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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아카이브 특별전 : 현대 영화의 모험

예술에 대한 질문, 또는 도전 -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예술에 대한 질문, 또는 도전

-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는 검은 바탕에 파란색과 빨간색의 알파벳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후, 파리의 부르주아가 여가를 즐기는 모습을 짧게 스케치한다. 여성은 테니스를 치고 남성은 서점에서 책을 산다. 타이틀에서부터 이어지는 음성은 페르디낭이 욕조에 앉아 벨라스케즈에 관한 구절을 낭송하는 소리이고 이 영화는 소리와 이미지가 주고받는 대화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페르디낭의 일방적인 낭독은 내용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린 딸, 대화가 불가능한 세상에 속한 아내, 서로 사랑한다고 믿는 마리안느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페르디낭의 혼잣말에 가까운 낭독과 여행지에서 일기를 기록한 노트는 부르주아적인 삶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아내와 결별하고 삶의 순간에 충실하고 싶은 마리안느와의 여행으로 이어질 동안 번번이 어긋나고 미끄러진다. 멍청한 부르주아들이 모인 파티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남편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소개해 준다는 아내, 귀여운 딸로 구성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 <미치광이 피에로>는 고다르 자신과 영화의 인물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아예 정해놓지 않고 있다. 페르디낭과 마리안느는 탐욕적인 도시 파리를 떠나서 햇살이 좋은 니스라는 최후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만 열어놓은 채 즉흥적인 여정을 시작한다. 그들이 권태와 사랑, 충돌과 해프닝의 길에 들어선 순간 살인, 도둑질, 방화, 복수와 죽음이 펼쳐놓는 누아르의 통속적인 관습들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고다르가 느슨하게 채워넣은 것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드러내는 두 목소리의 겹침과 어긋남, 삶에 대해 다른 태도를 지닌 두 사람의 평행선적인 관계가 파국에 이르는 사소한 과정이다. 그들은 함께 있음과 홀로 남음을 겪으면서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이 위대한 영화에 접근하는 무수한 길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영화의 인물들이 인용하는 조지프 콘래드, JFK, 벨라스케즈, 발자크에서 시작한 인명의 흐름에 따라 현대적 삶의 양상과 역사적 사건, 인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사고할 수도 있다. 방송국, 스탠더드 오일, 스캉달 거들, 알파 로메오 자동차와 데오드란트, 헤어 제품으로 대표되는 광고와 소비에 함몰된 현대의 변화된 풍속을 따라가면서 소비 중심의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도 있다. 직접적으로 영화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무엘 풀러의 영화에 대한 태도와 촬영감독 라즐로 코박스가 정치 망명자로 생활하는 모습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를 추적하려는 지독한 열성분자 고다르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고다르가 ‘황혼의 시인’이라고 명명했던 풀러가 정의하는 영화의 본질인 전쟁은 이 영화에서 폭력, 살인, 사랑과 죽음, 고립, 황폐함과 헛된 꿈, 깊고 단 잠에의 열망, 권태와 허무를 관통하는 시간과의 싸움, 나태함과 생존의 불균질한 기록으로 채워지고 무수한 감정의 조각들은 페르디낭과 마리안느를 결합/해체시킨다. 고다르는 한편으로 풀러를 따라 영화를 지탱하고 끌어가는 방향을 따르다가 다른 편에서는 이 영화의 곁길에서 생성되는 장르 영화의 장면들을 부단히 삽입시키다가 느닷없이 건너뛰어 버리기도 한다. 아프리카 콩고와 앙골라에서 밀수를 하는 마리안느의 오빠를 통해 조지프 콘래드가 증기선과 총으로 무장한 채 콩고를 따라가면서 느낀 19세기 말 제국주의가 표방한 자선과 문명화의 맹점이 현대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있는지 찾을 수도 있다. 미국의 오만한 자경의식이 배태한 베트남 전쟁은 탐욕으로 얼룩진 제국주의의 일면이며, 페르디낭을 고문하는 장면을 통해 알제리인에게 가해진 탄압과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감지할 수 있다. 예술과 시, 영화와 철학, 예술가와 작가들로 이어지는 小예술사와 같은 시각을 따라 피카소의 입체와 해체, 샤갈의 꿈결, 르누아르의 관능적 아름다움, 모딜리아니의 비극적인 삶과 모델의 관계, 마티스가 매료된 아프리카와 남불의 강렬한 빛,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복제와 창조를 연결하는 방식, 발자크와 콘래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챈들러의 소설과 T.S. 엘리어트, 브라우닝의 시가 제공하는 예술적 자산에 탐닉하는 것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영화가 어떠한 형태의 예술이 되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노정을 떠올릴 수도 있다. 스튜디오의 시스템에 매여 있더라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할리우드 장르의 감흥을 표출하는 장면에서 시네필 고다르의 영화에 대한 사랑과 만날 수도 있다.



