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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오시마 나기사라는 운동체 - ATG시대

[지상중계] 일본영화연구자 히라사와 고 특별 강연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일본영화연구자이자 '오시마 나기사 저작집'의 공동편집자인
히라사와 고를 초청,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는 특별 강연 및 좌담을 마련했다. 지난 17일 오후 <신주쿠의 도둑일기> 상영 후에 오시마 나기사라는 운동체 - ATG시대란 제목으로 히라사와 고가 들려준 오시마의 세계에 대한 강연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히라사와 고(일본영화연구자): 현재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 감독으로 오시마 나기사를 거론하는 것에 대해 이의가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59년에 <사랑과 희망의 거리>로 데뷔를 한 뒤, 일본 영화 최전선에 섰던 사람이 오시마 나기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68 <교사형>이후에는 해외에서 활약을 하기 시작하면서 세계 무대에서도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만큼 세계적으로 알려졌음에도 작가주의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는 감독도 드물다. 물론 오시마 나기사라는 존재 없이는 어느 영화도 성립이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오시마 나기사의 작품들을 보면 특이하고 걸출한 한 작가의 재능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오시마 나기사를 하나의 매개체로 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생겨난 큰 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오시마는 대학 시절에 학생운동을 했었는데, 이것을 이론적, 실존적인 배경으로 하면서 쇼치쿠 시절에 조감독 그룹에서 시나리오집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쇼치쿠에서 독립한 이후에는 어떤 집단에서의 창조성을 그 기반으로 삼아왔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영화라는 것은 집단적인 작업이 필요한 미디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어느 영화도 집단 제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시마는 기술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주제, 내용, 사상까지 포함해서 스태프들, 배우들, 또는 친한 비평가들, 문학자, 예술가들과 논의를 하면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작업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ATG 시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ATG
에 대해서 먼저 설명드리자면, 1961 11월 상업적으로는 힘들었던 세계 예술영화 실험 영화를 배급하는 아트하우스 조직으로서 결성되었다. 전국에 10군데의 전문 극장을 설립하고 30년 이상에 걸쳐서 수 많은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다. 이런 것이 생긴 것은 그때까지 상업 영화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일본의 영화 산업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 시도의 배경에는 영화 산업 전체의 변화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58년이 일본에서 가장 많은 관객이 동원된 한 해였다. 하지만 그 뒤로는 TV가 출연해서 관객수도 극장수도 줄어갔다. 그래서 대형 영화사들은 경영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런 과정에서 오시마 나기사는 1959년에 <사랑과 희망의 거리>로 데뷔를 하게 된다. 요시다 요시게는 <몹쓸 놈>으로 1962년에 데뷔를 한다. 이들은 조감독 시절부터 동인지를 내면서 스스로의 시나리오를 발표하고 전위적인 영화 비평지에 기고하면서 기존의 영화 시스템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새로운 영화에 대해서 적극적인 발언을 하게 된다. 그런 활동을 가리켜 프랑스의 누벨바그를 따와 쇼치쿠 누벨바그라고 부르게 된다. 오시마와 요시다는 스스로 그런 호칭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원래 대형 영화사였던 쇼치쿠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오시마 같은 사람과 독립 영화를 하고 있는 고다르하고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 식으로 본인들은 호칭을 바꾸어서 부르기도 했지만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오시마와 요시다는 압도적이 지지를 얻어내게 된다. 그런 것들 속에서 일본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쇼치쿠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이와 유사한 대형 영화사들도 감독들을 적극적으로 데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일본 뉴웨이브라는 것은 경영이 힘들어졌던 대형 영화사들에서 영화를 재생시키기 위해서 했던 상업주의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었던 운동이었다. 그런 상업주의적인 맥락에서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1960년 안보투쟁을 배경으로 다큐멘터리나 자주영화, 실험영화와 같은 것들이 적극적으로 만들어졌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1950년대 후반의 정치, 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필연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 뉴웨이브는 영화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연극이나 미술, 음악, 문학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일어났던 사회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오시마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 혹은 ATG와 같은 조직이 생겨난 것은 이 때가 전환기였기 때문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청춘 잔혹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새로운 스타일의 청춘극이라는 것과 실재성을 강조하는데, 저 같은 경우 여기서 주인공들이 목도하게 된다는 설정으로 한국의 4.19 혁명, 일본의 안보투쟁과 같은 주제들을 대형 영화사의 영화 속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니면 계속 오시마가 중심적으로 생각했던 것 동아시아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러한 생각의 맹아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일본 학생 운동에서는 4.19혁명을 이끈 한국의 학생들을 따르라는 구호들이 실제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4.19혁명과 안보투쟁을 연결하는 것은 오시마가 특별히 작가주의적인 감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영화에서 그런 것들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는 부분은 주목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들의 시장이었던 가마가사키를 무대로 해서 하층 노동자들의 폭동을 보여주고 있는 <태양의 묘지>같은 작품은 68적인 상황을 예견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보여드린 <일본의 밤과 안개>같은 작품은 안보투쟁 패배 이후에 공산당과 신좌파 사이의 대립을 군상극으로 그려낸 것인데, 여기서는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가로지르면서, 특유의 롱테이크를 사용해 오시마 특유의 영화 세계를 담아낸 작품이라 하겠다. 그런데 일본의 밤과 안개는 개봉 직후에 정치적인 탄압에 의해서 상영이 중단되는 사태에 직면했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오시마의 영화에서 함께 작업했던 동지들이 함께 쇼치쿠를 그만두고 독립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에는 대형영화사들끼리 협정을 맺어 여타 영화사들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것 때문에 자기마음대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 일본에서는 영화를 찍는다는 게 영화사에 취직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영화를 못 찍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 TV라는 새로운 매체에 활로를 찾게 된다. 다음에 소개할 몇 개의 작품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그런 한편 대형 영화사나 TV에 의지하지 않는 자주 영화 상영 시스템의 확립을 목표로 해서 활동하면서 TV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한국에서 찍어두었던 아이들의 스틸을 통해 단편영화 <윤복이의 일기>를 완성시킨다. ATG의 중심 극장의 지배인이었던 긴시로는 극장 개봉이 필요했던 오시마와의 얘기를 해서 상영이 끝난 뒤, 밤에 극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레드쇼를 기획하게 되었고, 신주쿠 문화 레드쇼에서 오시마의 강연까지 해서 <윤복이의 일기>를 상영했다. 이후 영화를 오래 틀 수만 있다면 레드쇼만 해도 충분히 영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났고,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ATG를 통해서 배급을 한다는 루트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오시마가 다양한 시행착오를 하는 가운데 ATG의 영화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 한 편에서 오시마와 쇼치쿠의 관계도 개선되면서 외주라는 형태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때 만들었던 영화들은 당시의 스타들을 배우로 기용함으로써 상업성을 확보하면서 내용에서는 정치적인 특이성이 포함되어 있는 <일본 춘가고> <돌아온 주정뱅이>같은 영화다. 1963년에 <잊혀진 황금>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밝혀지는 전쟁에서의 일본의 책임, 한반도와 관련한 질문들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영화는 쇼치쿠의 아이돌 영화이면서도, 당시에 일본의 기원절을 부활시키려고 했던 것에 반대를 하고 검은 일장기를 등장시키고, 종군 위안부의 노래를 부르는 재일 조선인의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한에서 밀항해온 군인들과 학생들의 영화인 <돌아온 술주정뱅이>를 통해 동아시아, 일본과 한국, 그리고 베트남전을 결합시켜보여 주었고, 이들을 거쳐서 ATG 시절의 절정을 보여주는 <교사형>까지 이르게 된다. 그 영화는 68년이라는 시대적인 분위기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1968년의 상황에서 지지를 받으면서 칸에서도 상영되기로 되어 있었는데, 프랑스에서 상영하면서도 높이 평가 받고 배급도 된다. 당시에 세계적으로 알려졌던 감독들을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조구치 겐지밖에 없었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이러한 액츄얼하고 동시대적인 영화라는 맥락에서 오시마가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주목할 것은 세계적으로 오시마가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그의 실험적, 미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식민주의의 문제들을 제기하였다는 것, 일본에서 한국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 컸던 것 같다.


