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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적 유언장

[영화사 강좌3] '이후'의 영화의 핵심 영화전사, 오시마를 말한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영화사 강좌를 마련했다. 지난 21일 저녁 <도쿄전쟁전후비화> 상영 후에는 그 세 번째 시간으로 영화평론가이자 부산시네마테크를 맡고 있는 허문영 원장이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적 유언장’이란 주제로 열띤 강연을 펼쳤다.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허문영(부산시네마테크 원장, 영화평론가):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영상자료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을 하고 있다. 저도 구로사와의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봤습니다만 여전히 압도적이다. 이 압도성은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내러티브 경제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서사, 대사, 인물, 연기, 사운드, 편집, 그 모든 점에서 최소한의 가장 적절한 수준의 도구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내는 장인적인 면이 구로사와 영화의 힘을 만든다고 본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구로사와의 영화를 자꾸 말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전전 일본영화의 거장과 전후 일본영화 감독 두 사람의 회고전이 동시에 열리고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역시 고전기 영화를 충분히 볼 필요가 있고 고전기 영화를 충분히 본 후에야 모던시네마를 더 잘 받아들이고 더 많이 즐길 수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한가지다. 왜냐하면 오시마 나기사 역시 ‘이후’를 그린 ‘이후’의 감독이기 때문이다. 모던시네마의 출발을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으로 잡든 아니면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으로 잡든, 50년대에 시작된 모던시네마는 ‘이후’의 영화다. 무엇의 이후인가를 따져 물으면 고전기의 이후이기도 하고 2차 대전 전후 세계대란의 이후이기도 하고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어쨌든 ‘이후’의 영화다. ‘이후’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이전의 고전적인 시기, 고전적인 상태, 고전적인 의식에 대한 심취와 매혹을 이해하지 않고 과연 ‘이후’를 제대로 즐기고 감각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기사 나기사는 일본영화사에서 전후의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2차 대전 이후만이 아니라, 영화의 사조와 경향에서 2차 대전 이후 큰 힘을 발휘한 쇼치쿠 누벨바그(일본 뉴웨이브)의 선구자이자 대표자이며 가장 전투적인 영화전사라는 점에서 일본의 ‘이후’의 영화, 단순히 전후의 영화가 아니라 ‘이후’의 영화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후라는 의미에 익숙하실 텐데, 오시마 나기사를 말할 때의 ‘이후’는 두 가지 층위가 있는 것 같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에서의 이후. 포스트, 포스트 고전기, 모던시네마 등 형식으로서의 이후의 측면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 고전기 영화는 내러티브의 경제를 완성한 시대의 영화이다. 모던시네마는 고전기 영화의 내러티브 경제성에 위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 중에서 특히 데드타임을 중심으로 한 잉여들을 통해서 시네마를 다시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것은 일본영화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이후 번성한 모던시네마의 일반적인 원칙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 물론 오늘 보신 <도쿄전쟁전후비화>에도 엄청나게 많은 데드타임이 등장하는데, 모토키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긴 장면을 포함해서 구지 보여줄 필요가 없는 텅 빈 장면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연결들이 계속 나온다.

그런데 오시마에게는 또 다른 ‘이후’의 측면이 있다. 그것은 영화외적인 요소라고도 할 수 있다. 보통 오시마를 일본의 국가주의와 맹렬히 싸운 정치적인 감독으로 이야기한다. 이상한 것은 오시마가 정치적 이슈를 다룰 때 현장 안으로 직접 들어가 주인공을 그 현장 속에서 시작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시마의 영화에서 정치적 이슈는 항상 ‘이후’에서 그려진다. 이를테면 가장 정치적이라고 알려진 1960년 영화 <일본의 밤과 안개>조차 50년대 일본 공산당계 좌파운동과 반공산당계의 학생운동 양진영의 싸움이 끝난 다음 여전히 둘의 싸움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배자는 마지막에 일본의 밤과 안개 안으로 사라져버린다. 여기에는 정치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전망을 찾으려고 애쓰는 전사나 투사의 모습이 없다. 1960년이면 오시마 나기사가 우리 나이로 불과 스물아홉인데, 20대의 나이에 가장 정치적이라고 알려진 세 번째 영화에서조차 오시마의 정치적 회상은 이상하게도 정치투쟁의 한가운데로 가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후’에서 이전을 바라보면서 실패를 응시하는 방식으로 정치영화를 만들었다.

