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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talk

[시네토크] 헝가리 영화의 다른 경향 - 유윤성 평론가에게 듣는 헝가리 영화사

시네토크

헝가리 영화의 또 다른 경향

 

유운성 평론가에게 듣는 헝가리 영화사

 

 

이번 ‘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특별히 두 명의 비평가가 참여한 ‘Unseen Cinema’ 섹션을 통해 여섯 편의 보기 힘든 영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 2일은 그 중 한명인 유윤성 영화평론가가 추천한 헝가리 영화 세편이 연이어 상영된 헝가리 영화의 날이었고, 마지막 상영작인 <또 다른 길> 상영 후에는 이 영화를 추천한 유윤성 평론가의 헝가리에 영화에 대한 강연이 이어졌다. 헝가리 영화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고 어떤 과정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는지, 또 헝가리 영화의 다른 경향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던 그 강연의 일부의 옮긴다  

 

 

유운성(영화평론가): 그 동안 한국에 알려졌던 헝가리 감독들은 미클로슈 얀초나 이슈트반 사보, 마르타 메사로슈, 벨라 타르 정도일 것인데, 영화 서적만 보더라도 헝가리 영화는 미클로슈 얀초의 영화를 둘러싼 논의 혹은 최근엔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벨라 타르에 대해 논의가 거의 전부다. 그래서 헝가리 영화라고 하면 대부분이 헝가리의 대평원 푸스타에서 사람들이 말없이 오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런 인상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실제로 헝가리 영화에 그렇지 않은 다른 경향이 있다. 오늘 본 영화 중 <신밧드> 같은 작품은 헝가리 영화사에서 중요하게 간주되는데, 미클로슈 얀초나 벨라 타르의 역사적인 우화 혹은 알레고리컬한 영화들하고는 다르다. 오늘은 그래서 이번에 상영된 작품과 감독을 중심으로 헝가리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와 헝가리 영화의 다른 경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상영된 개별적인 영화 내적인 이야기보다는 헝가리 영화가 어떤 식으로 진행됐고 어떤 과정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헝가리 영화는 아직도 한국에 폭넓게 소개된 적이 없어서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사실 헝가리 영화는 무성영화 시기 때 이미 굉장히 중요한 감독들을 배출했다. 1919년에 공산주의자들이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려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910년대에 무성영화를 이끌었던 감독들이 1920년대에 해외로 망명을 한다. 그리고 그 나라에 맞게 이름을 바꾼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마이클 커티스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미하일 케르테스가 있는데, 그는 <카사블랑카>(1942)로 유명한 감독이다. 미하일 케르테스는1912년에 <투데이 앤 투마로우>라는 헝가리 최초의 장편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무성영화 시기에도 수십 편의 영화를 만들었던 베테랑 감독이다. 또 다른 감독으로는 산도르 코르다가 있다. 그는 알렉산더 코다라는 이름으로 영국에서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으로 활동한 중요 인물이다.

1960년대로 넘어가면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헝가리에도 뉴웨이브의 물결이 불었다. 헝가리 뉴웨이브는 두 세대 감독들이 공존했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 1940년대 1950년대에 데뷔한 카롤리 마크, 졸탄 파브리, 미클로슈 얀초 같은 감독들이 있고, 1960년대 초반에 헝가리 영화학교를 갓 졸업하고 데뷔해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 이슈트반 사보, 졸탄 후스자릭, 가보르 보디 같은 감독들이다. 이 두 군이 헝가리 뉴웨이브를 이끌었는데, 국제적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헝가리 영화를 대표하는 인물은 <검거>의 미클로슈 얀초다. 그의 영화는 역사적인 우화와 알레고리적인 형식에 사회정치적인 언급을 담아내는 헝가리 영화의 계보를 만들게 된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사이의 영화들은 보면 얀초적인 역사 우화 형식의 영화들이 꽤 많다. 그래서 1970년대 헝가리 영화의 또 다른 새로운 물결은 얀초적인 미학에 반발하면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클로슈 얀초가 1960년대 헝가리 영화를 국제적으로 인지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를 받는다면, 이런 미학에 대안을 제시했다고 평가 받는 사람은 <신밧드>의 졸탄 후스자릭이다. 그의 영화들을 보면 물리적인 시간과 의식적인 시간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긴장이 강하게 드러난다. 후스자릭의 영화는 학생 시절의 영화에서 벗어나면서 얀초 같은 사회정치적 논평이 탈각되며 훨씬 더 형이상학적이고 영화 자체에 대한 탐구로 간다. 그의 영화는 헝가리 실험영화의 시적인 경향을 만들어낸 영화로 평가를 받고 <신밧드>에 와서는 그런 실험들이 폭발적으로 드러난다. 후스자릭이 만들었던 영화들이 얀초 이후에 영화를 고민하는 사람들한테 아이디어를 줬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렇듯 얀초의 역사적인 우화 영화들이 국제적인 명성을 높여가는 동안에 이미 헝가리 내에서는 얀초에 대한 반발이자 대안으로 다른 영화 형식들을 모색했다.

