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황야의 결투

[에세이] 영화보기, 내 십대의 특별한 생존기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조금 특별했다. 이상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지 모른다. 공립 대안학교였는데, 갓 한국에서 온 열여섯의 영어가 느린 동양인 여자아이에게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가지고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 토론하는 수업시간은 신세계였다. 매번 문학시간은 공포였고 두려움이었다. 나는 ‘일리야드’를 읽지도 플라톤의 ‘국가론’ 전문을 읽어본 적도 없었는데, 그곳의 아이들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미식축구 감독 욕을 하며 인용했고 세익스피어와 찰스 디킨슨 작품들을 학교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드라마에 비유하곤 했다. 그곳의 똘똘한 아이들은 나에겐 거대한 충격이었다. 난 거기서 살아남고 싶었고 말하고 싶었고 함께하고 싶었다. 우리 학년에서 유행했던 고급 영국식유머를 배우고 즐.. 더보기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 - 존 포드론 젊은 시절의 존 포드는 양친에게 물려받은 아일랜드인의 뜨거운 피가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비록 미국에서 출생하긴 했지만 존 포드는 대다수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그러했듯 고향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지니고 있었다. 스물여섯이 되던 해인 1921년에 존 포드는 오매불망하던 고국 아일랜드를 처음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과의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던 탓에 아일랜드는 정치적 긴장상태로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예술가에서 그런 사회적 격변은 종종 긍정적인 창작의 열정을 부추기곤 한다. 존 포드는 이 여행에서 민감하게 느꼈던 것들을 나중에 작품을 통해 표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41)와 (52), 그리고 (55)과 같은 작품은 고국 아일랜드에 바치는 찬가로 그가 이 시기에 겪었던 체.. 더보기
[특집1] 거대한 신화를 창조한 사나이, 존 포드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② 존 포드는 1895년 2월 미국 메인주에서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예로 태어났다. 영화계에서 ‘잭 포드(Jack Ford)’라는 예명으로 일하면서 배우, 스턴트맨, 시각효과 등의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며, 그의 형인 프랜시스 포드의 조연출을 거쳐 자신의 이름을 건 연출을 시작했다. 현장에서 계속된 영화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간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포드는 폭스와 워너 등 메이저 스튜디오에 소속되어 50년(1917~1966)의 연출경력동안 웨스턴, 가족멜로드라마, 코미디, 전쟁물 등 다채로운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다. 미국 영화의 카리스마 특히 포드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단연 웨스턴이다. 포드는 스스로 자신을 소개할 때 “내 이름은 존 포드다. 나는 서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