그중에서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이 복잡하고 모순된 세상과 그 세상을 재현하는 ‘영화’를 돌파하는 고다르의 제안이다. 50세가 넘어서는 구체적인 사물을 그리지 않고 그를 둘러싼 대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로 눈을 돌린 벨라스케즈의 에피소드와 1955년에 자살한 니콜라스 드 스탈의 회화를 경유해 고다르의 길을 열어간다. 나는 이 영화의 풍부한 시각적 인용과 넘쳐나는 이미지들에 취하면서도 ‘영화’와 사랑, 비극에 이르는 소용돌이로 걸어 들어가는 고다르의 태도에 감동받는다. 예를 들어 빨강과 파랑으로 채워진 미장센과 그림들의 배치를 통해 영화에서 이미지가 존재하는 위치를 감지할 수 있다. 부르주아처럼 살았지만 자신의 환경을 견디지 못했던 벨라스케즈의 기이한 세계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필치와 세부에 대한 세밀한 빛으로 재현되었다. 고다르는 벨라스케즈가 목격했을 광대, 난쟁이, 똑같은 옷을 입은 범죄자, 망명 중인 늙은 공주, 노래에 미쳐버린 광인 등 뒤틀어지고 일그러진 인간의 조건을 영화 속으로 옮겨놓는다. 또 벨라스케즈의 짐을 지고 세상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페르디낭의 여정이 스탈의 육체적 이동 경로와 겹치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고요한 질서를 추구하던 벨라스케즈의 노년기처럼 이 영화는 재현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면서 의심과 회의, 주저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고다르는 기록과 표현이라는 영화의 길과 20세기 초에 발생한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획기적인 전환을 유사한 궤도에 놓아두고 있다. 리얼리티를 믿거나 이미지를 믿을 수밖에 없는 카메라는 구상적인 현실의 세밀한 기록과 매체를 추상화시키는 능력 중 어느 한 편에 조금 더 가까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실내의 벽을 채운 추상화와 이미지 자체로 관객에게 제시되는 여러 그림들, 스탈이 즐겨 사용하던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비, 잿빛 도시와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바닷가와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색감, 강렬한 빛과 원색의 사용을 통해 영화의 공간 자체를 추상화시키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전후 프랑스에서 가장 독창적인 추상화를 그렸던 스탈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고다르의 경외와 애도의 길이 벨라스케즈의 정신적 여정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러시아에서 출생한 스탈이 혁명을 피해 폴란드와 파리를 거쳐 앙티브에 정착하기까지 그의 회화는 점점 간략한 색면과 선의 배치로 변해간다. 불안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그릴 그림이 없다고 인식한 순간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영화의 두 인물이 자주 내려다보던 코트다쥐르의 청명한 바다와 하늘은 스탈이 사라진 후, 공허하게 남아 있는 자연과 사물로 변하게 된다.



이 영화는 예술을 생산하거나 인식하는 다양한 방법론을 소개하고 전시한다. 고다르는 허구와 꿈, 삶과 사실, 막연함 감각과 구체적인 감정의 대립, 정신적인 길과 육체적인 길, 영화가 제공한 아름다움과 도취의 순간, 사랑과 배신, 느와르와 뮤지컬, 연기와 공연을 통한 두 배우의 위치 변화, 삶과 나태함, 관능과 권태, 춤과 책, 음악과 글, 손금과 다리 등 충돌하는 대립항을 통해 영화에 이르는 다양한 곁길을 보여준다. 분석적이고 추상적인 낭독과 무절제하고 충동적인 이미지가 서로에게 이끌리거나 밀쳐내는 역학은 죽음과 소멸에 이르는 마지막 신에서 절정에 이른다. 죽고 싶다는 충동과 죽지 않으려는 손짓 사이에서 페르디낭이 폭발한다. 숭고함과 천박함, 세속과 성스러움, 남자와 여자, 허구와 기록, 공포와 두려움, 발견과 기쁨, 쾌락과 관조, 추상과 자연, 사랑과 죽음은 저렇게 우스꽝스럽게 소멸한다. 그게 <미치광이 피에로>가 자신을 드러내는 태도이자 세상에 대한 진지한 충고와 고다르의 사소하지만 솔직한 애도, 인물들의 경쾌한 발걸음과 기다림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길이란 생각이 든다.


박인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