오시마의 영화 중 제가 좋아하는 <백주의 살인마>(1966)는 살인범의 이야기다. 주인공 그룹이 농촌에 가서 공동체를 만들고 실패한 이후에야 살인범이 등장하고, 무엇인가 실패한 이후에 사건이 벌어진다. 그런데 실패한 이후에 그 실패를 안에서 복구하려는 그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 이후에 오시마의 주인공들은 자꾸 범죄와 섹스, 강간, 절도에 빠져든다. 오시마의 영화를 정치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고다르의 영화를 정치적이라고 할 때와는 매우 다른 차원의 비관적이고 회고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다르와도 비교했지만, 6·8을 스무 살에 맞았던 필립 가렐과 비슷한 시기의 장 으스타슈, 이들은 죽을 때까지 6·8을 잊을 수 없었고 끊임없이 그 쪽으로 돌아가려 했으며 그것이 끝나고 나서 자신들의 인생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끝난 이후로 모든 것이 끝났고 살아있는 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굉장히 차갑지만 집요한 노스탤지어의 정서가 있다. 그런데 오시마가 정치적 이슈나 50~60년대 일본사회의 정치투쟁을 다룰 때에 노스탤지어적인 정서가 전혀 없다. 오히려 항상 그것은 실패했기 때문에 그 실패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 속에서 정의된다. 결국 오시마가 담고자 했던 것은 스스로 몸담았던 50년대 좌파운동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목격했던 60년대 좌파운동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정치적인 진단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실패하게끔 운명 지어진 것처럼 그려지고 있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한다. 이런 점이 오시마를 60년대 세대로 부르는 것을 망설이게 만든다. 그래서 차라리 오시마 나기사적인 어떤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60년대 세대 혹은 쇼치쿠 누벨바그 세대가 아닌 다른 각도로 오시마 나기사를 분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도쿄전쟁전후비화> 여기서 말하는 도쿄전쟁은 영화의 내용상 60년대 학생운동 특히 60년대 후반의 학생운동이나 좌파운동 전체를 지칭하는 경향일 것이다. 그리고 전후비화라는 제목에서부터 ‘이후’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 드러난다. 오시마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는 <신주쿠 도둑일기>와 함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롭고 난해하고 비관습적인 영화이다. 제가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시마의 다른 영화들이 주지 못한 절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절절함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얘기하면 이 영화에 대한 저의 소감과 제가 이 영화를 보는 방식에 대해서 설명이 될 것 같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가는 말씀드릴 생각이 별로 없다. 스토리 자체가 말이 안 되게 만들어져 있다. 아방가르드 형식을 취한 영화들이 자기 영화의 독법을 넌지시 일러주듯 이 영화도 나름대로 알려주는 것 같다. 영사기와 전등의 전원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장면이 그 부분이다. <도쿄전쟁전후비화>는 유서로 남긴 필름을 누가 찍었는가라는 질문과 그 유서가 무엇을 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불균질하게 내뱉는다. 두개의 질문을 하나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는 일종의 독법을 이 장면이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오시마는 쉽게 단번에 자신의 질문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결국 오시마 나기사가 질문을 하는 것 같다. 그의 질문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보길 바란다.

첫 장면에서 모토키는 뺏긴 카메라를 찾으러 경찰차를 쫒아간다. 거기에서 오시마의 영화에서는 듣기 힘든 아름다운 선율을 듣게 된다. 이 테마음악은 유언필름이 상영될 때도 흘러나온다. 오시마가 영화에서 이렇게 음악을 정서적으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영화가 거칠고 차갑고 형식주의적이기 때문에 이 장면은 지식을 동원해서 영화를 이해해야겠다는 긴장된 자세를 풀어주는 휴식처가 된다. 유언필름의 첫 상영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철길 너머의 작은 가게들, 사람들, 풍경들이 보이자 한 여학생이 무섭다는 말을 한다. 사실 무섭지는 않지만 60년대 세대를 생각하면 그 느낌이 이해된다. 영화에도 나왔다시피 영화를 현실변혁의 정치도구로 사용하고 모든 인간이 자기 부정을 통해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시대에, 유언필름은 모든 사건, 역사를 멈춰 세우고 시간을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킨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정치적 신념이나 정치적 이상주의가 포괄하는 역사적 시간이 포섭할 수 없는 절대적 시간, 자연의 시간일 수도 있고 우주의 시간일 수도 있고 아주 일상적인 순환의 시간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다른 시간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이 영화를 통해서 던지고 있다. 상징적인 것은 오시마가 60년대의 마지막, 70년대의 출발선에 서서 자신의 새로운 출발이 과연 이 형식으로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안고 만든 것 같다는 점이다. 모토키가 자신을 던졌듯이 혹은 유언장으로 영화를 만들고 죽었듯이, 자신의 전존재를 건 새로운 도약이고 투쟁이자 오시마 자신의 질문, 다짐, 느낌으로 이 영화를 받아들였다. 60년대에 정말 미친 사람처럼 거칠고 격렬한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 이렇게 뭉클한 느낌을 주는 영화를 만들어서 이것이 오시마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이후의 영화들에서는 이 영화의 질문이 발전하지 않기 때문에 오시마의 필모에서 이 영화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오시마가 좋아했던 장 마리 스트라우프의 시간에 대한 오시마의 인상이 이 영화에 드러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있는데, 여인의 몸을 스크린으로 삼아 상영하는 장면에 대해서 이 정도의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영화가 자기의 전존재를 걸고 새로운 영화적 시간 혹은 새로운 영화적 차원으로 도약하려는 오시마의 시도라면, 오시마가 이전까지 다뤘던 육체 그러니까 정치에 실패한 이후에 학대의 대상으로서의 육체와는 다른, 진정으로 자신의 몸이 체감하는 새로운 시간을 몸을 스크린 삼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 같다. 몸과 시네마가 합일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굉장히 위태로운 결단인데 그런 의지, 욕망, 갈망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다시 유언필름을 상영할 때도 역시 그 앞에서 야스코가 옷을 벗는데, 이번에는 야스코의 몸에 영사되는 것이 아니라 뒤의 벽에 영사된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장면인데, 고전기 영화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서 자주 썼던 스크린 프로세스를 사용했다. 중요한 것은 스크린 프로세스를 사용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몸에 새겨진 영화, 몸에 새겨지고 싶었던 영화, 몸이 스크린 · 시네마가 되고자 했던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라는 불가능성, 죽음에 가까운 예감과 좌절이 두 번째의 분리된 스크린 프로세스 영사 장면에서 느껴진다. 실제로 그 장면은 서로 나체로 섹스를 하면서 목을 조르는 것으로 끝난다. 다가갈수록 스크린 혹은 시네마의 새로운 시간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며, 그 것을 무릅쓰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긴장이 전체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정리: 최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