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작가를 만나다

[작가를 만나다]"우리는 모두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 - <설인>의 이사무엘 감독

"우리는 모두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

<설인>의 이사무엘 감독



5월의 ‘작가를 만나다’ 상영작은 이사무엘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설인>이었다. 이 날 감독과의 대화는 영화의 모티브가 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었는데, 이는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 영화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흥미로운 증언이기도 하였다. 그 대화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가 영화 안에 존재하는데 시나리오를 쓸 때 어느 지점에서부터 출발했는지 궁금하다.


이사무엘(영화감독): 6년 전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시나리오를 쓰던 시기에 지인의 출장길을 따라갔다가 어떤 산을 보게 되었다. 산 안에 세상이 모르는 존재가 숨어 살고 있으면 어떨까 생각을 했던 게 모티브였다. 당시에는 이만희 감독님의 영화를 많이 찾아봤는데, 소녀와 킬러가 주인공인 <암살자>와 같은 영화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킬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좀 더 장르적인 시나리오였는데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나리오가 많이 바뀌게 되었다.


김성욱: 눈 내리는 설경의 이미지를 첫 장면과 끝 장면에서 보여주는데, 정말 알 수 없는 존재가 그 산에 살고 있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산이라는 공간 안에 이상한 시간성 또한 존재하는데 공간을 설정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이사무엘: 기본적인 컨셉은 한 평범한 남자가 이상한 시공간 안으로 들어와서 자신이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해소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을 큰 줄기로 잡았기 때문에 이런 공간과 시간을 설정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텔은 내가 10년 전에 여행을 갔다가 실제로 묵었던 모텔이기도 하다. 당시에도 눈이 많이 내렸고 사람이 많이 없었던 시기였는데 그때의 인상도 많이 남아있었다.


김성욱: IMF 이전과 이후로 시간을 설정한 데에는 사회적 맥락이 있는 것 같다.


이사무엘: 장르적인 성격이 강했던 원래의 시나리오에서 좀 더 땅에 붙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나의 개인적인 것들을 끌어오게 되었다. 내가 당시에 느꼈던 두려움이나 어려움들, 막막함과 같은 것들이 영화 속 젊은 친구들 안에 담겨있는 것 같다. 최근 4, 5년을 지나면서 세상이 잘못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라는 한 사설의 제목이 마음속에 남아있다. 자살에 대한 사설인 동시에 망가져가는 시대에 대한 사설이었다. 그 제목이 나에게 크게 다가왔는데 영화도 그랬으면 했다.

김성욱: 중반부 이후는 무국적 액션영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이 공간도 시간도 착종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이사무엘: 예전에 60년대 장르영화들을 많이 찾아봤다. 한국의 장르영화가 가능한 시기가 그 시기였는데 지금도 어떤 측면에서는 그런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리얼한 영화의 톤에 맞춰져 있는 분들에게 총격이 나오는 활극은 말도 안 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영화의 구조 안에서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무리해서 구현해보려는 시도를 했던 것 같다. 그 당시 영화들 클래식한 장르영화에 대한 판타지나 열망 같은 게 있는데 지금 현재의 한국 사회의 어떤 것들과 닿아있으면 좋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김성욱: 영화 안에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사무엘: 개인적인 두려움이 투영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기에는 무섭고 한계가 많은 세상이라는 것을 자주 느끼는 것 같다. 나이가 어느 정도 돼서 기성세대라고 불리는 나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 자신이 불안하고 나의 자식을 책임지거나 양육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다. 주인공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차마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성장일 수도 있고 영화 안에서 유일한 희망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소녀가 살아남은 것이 정말 해피엔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성욱: 소녀가 살아남은 것이 해피엔딩이 아니라면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이사무엘: 살아남음을 통해 이 세계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는 문제적인 세계를 살아나야 하기 때문에 온전한 해피엔딩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깨어나는 것이 해피엔딩에 가깝다. 그것은 현실에서 깨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설인의 세계에서 깨어나는 것일 수도 있는데 후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연수의 깨어남을 해피엔딩으로 볼 수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김성욱: 중심적인 인물 외의 캐릭터들이 다들 독특하다. 어떻게 이런 인물들을 구상하게 되었는지.


이사무엘: 주인공 외의 캐릭터들이 구원을 갈구하는 상태의 캐릭터로 설정되었다. 다들 짝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기쁨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모텔의 여주인은 거류민이다.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들어와서 힘들게 사는 와중에 경찰과 만나서 나름대로 삶의 기쁨을 얻게 되는 캐릭터였다.

김성욱: 소녀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산에 다시 올라가려고 하는 것과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내려가려고 하는 것이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이 특이했다.


이사무엘: 소녀는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고 아버지의 흔적이라도 보고 싶어서 산으로 들어가는 인물이다. 꿈 장면이 여러 번 드러나듯이 몽유병과 같은 모티브가 있었다. 그 꿈은 아버지가 소녀를 산으로 불러들이는 꿈이고 그 꿈을 따라서 쫓아가는 현실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캐릭터이다. 처음 구상에서는 소녀가 친구의 딸이 아니라는 설정이었고 이런 사실이 대사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빠졌는데 편집을 하면서 소녀가 친구의 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환기시킨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소녀는 자신을 구해주는 주인공에게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게 되고, 주인공은 소녀를 통해 자기가 지우려고 했던 아이에 대한 죄의식 혹은 친구에 대한 죄의식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정보들을 많이 뺐던 것 같다.


관객1: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감독님은 재능이 의심될 때마다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하다.


이사무엘: 지금도 시나리오를 쓰면서 끊임없이 의심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영화를 정말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설인>을 찍게 되는 상황 자체도 나에게는 한계였던 것 같다. 촬영을 앞두고 과연 정해진 예산 안에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2년 정도 소요가 되었는데 전투를 벌이는 심정이었다. 모든 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영화가 좀 더 현실적인 나의 세계와 연결이 되면서 마음이 편해졌던 것이 있었다.


김성욱: 장편 데뷔작의 개봉을 거치면서 영화가 관객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측면이 있는지.


이사무엘: 개인적으로는 <설인>이라는 작품이 애증서린 영화인 것 같다.(웃음) 이 영화를 완성해서 스크린으로 보게 되는 순간이 오리라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수익을 위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욕심은 없었는데,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는 분들의 시각들을 더 많이 고민하게 되었던 것 같고. 지금은 좀 어정쩡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지금보다 정보를 훨씬 더 줄이는 게 좋을 것이다. 이게 이해가 될지에 대한 당시의 고민들로 인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러한 아쉬움과 영화를 만들어서 관객들과 함께 보는 즐거움이 합쳐져서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