프랑스의 뉴웨이브가 알제리를 다루었고, 각국의 뉴웨이브가 식민지 문제 혹은 베트남의 문제를 그렸듯이 오시마는 한반도 문제, 그리고 동아시아의 문제를 그려냈다. 이를 통해 세계적인 동시대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겠다. <교사형>이후에도 오시마는 이러한 횡단적인 실험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영화가 <신주쿠의 도둑일기>. 이 영화에 등장했던 인물은 모두 실제의 인물들이었다. 학생 운동, 패션, 문화 등이 뒤섞여서 신주쿠라는 도시의 카오스를 필름을 통해서 표현해냈다. 세계적인 시간을 동시에 보여주면서도, 마지막에 실제 파출소 습격 장면, 이것은 실제 기록영상인데 이런 것을 막을 내리는 이 영화는 그 뒤에 오는 68, 69년의 폭동을 예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오시마 스스로는 예감의 영화라는 표현을 했었는데, 이 영화에 앞선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과 더불어 봉기를 예감하고 이로써 봉기를 호소하는 영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0 <도쿄전쟁전후비화>에서는 고등학교 영화 동아리를 그대로 출연시켰고, 시나리오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천재로 잘 알려져 있던 하라 마사토를 등용시켜서 포스트 68의 문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풍경을 통해서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 뒤에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일본의 권력 구조의 부조리를 보여준 <소년>이라는 작품도 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족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통해 쇼와시대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의식>, 오키나와 반환을 둘러싼 로드무비 <그 여름날의 누이>를 마지막으로 오시마는 창조사를 해산하고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그리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정치의 계절이 끝나고, 거기서 함께 싸웠던 감독들이 고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오시마도 예외가 아니었다. 68이라는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오시마, 창조사라는 것이 변형하게 되면서 그는 <감각의 제국>을 통해서 새로운 영화 시대를 시작하게 된다.

오시마 나기사라는 작가, 오시마 영화들은 작가주의, 혹은 영화사라는 관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만나고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역설적으로 운동의 결과를 그려내는 것은 지극히 영화적인 것이고 영화를 통해서만 그런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오시마 영화를 통해서 동아시아를, 전후 영화를, 일본을, 세계영화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오시마를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에도 동시대적이고 자극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서 잠재성을 발견하고 이를 확인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리: 우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