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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시네마테크 포르투갈 특별전

[시네마테크 포르투갈 특별전]올리베이라의 영화적 이상, <비단 구두>

[시네마테크 포르투갈 특별전]





올리베이라의 영화적 이상, <비단 구두>

<비단 구두 Le Soulier de Satin>(1985)는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오랜 영화 경력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영화이다. 1970년대부터 이어진 ‘좌절된 사랑’ 4부작을 완성한 올리베이라는 <비단 구두>를 통해 전작들의 세계관과 연극적 영화 스타일을 끝까지 밀어붙여 하나의 미학적 기념비를 남긴다.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풍부한 영화적·주제적 요소들은 이후 그의 영화들이 외연적 확장을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된다. 영화의 원작인 폴 클로델의 희곡 『비단 구두』(1929)는 작가의 세계관을 응축한 대작이다. 스페인의 제국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40여 년의 시간을 배경으로 수많은 캐릭터들과 장소들이 등장하고 종교, 사랑, 역사 등 다양한 테마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연극으로 상연할 경우 11시간을 넘을 정도로 방대하며, 현실과 초월적 세계를 무질서하게 오가는 구성의 복잡성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올리베이라는 프랑스어로 쓰인 희곡 전체를 충실하게 영화화하고 싶었는데 러닝타임의 제약 때문에 원작의 내용을 상당 부분 축소하여 6시간 40분 분량의 영화로 완성했다고 한다. 그 결과 원작에 존재하던 ‘4개의 날’이라는 막 구분을 없애고 3부작의 영화로 구성했으며, 올리베이라가 창작한 4개의 씬을 추가했다. 결과적으로 <비단 구두>는 비극적 사랑이라는 멜로드라마적 주제, 가톨릭적 세계관, 제국주의 역사, 연극과 영화 사이의 매체적 사유를 아우르면서 올리베이라의 작품세계 전반을 포괄하는 거대하고 다층적인 작품이 되었다.


제국주의 역사 속에서 좌절된 사랑


<비단 구두>는 돈 로드리고(루이스 미겔 친트라)와 도냐 프루에즈(파트리시아 바르직) 사이의 좌절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로드리고는 스페인 제국주의 확장의 흐름 속에서 전 세계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이상을 갖고 있다. 로드리고와 프루에즈는 운명적 사랑에 빠지고, 프루에즈는 아프리카 총독인 남편을 피해 로드리고를 만나러 가려고 한다. 이때 프루에즈는 성모상에 자신의 비단 구두를 바치면서, 자신이 당신을 거역하는 행동을 할 것이지만 악을 향해 나설 때면 제 발이 절름발이가 되게 해달라고 빈다. 이후 프루에즈와 로드리고의 만남은 번번이 좌절되며 그들은 역사의 격랑에 휩쓸린다. 로드리고는 이후 바다를 방랑하는 신세가 되며 종국에는 노예로 팔려가게 되지만, 프루에즈의 딸 세테페가 잘 살아가는 것을 보고 환희의 종을 울린다.


