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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 오히려, 가장 곤 사토시스러운 작품


연상호 감독의 선택 -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東京ゴッドファ-ザ-ズ / Tokyo Godfathers


2003│92min│일본│Color│35mm│12세 관람가

연출│곤 사토시 今敏 / Kon Satoshi

출연│에모리 도오루, 우메가키 요시아키, 오카모토 아야

상영일정ㅣ 1/31 19:10(시네토크_연상호), 2/13 20:10

“이 영화는 곤 사토시가 늘 그렇듯이 시나리오 측면에서 발군에 가까운 능력을 보여준다. 특히 이 작품은 매우 독특한 컨셉이 훌륭한 연출력을 만나 만들어진 작품이다.”


오히려, 가장 곤 사토시스러운 작품



곤 사토시는 전성기 재페니메이션이 성취한 하나의 완성형이었다. 그의 작품은 현실과 환상의 딱딱한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애니메이션치곤 드물게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표방한 <퍼펙트 블루>부터 말 그대로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그린 <파프리카>까지 그는 세계, 장르, 형식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는다. 대신 인과관계라기보다는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서사를 통해 우리를 꿈이라는 이름의 거울 앞으로 안내한다. 말하자면 곤 사토시는 꿈 그 자체를 물리적으로 ‘그렸던’ 애니메이터다.


이런 곤 사토시의 작품 세계를 언급할 때 매번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영화가 있다. 다름 아닌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이하 원제인 <동경대부>)이다. 정확히 부합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관된 테마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에 더 자주 거론되는 것 같다. <동경대부>는 그의 영화 중 드물게, 아니 거의 유일하게 따뜻하고 희망적인 분위기다. 1946년 서부영화 <3인의 대부>에서 모티브를 빌려온 이 작품은 국내 제목처럼 크리스마스에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이야기를 소재로 다룬다. 도쿄 한복판 하루를 연명하기도 바쁜 홈리스 세 사람이 어느 날 쓰레기더미 속에서 아기를 발견하고 부모에게 되돌려주려 한다는 게 전체적인 뼈대다. 얼핏 이야기만 놓고 보면 흔한 미담 정도에 불과한 훈훈한 내용에 가깝다.



하지만 곤 사토시는 어떤 자리에 가져다 놓아도 역시 곤 사토시다. <동경대부>는 이들의 좌충우돌 여정 속에 당대 일본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을 감추지 않는다. 수많은 인파가 오고 가지만 누구 하나 상대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삭막한 대도시,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는 법을 잊은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따스함를 지닌 자들이 홈리스라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부랑자, 호모, 가출소녀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았기에 비로소 자유롭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사회적 약속, 그러니까 돈, 명예, 성공 따위로부터 멀어진 존재들만이 인간적일 수 있다는 역설적인 유머다. 그런 측면에서 <동경대부>는 가장 곤 사토시스러운 작품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아이러니한 블랙유머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인간적인 온기는 우리의 삭막한 현실을 새삼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선행이 ‘기적’과도 같은 일임을 이미 알고 있다. 3인의 ‘동경대부’들의 모습이야말로 곤 사토시가 바라는,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꿈이자 곤 사토시가 구현한 최상의 판타지인 셈이다.


사실 <동경대부>는 곤 사토시의 이름을 걷어내고 봐도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다. 자유로운 가출소녀 미유키, 여자를 꿈꾸는 남자 하나, 차가운 도시의 홈리스 긴 등 개성적인 캐릭터, 선명한 플롯, 적절한 템포의 유머는 보는 이를 편안하고 즐겁게 한다. 여기에 곤 사토시 특유의 세밀한 묘사, 살아있는 듯한 표정연기, 애니메이션만이 채울 수 있는 부드러운 질감이 작품의 온기를 더한다. 하지만 영화가 전형적으로 따뜻하고, 유쾌하고, 깔끔할수록 그 감동에 빨려 들어가는 대신 도리어 섬뜩해지는 일면이 있다. 꿈에서 깨어난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차가운 콘크리트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동경대부>가 전하는 한겨울의 꿈 같은 온기가 더 소중한 건지도 모르겠다. 꿈인 걸 알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에는 기적을 바라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이다. <동경대부>는 그 마음을 조용히 다독이며 위로한다.



송경원 『씨네21』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