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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바캉스 서울/Review

오손 웰스의 '위대한 엠버슨가'

오슨 웰스의 두 번째 영화 <위대한 앰버슨가>(1942)는 가족 서사극이자 멜로드라마이며, 세기말 미국사에 대한 논평이고 문명사적 전환기에 대한 진단을 담은 대작이다. 비록 <시민 케인>(1941)의 후광에 가려 그만큼의 빛을 보지는 못했으나, 프랑수아 트뤼포를 비롯한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이 작품은 <시민 케인>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풍부한 만듦새를 자랑한다. 스물일곱 살 천재 오슨 웰스는 브루스 타킹턴의 1918년 원작 소설을 각색하면서 한 가족을 통해 역사의 흐름과 미국 사회의 변화를 읽어내려는 야망을 가졌던 것 같다.

“앰버슨 가의 화려함은 1873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오슨 웰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먼저 무대인 19세기 말 인디애나폴리스 지역 사람들의 삶의 풍습과 관례, 미덕과 재미를 소소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민속지적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도입부는 주인공인 앰버슨 가의 대저택으로 이동하면서 한 가족의 역사를 훑는다. 메이저 앰버슨의 딸인 이사벨은 과거 유진이라는 청년을 사랑했으나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들 조지를 낳는다. 천방지축으로 자란 조지가 대학을 다니던 즈음, 이사벨은 자동차 사업가이자 상처한 채 딸 루시를 홀로 기르고 있는 옛 연인 유진과 재회한다. 이사벨의 과묵한 남편 윌버가 타계하면서 앰버슨 가의 가세는 점차 기울어가고, 이사벨은 유진과 다시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지만, 아들 조지는 어머니의 새로운 사랑을 가로막으며 유진을 경계한다.

<위대한 앰버슨가>의 강한 흡인력은 무엇보다 생생한 캐릭터에서 나온다. 앰버슨 가의 망나니 아들 조지는 자신의 미래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이 부르주아적 삶의 쾌락을 마음껏 누리고자 한다. 이사벨은 몰락해가는 가문의 과부이자 까탈스러운 아들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사랑을 되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여기에 자동차 사업가이자 사랑의 쟁취자로 야심을 드러내는 유진, 그리고 조지와 밀고 당기는 관계를 맺는 유진의 발랄한 딸 루시가 조화를 이룬다. 나아가 이 캐릭터들이 변화하는 시대의 어떤 경향들을 상징한다는 점 역시 <위대한 앰버슨가>의 결을 윤택하게 만든다. 앰버슨 가문의 화려한 저택, 대학을 다니던 조지의 귀향을 축하하기 위한 웅장한 무도회 시퀀스, 무도회 다음날 주인공들이 새로운 발명품인 ‘말 없는 마차’를 시승하는 눈밭 시퀀스 등은 영화 미학적으로도 뛰어난 성취로 인정받아왔다. 버나드 허먼의 영화음악과 어우러지는 음향 효과 역시 시각적인 장치들 못지않게 주의를 기울이며 들어볼 가치가 있다.

<위대한 앰버슨가>의 이야기는 자유와 절제, 부흥과 몰락, 사랑과 이별, 기억과 망각, 전통과 문명, 퇴보와 혁신 등의 대립쌍을 풍부히 채집할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무도회 시퀀스의 한 대목에서 유진은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옛 기억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시간이 있을 뿐이죠.” 하지만 <위대한 앰버슨가>에서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오슨 웰스의 태도는 수긍이라기보다 연민이었던 것 같다. 제작사인 RKO가 최종편집권을 가져가는 바람에 1시간 가까운 분량을 잘라내고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뀌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만일 오슨 웰스의 디렉터스컷으로 완성되었더라면, 전환 시대에 대한 이 영화의 논평은 훨씬 씁쓸하고 데카당트한 것이 되었을지 모른다.

글/한선희(아트하우스 모모 시네마테크 사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