졸탄 후스자릭 외에도 이런 반발을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옮겼던 가보르 보디라는 감독이 있다. 그리고 가보르 보디 같은 경우는 벨라 발라즈 스튜디오에서 아방가르드 영화 부서를 만들어 이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그 당시에도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헝가리 감독이었고, 지금도 그의 인터뷰와 발언들과 글들이 꽤 남아 있다. 이 사람이 특이한 건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고 데뷔한 감독인데 영화가 변화하고 있던 시기에 출현한 감독이다. 이는 필름이라는 게 유일한 매체일 때 시작한 감독이 아니라 영화가 다른 텍스처를 가진 매체로 만들어질 수 있는 비디오 시대에 데뷔한 감독이라는 말이다. 그는 새로 등장한 비디오라는 매체와 전통적인 필름 메이킹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긴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무성영화에 대한 애착, 새로운 미디어, 비디오라는 매체의 표면과 스크린의 표면과의 차이에 굉장히 민감했다. 영화라는 것의 형식적이고 미적인 가능성을 밀고 나가는 데에 있어서는 헝가리 영화계에서 배출한 최고의 감독이다.

 

얀초적인 미학에 대한 반발은 1970년대에 크게 두 갈래로 나타난다. 어느 쪽이건 간에 1970년대에 다른 방식의 헝가리 영화를 모색하던 감독들이 벨라 발라즈 스튜디오에서 활동하던 감독들이다. 원래 벨라 발라즈 스튜디오는 친목을 위한 클럽으로 시작했다가 장비들을 들여놓으면서 운영 자체가 필름메이커의 조합 같은 형태가 됐다. 이 스튜디오는 국가적인 검열 없이 적절한 예산 내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굉장히 자유롭게 찍을 수 있는 기회를 감독들에게 줬다. 졸탄 후스자릭과 가보르 보디, 벨라 타르 등도 벨라 발라즈 스튜디오에서 활동했던 감독이다. 벨라 발라즈 스튜디오는 공식적인 간섭 없이 어느 정도 주어진 예산 내에서 실험적인 영화를 찍을 수 있게 했고, 상업적인 고려와 동시에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 놓았다. 이런 운영 방식을 보면 당대 젊은 감독들에게 이 스튜디오가 어떤 기능을 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시기에 졸탄 후스자릭과 가보르 보디 같은 감독들과 벨라 발라즈 스튜디오에서 교류를 쌓고 영화를 꿈꾸고 만들던 사람,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동료들이 그렇게도 극복하고자 했던 얀초의 미학을 독창적으로 해석해 국제적인 무대에 나온 사람이 벨라 타르다. 그래서 벨라 타르의 영화를 보면서 얀초의 영화와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건 일면적인 평가다. 겉보기엔 벨라 타르의 영화가 얀초와 비슷하다고 생각될 지 모르지만 영화를 만드는 태도는 자기의 동시대 감독들과의 경험에서 가져오는 것이고 그들의 꿈도 함께 들어가 있다. 또한 그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미학들을 다시 현대적인 형식으로 부활시킨 점도 있다. 하지만 벨라 타르는 영화를 중단했다. 헝가리 영화계는 영화사 초기에는 망명으로, 모더니즘 이후에는 자살과 죽음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중단으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정리: 최혁규(관객에디터) | 사진: 이유정(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