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별전/한국영화 특별전 - 일하는 여성들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괄호 밖으로 -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괄호 밖으로

-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



나이가 들수록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오히려 의문이 쌓여갈 뿐인 질문이 하나 있다.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는 ‘노동’, 그리고 그 노동을 행하는 ‘노동자’는 왜 갈수록 존중받기는커녕 오히려 ‘만만한’ 대상이 되어 가는가? 어째서 ‘노동자’라는 세 글자 자체가 일종의 기피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가? 영화 및 소설 <파이트 클럽>의 대사를 빌자면, 노동자는 “사람들이 삶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요리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고, 전화를 연결하며, 앰뷸런스를 운전하고, 잘 때 경비를 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 혹은 사회의 모습을 기술하는 데 있어 노동자의 존재와 삶, 그리고 그 사회를 만들어온 ‘노동’은 언제나 부가적으로 기술되거나 괄호 안으로 쫓겨나곤 한다.


그런데, 노동자 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는 다시 열외로 취급된다. 여성들이 주로 종사하는 경공업이나 서비스업은 손쉽게 가시적인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며, 이 영역들의 돌봄노동과 유지노동은 종종 노동이 아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으로까지 치부된다. 심지어 노동자를 다루는 관점에서 기록되는 기록물에서도 여성 노동자의 삶은 다시 부가적인 것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이는 노동자의 투쟁사를 그리는 데에서도 다르지 않다. <위로공단>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동일방직 노조 똥물 투척 사건이나, 전태일과 함께 10.26의 도화선이 됐다고 평가받는 YH 사건 및 김경숙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근대 이후 노동운동 초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고 투쟁의 기록이라지만, 한국의 노동운동사는 언제나 ‘철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기술되면서 위의 사건들을 본격적인 서술을 열기 위한 ‘서문’ 정도로나 취급한다.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기록한 책과 영화들의 양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적지 않은 기록들이 자리하는 곳이 종종 괄호 안이라는 게 문제다. 기록을 읽고 기억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조차도, 어쩌면 노동자를 향한, 또한 여성을 향한 이중의 억압의 시선을 스스로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위로공단>이 드러내고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렇게, 70년대 이후 지금까지 기록은 돼 왔으되 언제나 괄호 안으로 묶여 있던, ‘정사’가 되지 못하고 미시사의 한 구석을 차지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삶, 그리고 투쟁의 역사다. 영화는 다양한 직군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카메라 앞으로 불러와 그들의 이야기를 청한다. 영화 속 노동자들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기억을, 혹은 삶을 화면에 풀어놓는다. 이것은 일종의 ‘증언’이다. 제대로 청자를 가지지 못했고, 이름이 지워지는 것 역시 당연하게 당해온 이들이다. 그러나 카메라가 그들을 향해 말을 걸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때, 그들은 더 이상 ‘이름 없는 무명인’이 아니라 ‘증인’이 된다. 역사 위를 걷는 ‘노동자’, 더욱이 ‘싸우는 노동자’가 되어 그 자신의 이름과 함께 기록된다. 카메라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꺼이 가까운 곳에서 듣고 기록한다. 그리고 관객들 또한 청자로 끌어들인다. 이들의 목소리의 톤과 스며들어 있는 물기, 그리고 얼굴에 스쳐가는 감정과 이를 드러내는 표정들은, 영화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쉬이 잊기 힘들다. 영화는 이러한 인터뷰 장면들 사이로 ‘연출된’ 장면들, 그러니까 주로 눈을 가리고 길을 걷거나 서로를 부둥켜안은 여성들의 몽타주를 함께 삽입한다. 감독은 이 장면들이 영화에도 나오는,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이 눈만 보이는 방역복을 입고 작업하는 장면과 연결된다”고 말한다. 또한 이 장면들은 눈이 있으되 보는 것을, 입이 있으되 말하는 것을 억압당해온 이들의 처지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증언’과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건 단지 영화가 인터뷰를 청한 개인의 삶만이 아니다. 이들의 증언은 다시 근대 이후 한국의 경제와 노동의 형태가 어떤 과정을 거쳐 변천을 거듭했는가를 여성 노동의 관점에서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소위 경제 성장과 근대화, OECD 가입, 선진국 대열 합류, 이후 신자유주의의 도래, 그리고 노동 이주와 해외 공장 운영의 시대까지, 근대 이후 격변의 시대를 따라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의 형태가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변화한 것이 있다면, 여성들이 주로 종사한 업종이 대체로 섬유, 봉제 산업과 가발 산업 등에서 제조업을 거쳐 서비스 노동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변하지 않는 것들은, 여성 노동자를 향한 억압과 착취, 그리고 비인간적인 대우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더욱 경악할 만한 것은, 이제 해외에 공장을 세우고 그곳의 여성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 70년대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을 대하던 그 야만적인 방식도 고스란히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화학 공업으로 산업이 재편되기 전 섬유, 봉제 산업과 가발 산업에서 ‘수출역군’으로 일하던 소위 ‘공순이’들은 이후 소위 남성 노동자들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던 제철과 정비, 반도체 산업으로 노동의 영역을 넓힌다. 이 중에서도 다시 여성들이 일하는 분야는 ‘여성의 영역’이 된다. 그런가 하면 감정노동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 산업의 큰 축을 차지한다. “70년대에 공순이가 있었다면 지금은 ‘콜순이’가 있는 거죠.” 노동의 전문성과 고귀함은 부정된 채, 말투, 미세한 뉘앙스, 제스처 하나하나까지도 통제와 억압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옷과 화장까지도. 그러나 장시간 교대 없는 중노동, 혹은 친절을 넘어서 굴종을 요구하는 감정과 정신의 중노동은 중노동으로 인지되지 못한다. 더욱이 이 가부장제가 기반이 된 사회에서 일터 역시 ‘여성’이라는 젠더를 착취한다.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성희롱과 성폭력, 혹은 일상적인 인격 모독의 위협이 더욱 증가한다.


그러나 영화 속 ‘증언자’들이 그들 스스로 드러내는 삶은 그저 굴욕과 비참을 견디는 삶이 아니다. 싸우고 투쟁하는 삶이다. 이름을 걸고 얼굴을 드러내고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의 삶을 증언하는 것까지도 싸움이다. 그의 대가가 몸의 병, 감옥살이, 가난으로 돌아왔고, 그들의 증언은 종종 물기나 깊은 한숨을 동반한다. 그러나 좋은 다큐멘터리들은 언제나, 우리가 활자로, 기사로 접했던 글자 너머의 추상적인 역사적 기록들을, 육성의 증언을 통해 피와 살을 가진 사람 하나하나가 만들고 해온 생생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위로공단> 역시 마찬가지다. 그나마 지금 우리의 삶이 70년대보다는 나아졌다면, 그 역시 이들이 삶을 바쳐 싸운 결과물이다. 그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나아지지 않은, 오히려 더 나빠진 구석들이 많다. 우리의 노동이 그에 걸맞는 ‘존중’은커녕 여전히 ‘위로’조차 받지 못하는 세상이다. 더 싸움이 필요한 세상이다.


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