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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

[시네토크] 작가들이 공유하는 공기가 그들 영화 특징을 만들어 낸다 - 이용철 영화평론가가 말하는 그의 'Unseen Cinema' 시네토크 작가들이 공유하는 공기가 그들 영화의 특 징을 만들어 낸다 이용철 평론가에게 듣는 그가 추천한 ‘Unseen Cinema’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 처음 친구로 참여한 이용철 평론가는 ‘Unseen Cinema’ 섹션에 포함된,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쉽게 만나보기 어려웠던 영화 세 편을 추천했다. 그리고 지난 7일과 8일 양일간 그가 선택한 세 편의 영화 , , 가 연이어 상영되었고, 8일 저녁 마지막 상영작인 상영 후 이용철 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영화를 선택한 개별적 이유와 각 영화들에 특징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그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이용철(영화평론가): 이번에 유운성 평론가와 함께 Unseen cinema를 맡게 됐다. 이번에 상영하는 작품은 와 , 이렇게 총 .. 더보기
[리뷰] 존 카사베츠의 ‘얼굴들’ 인물에 대한 넘치는 애정 두 번의 스튜디오 작업은 존 카사베츠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했다. 그는 할리우드 시스템 아래에서 영화를 찍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스튜디오와 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절대로 상업영화를 찍지 않기로 결심했다(물론 그 결심도 어쩔 수 없이 바뀌지만). 카사베츠는 할리우드의 역겨움을 의 도입부에서 드러낸다. 시사실에 모여 앉은 영화 관계자 중 한 명이 “이번엔 뭘 팔 거야?”라고 묻자 상대편 인물이 “돈이죠”라고 대답한다. 이어 옆 인물이 “사실, 이건 아주 좋은 영화예요”라고 말하면 다시 다른 인물이 “상업영화 영역의 이라고나 할까요”라며 너스레를 떤다. 돈의 원칙으로 운영되는 할리우드와 더 넓게는 돈으로 지배되는 미국사회에 대한 비판은.. 더보기
[Cinetalk] 뉴아메리칸시네마의 숨겨진 걸작, <자유의 이차선> 지난 4월 7일, 몬테 헬만의 상영 후, 이용철 영화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이 당시 뉴아메리칸시네마와 공명하는 지점들을 통해 몬테 헬만이라는 낯선 이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이 날의 강연을 옮긴다. 이용철(영화평론가): 몬테 헬만은 1932년 뉴욕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처음 시작했던 것은 연극이었고, 틈틈이 TV나 영화의 편집 등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가 영화를 시작한 것은 로저 코만의 역할이 컸다. 당시 로저 코만과 젊은 감독들의 만남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이전 세대의 감독들과 다르게, 학교에서 영화를 배운 이 젊은이들은 학교를 나와서 정작 영화를 만들 방법이 없었다. 그 때 코만은 아주 적절한, 구세주.. 더보기
자크 타티의 '나의 아저씨' (1958)는 한 도시 속의 두 도시 이야기다. 윌로 씨가 살고 있는 쪽에선 담쟁이덩굴과 이끼가 감싸 안은 집, 떠돌이 개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리, 인간의 손때가 묻은 담벼락, 마부가 마차를 끄는 새벽길을 볼 수 있다. 그곳엔 시장이 있고, 사람들의 대화가 있다. 상인은 할머니가 알아서 배추를 가져가도록 놔두고, 토마토를 떨어트린 소녀는 몰래 도망가며, 윌로 씨의 가방에 든 생선이 가판대 아래 앉은 개의 성질을 건드리는 그런 곳이다. 그들은 살기 위해 산다. 윌로 씨의 처남 가족이 지내는 쪽의 풍경은 완전히 다르다. 회색 빛 건물이 줄지어 섰고, 검은 아스팔트가 각 구역을 뚜렷이 나눈다. 공장장인 처남이 출근하면 웃으며 잡담을 나누던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척한다. 그곳의 사람들은 효율성과 공간과 일.. 더보기
재미로 치면 으뜸가는 서부극 - 혹스의 ‘리오 브라보’ 할리우드가 거대 에픽에 현혹되어 있을 당시, 하워드 혹스도 왕과 왕비와 유사 역사가 뒤섞인 이야기에 도전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이자 혹스의 친구인 윌리엄 포크너를 비롯해 수많은 혹스 사람들이 동원됐고, 이집트 로케이션을 감행한 영화엔 막대한 물적 자원이 투입됐으며, 만 명 가까운 엑스트라가 출연한 어마어마한 장면까지 연출됐다. 그러나 장르영화를 주물러온 혹스라 한들 모든 장르의 걸작을 만들 수는 없었다. 은 흥행에 실패한데다 평단의 혹평까지 들었다. 데뷔 이후 1년 이상 쉰 적이 없던 혹스가 4년이란 긴 시간을 할리우드와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던 이유는 그러하다. 유럽, 그 중에서도 프랑스 평단들의 애정 공세로 그나마 마음을 달랜 혹스는 1958년 봄에 드디어 애리조나의 촬영 현장으로 복귀한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