<비단 구두>에는 영화를 다 보고도 세부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러티브의 공백이 많다. 이는 클로델의 원작을 축소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이와 같은 내러티브 구성은 올리베이라 영화세계 전반을 특징짓는 것이기도 하다. 어떠한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그 과정이 생략된 채 결과만 나열되며, 이 결과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오로지 대화만으로 그 주변 정황을 파악하게끔 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난해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남녀의 불가능한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주변 세계로 뻗어나가는 외연적 확장의 폭이 매우 크며 또한 그것들이 무질서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테마는 분명히 모든 극적 사건의 시발점이자 중심축이지만 실상 내러티브 상에서 매우 모호한 비중을 차지한다. 영화 속에는 로드리고와 프루에즈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생략되어 있으며, 로드리고와 프루에즈가 만나는 장면도, 서로의 사랑을 언급하는 일도 거의 없다. 즉 이들의 사랑은 로드리고와 프루에즈라는 두 인물의 만남과 사랑의 행위 등으로 구체적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들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담론적 구성물처럼 존재한다. 이들의 사랑은 구체적 대상을 향한다기보다는 사랑이라는 관념 그 자체를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영화의 전반부는 프루에즈를 중심으로, 후반부에는 로드리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때 상대방은 대화의 구성물 혹은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의 불가능성은 그 관념에 더 많은 열정을 불어넣는다. 어쩌면 이들의 사랑은 좌절되었다기보다는 포기되었다고 해야 맞는데, 이는 사랑이 (물리적 측면이 결여된 채) 오로지 관념적이기만 했던 까닭에 그것이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이상이라는 관념과의 싸움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올리베이라는 남녀의 사랑을 둘러싼 세계의 거대하고 불가해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비단 구두>의 복합적 세계에는 기독교적 평화라는 종교적 이상과 제국주의 시대 스페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세계정세라는 정치적 문제가 공존한다. 로드리고와 프루에즈는 사랑과 종교적 신념, 그리고 정치적 의무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한다. 이러한 순간에는 천상의 세계, 성인이나 수호천사 같은 초월적 존재들이 출몰하여 내면적 갈등을 심화한다. 이때 세상에 비추이는 달빛이나 별빛은 비현실적 느낌을 더욱 강조한다. 또한 영화에는 마치 시대상을 논평하는 논객들처럼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풍자적 해학을 담아 열띤 토론을 펼치는 사람들이 나온다. 가령 2부에서 등장하는 배를 탄 두 남자와 3부에서 나룻배를 타고 등장하는 청년들의 대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주변적 존재들의 대화는 주인공들의 대화보다 결코 비중이 적지 않은데, 이는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이 작품의 복합적 테마를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비단 구두>의 배경을 이루는 제국주의라는 역사는 이후 올리베이라가 <지배의 공허한 영광>(1990), <말과 유토피아>(2000), <제5제국>(2004)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중요한 테마이다. 올리베이라는 영화의 도입부에 포르투갈의 세바스찬 왕(1554-78)과 스페인 필리페 2세(1527-98)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자막을 단다. 이는 스페인이 중심이 된 『비단 구두』 속 역사를 포르투갈과 연관 짓기 위함이다. <비단 구두>는 세바스찬 왕이 모로코 전투에서 실종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실제로 포르투갈은 세바스찬 왕이 사라진 이후 스페인의 왕 필리페 2세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세바스찬 왕은 언젠가 죽지 않고 돌아와 포르투갈을 구원해 줄 메시아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또한 올리베이라는 이 영화에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기독교 전파를 통해 세계를 식민화하려 하던 도중에 이슬람 세계의 거센 저항을 만나 끝내 패배하고 만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클로델의 원작에는 없는 것으로서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논평을 영화 내부에 기입하고자 하는 올리베이라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연극화된 영화의 영화적 존재론


<비단 구두>를 포함하여 그 전후에 있는 작품들, 그러니까 <불운의 사랑>(1978)과 <프란시스카>(1981), <나의 경우>(1986)는 올리베이라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연극적인 영화들에 속한다.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연극에 대해 깊이 천착하고 그것을 전면화시킨다. 우선 연극을 상연한 후 그것을 카메라로 기록함으로써, 영화 자체가 연극의 기록물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쇼트는 연극을 정면에서 찍은 타블로이다. <비단 구두>도 오프닝과 엔딩을 제외한 대부분의 씬들이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타블로 쇼트의 미쟝센을 채우는 것은 전적으로 연극 세트들이다. 등장하는 장소들의 절반 이상이 야외이고 심지어 바다 장면이 많은 이 영화의 배경을 채우는 것은 모두 그림으로 된 벽과 특수한 무대 장치들이다. 영화는 이러한 연극 세트의 인공성을 숨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전면화한다. 무대 뒤의 공간과 조명 세팅 등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그림 벽의 변화를 통해 장면의 전환을 이뤄내기도 한다. 이처럼 <비단 구두>는 연극적 영화라는 올리베이라의 이상이 정점에 달한 작품이다.


그런데 <비단 구두>를 비롯한 이 시기 올리베이라의 영화들에는 연극을 넘어서는 영화적인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거기에는 영화와 연극 사이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아주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이 영화들에서 타블로 쇼트의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재적소에서 활용되는 클로즈업, 패닝이나 트래블링 쇼트 등 영화만의 카메라 기법은 움직이지 않는 수면에 던져진 작은 돌처럼 큰 파장을 자아낸다. <비단 구두>에서 타블로 쇼트 내부에 위치한 인물들의 거리(혹은 크기)는 때때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다. 우선 우리는 특정한 공간에 자리 잡은 인물들의 모습을 풀쇼트로 보게 되는데, 그들이 말을 하는 동안 인물들이 전경 쪽으로 혹은 카메라가 후경 쪽으로 이동하여(이 이동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뤄진다) 미디움 쇼트나 클로즈업 쇼트에 가까운 사이즈로 확대되는 것이다.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가 집중하게 되는 것은 인물들의 얼굴, 더 정확하게는 말하고 있는 인물들의 얼굴이다. 이것은 다분히 영화적인 것이다.


