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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가르시아> - 미국의 현실을 은유하는 샘 페킨파의 폭력


이해영 감독의 선택 - 가르시아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112min│미국, 멕시코│Color│DCP│청소년 관람불가

연출│샘 페킨파 Sam Peckinpah

출연│워렌 오츠, 이젤라 베가, 로버트 웨버

상영일ㅣ1/28 19:40, 2/14(토) 18:40 *시네토크_이해영 감독

심란하고 헛헛한 마음엔 역시, 샘 페킨파로 앗 뜨거 반신욕.”



미국의 현실을 은유하는 샘 페킨파의 폭력



<가르시아>는 웨스턴인가? 아니다. 그런데 <가르시아>는 웨스턴처럼 보인다. TV에서 작업하던 당시부터 웨스턴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던 샘 페킨파는 <관계의 종말>(1973)로 장르의 만가를 써둔 터였다. 이듬해 발표한 <가르시아>는 페킨파의 웨스턴을 대표하는 <와일드 번치>(1969)와 맥을 같이한다. 미국의 한량은 멕시코에서 죽음의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기관총 세례를 받고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와일드 번치>에서 이미 죽음을 맛본 워렌 오츠가 현대의 멕시코에서 되살아나 죽음의 발레를 재연한다. <가르시아>는 그런 작품이다. 페킨파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매번 불려나오는 ‘폭력’을 생각해 보자. 할리우드 영화의 가공된 폭력과 비교해 페킨파 영화의 폭력에서는, 스크린이 따귀를 때리는 양 현실감이 느껴진다. <가르시아>도 마찬가지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신이 폭력이다. 멕시코의 부호는 딸을 임신시킨 놈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이유로 사람들 앞에서 딸의 옷을 벗기게 한다. 악당의 하수인은 술집 여자가 유혹의 손길을 보내자 팔꿈치로 가격해 실신시켜 버린다(영화는 그가 게이라는 암시를 여러 번 흘리는데, 페킨파는 게이 커플을 과감히 처단하며 정치성을 숨기지 않는다). 주인공 커플이 길가 수풀에서 낭만적인 피크닉을 즐기는 도중, 갑자기 등장한 악당들이 그녀의 몸을 탐한다. 원인도 없고 이유도 없이 난데없이 일어나는 폭력이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쉽게 말해, 페킨파는 현실이 그렇다고 여기는 것 같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동정 없는 세상에서 버티며 살기, 그것이 페킨파 영화의 주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운운하는 것으로 페킨파 영화의 폭력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뭔가 모자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르시아>는 여자 주인공의 비중이 큰 페킨파 영화다. 엘리타는 주인공 베니가 갖추지 못한 어떤 면모, 흐릿하나마 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가 돈 보따리를 찾아 소풍을 떠나자고 했을 때 그녀는 비극의 기운을 감지한다. 베니는 ‘Let's live for today’를 모토로 사는 페킨파 영화의 전형적인 남성인데, 엘리타의 존재로 인해 그가 게으른 주장 아래 숨겨둔 폭력적 특성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그녀는 무덤을 파헤치는 걸 사자에 대한 모욕이라며 말리지만 그는 무덤 속에 신성함 따위는 없다고 고집을 피운다. 결혼해서 함께 사는 게 행복의 전부인 그녀와 달리 그는 먹고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대꾸한다. 시체로 돈을 벌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비참한 결말로 이어지는 건 당연하다. 베니의 태도는 곧 미국의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닌데, <가르시아>는 남의 신성한 땅을 짓밟기를 밥 먹듯 하는 미국의 노선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1974년은 할리우드에서 <가르시아>, <대부 2>, <차이나타운>이 나온 해다. 애비가 딸을 강간하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미국인은 그것으로 모자라 남의 땅까지 욕보인다. 침략의 사고는 자기 파괴적인 본성과 연결되어 있는데, 베니의 경우 현상금으로 즐기기보다 장렬한 총격전을 벌이는 쪽을 택한다. 미국의 해외 침략 전쟁이 그런 것처럼 베니의 행동에 도덕적 근거는 부족하다. 즉 <가르시아>의 결말은 내러티브상의 필요가 아닌 인물의 본성에서 기인한 것에 더 가깝다. 그해 미국은 베트남에서 물러났지만 <가르시아>는 미국의 침략 전쟁이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임을 정확히 예견했다.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페킨파는 언젠가 “옛 서부의 무법자들로부터 깊은 유혹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난 가끔 나 자신이 무법자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페킨파의 영화는 자기 환멸의 기록일까?

이용철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