것이다. 그건 노동을 해서 얻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은 이미 돈을 제법 모았고, 답답한 파리와 간섭하는 부모를 떠나 곧 알제리로 가서 사업을 벌일 것이라고 떠벌린다(일정 기간 알제리라는 단어는 캐나다 또는 파나마로 바뀌었다). 그는 또래들 가운데 인기 경쟁의 대상인 소녀의 마음도 곧 훔칠 것 같다. 다른 10대들은 그의 돈과 여학생에 대한 질투 때문에 범죄를 공모한다(공모에 가담한 소녀의 부모가 미성년자 보호 등의 이유로 소송을 건 까닭에 영화는 프랑스에서는 1963년에야 상영된다).



‘부와 셀레브리티’에 포로가 된 당대 신세대의 모습을 바라보는 안토니오니의 카메라는 훗날 거장이 될 그의 영화적 태도를 충분히 예견하게 한다. 카메라는 사건의 행위를 좇기보다는 인물들의 내면을 바라보기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을 바라보려는 카메라는 10대들의 디테일한 행동들을 더욱 주목한다. 사람을 이해하려는 안토니오니 특유의 롱테이크는 초창기 때부터 그의 주요한 영화적 표현법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로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대학 초년생이다. 역시 중산층 아들이다. 그런데 ‘돈이 필요해서’ 담배 밀매조직에 끼어든다. 새벽에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도주 중에 당황한 나머지 퇴근하던 공사판 일꾼을 실수로 쏴 죽인다. 이 청년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로마 시내를 도망 다니는 게 이야기의 전부다. 로마 에피소드의 또 다른 미덕은 도시에 대한 안토니오니의 표현법일 테다. 부자로 살고 싶은 열망은 공사 중이고, 개발 중인 도시의 메마른 풍경으로 은유돼 있다. 걸작 <일식>(1962)의 ‘사막 같은’ 로마는 이미 여기서 단초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가장 계시적인 이야기는 런던 에피소드다. 시인을 자처하는 무직자 젊은이가 주인공이다. 역시 중산층 자식인데, 노동을 무시하는 건 다른 인물들과 같다. 어서 유명해져 부자가 되고 싶은 그가 계획한 건 신문의 1면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는 어이없게도 ‘완전 범죄’의 주인공을 꿈꾼다. 그는 인적이 드문 공원에서 ‘시체’를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이야기를 만든다. 언론은 ‘이상한’ 청년의 이야기를 기사화하고, 독자들은 자극적인 내용에 반응한다. 반세기 전이 아니라 요즘도 매일 목격할 수 있는 일들인 것이다. 도시 속의 황량한 공원에 대한 묘사와 의문의 살인 사건은 안토니오니의 또 다른 대표작 <욕망 Blow-Up>(1966)을 떠오르게 한다. <욕망>처럼 <정복된 사람들>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행위, 곧 살인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채 차갑게 소비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안토니오니의 비관주의적인 시각일 테다.

한창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