<비단 구두>의 타블로 쇼트는 아주 정적이다. 움직임은 거의 없거나 아주 천천히 이뤄진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롱테이크가 많아서 대부분의 씬이 하나의 쇼트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쇼트는 마치 시간이 멈추어 박제된 활인화처럼 보인다. 이러한 정적인 화면 내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인물들의 말, 끝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말들의 향연이다. 올리베이라는 클로델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그 음악성에 주목하여 발화된 말의 운율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들은 얼핏 정면을 응시하며 무감각한 태도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발화하는 말들에는 강렬한 감정이 운율을 타고 흐른다. 또한 인물이나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을 통해 그들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눈빛에 타오르는 열정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움직임은 영화의 운동성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객들이 그들의 말을 더 잘 들을 수 있게끔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운동성은 카메라나 인물들의 운동성이 아니라 언어의 운동성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으며,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잘 보는 것이 아니라 잘 들으라는 것이다. 듣는 것이 중요한 영화, 더 잘 들을 수 있게끔 이미지를 구성하는 영화, 바로 이것이 올리베이라가 찾아낸 영화적 존재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며 올리베이라의 영화들을 ‘말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이다. <비단 구두>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 뒤편에 위치한 사람들이 ‘écouter’라고 외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올리베이라의 연극적 영화들 중에 <비단 구두>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바로 연극의 퍼포먼스적인 성질과 그것을 영화로 촬영하는 행위를 통해 연극과 영화의 매체적 관계를 전면화하는 것이다. 이는 우선 카메라와 프로젝터 등 영화를 구성하는 기계적 장치들을 화면 내부에 기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비단 구두>의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가 그 사례이다. 특히 롱테이크로 찍은 영화의 오프닝은 매우 인상적이다. 관객들이 착석하면 관객석 2층에 있던 배우들 중 하나가 무대로 걸어 나와 작품을 소개하는데, 이때 이 극장에서 연극이 상연될 것인지 영화가 상영될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의 말이 이어지면서 무대 한쪽 측면에 위치한 영화 스크린에 빛이 비추인다. 말하자면 연극무대 위에 올려진 영화 스크린인 셈이다. 카메라는 프로젝터의 빛과 그 빛에 홀려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는 타블로 쇼트를 구성하던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영화를 촬영하는 무대 장치와 카메라, 스태프 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결국 <비단 구두>는 연극처럼 시작해서 영화로 끝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 장치를 드러내는 작업은 영화 이미지의 근원을 이루는 1초에 24프레임의 필름의 운동과 빛과 그림자의 활용을 드러내는 것으로 확장된다. 특히 <나의 경우>에서는 오직 카메라로 촬영하고 편집하고 영사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이미지의 반복과 변용이 실험적으로 펼쳐진다. 연극을 촬영한 평범한 이미지를 두고 거기서 사운드를 제거하여 무성영화로 변형시키고 별도의 나레이션을 추가하며, 또한 필름 릴의 속도 조절을 통해 이미지의 속도를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것과 같은 변주를 보여준다. 한편 <비단 구두>에는 판타스마고리아라는 영화 이미지의 본질적 속성을 드러내는 장면들이 있다. 가령 남녀의 두 개의 그림자가 등장하여 시를 낭송하듯 화음을 맞추는 장면과 달 그림에 뚫린 구멍에 얼굴을 내밀고 방백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들은 영화 내용과 관련된 메타논평적인 기능을 함과 동시에 영화의 매체적 속성에 대한 메타논평적 기능을 함께 수행한다.

이처럼 올리베이라의 연극적 영화들은 원작 텍스트와 연극성에 대한 강조로 출발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연극의 기록물로만 남지 않고 영화라는 매체만이 가능한 창조적 변형을 통해 연극과 영화 사이 어딘가에 머무르게 된다. <비단 구두>는 그러한 매체적 성찰을 한계까지 밀어붙인 기념비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글ㅣ 박영석 영화연구자


<비단구두> 상영일정

- 9/20(일) 13:00(1부) / 15:40(2부) / 19:00(3부) 

- 9/25(금) 13:00(1부) / 15:40(2부) / 19:00(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