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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우리 시대의 프랑스 영화 특별전

[시네토크] 고다르 '필름 쇼셜리즘' 상영 후 김성욱 평론가 강연

절망적인 가운데 어떤 희망의 지점

 

지난 12월 6일 장 뤽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 상영 후,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고다르가 이야기하는 표현의 자유, 소유권, 디지털, 이미지, 영화에 대한 이 날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영화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게 무슨 얘기지?’ ‘곧 알게 될거야.’ 3부에선 ‘바르셀로나가 우리를 환대할 것이다’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약간 미래식으로 주어져있다. <필름 소셜리즘>이라는 영화 안에 ‘필름’과 ‘소셜리즘’ 은 없다. 영화의 모든 이미지들은 디지털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형으로 얘기하는 부분은 있지만 소셜리즘 그 자체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없다. 필름과 소셜리즘은 이미 20세기에 지나가버린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향수를 그리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것은 알게 될 것이거나 환대하게 될 것이며, 미래에 놓여있다고 생각된다. 2부의 마르탱 가족의 이야기에서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선거에 나갈 수 없다고 말하자 재밌는 얘기를 한다. 나중에 프랑스 부채의 30%는 아이들이 다 짊어지게 될 텐데 왜 아이들은 선거를 할 수 없느냐고 이야기한다. 미래형의 형태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아이들이 갖고 있는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들이 계속 얘기하는 것이 ‘be동사를 쓰는 사람과 이야기하지 마라’이다. 그것은 존재형으로서의 지금의 아이, 입후보의 권리도 없고, 선거도 할 수 없는 그 안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표현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들은 현재엔 아니지만 미래를 짊어지게 된다. 존재형으로서는 여기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성의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은 이런 ‘아이’라는 생각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표현과 권리의 문제들이 있다.

먼저 디지털 시대로 갈수록 표현의 자유가 없어진다는 표현이 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직전의 고다르의 행보를 보면, 표현의 자유, 디지털, 소유, 소셜리즘과 관계된 부분들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 프랑스 사회 내에서 아도피법이 논란이 되었다. 인터넷 상에서 불법으로 다운로드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으로, 이 법이 올해 프랑스 대선에도 논란이 되면서 올랑드 후보의 경우 ‘문화적 예외 2막’을 선언하면서 이 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겠다는 선거공약을 내세웠고, 당선이 됐기 때문에 이 법은 아마 폐기될 가능성이 있다. 고다르 역시 이 아도피법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많이 했었고, 그러한 뉘앙스가 이 영화의 마지막에 삽입된 FBI 경고 문구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한 청년이 엄청난 양의 MP3 파일을 다운로드해서 재판에 기소된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청년에게 고다르가 재판비용에 사용하라며 돈을 붙였다고 한다. 상징적인 돈이다. 고다르는 인터뷰에서 필름의 소셜리즘이라는 것은 지적 소유권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기도 했었다. 물론 액면 그대로 모든 저작권을 부정해야만 예술적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말하는 저작권에 대한 부정성은 몇 가지 의미가 있다. 고다르는 예술가에게는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무만 있을 뿐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했다. 또한 작품의 권리는 예술가가 갖는 것이 아니다. 고다르는 프랑스영화사 100주년 기념작품에서도 그런 말을 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멜리에스 영화를 복원해 상영하려고 했을 때, 멜리에스의 후손들이 저작권을 주장하면서 엄청난 돈을 요구했었고 이에 대해 고다르는 비난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떤 이미지를 다른 사람들이 가져다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작권의 문제로 인해 타인의 이미지를 가지고서 예술가가 재창작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게 된다. 고다르와 같이 이미 50~60년대부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남의 영화를 보고 남의 영화를 무차별적으로 인용한 작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카피에 대한 것, 농담처럼 얘기하는 것이지만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는 입장인 것이다. 소유권에 대한 강고한 설정에 대해 고다르는 아주 부정적인 입장이다. 필름과 소셜리즘이 연결되어지는 지점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이런 저작권과 관련된 부분이다.

 

 

동시에 몇 가지 지점들이 더 있다. 이를테면 모든 이미지가 디지털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특히 1부는 고다르의 이전 작업들과 어느 정도 연결점이 있어 보이는 2,3부에 비해 이미지도 굉장히 다르고 이미지들의 연결 방식도 굉장히 다르다. 복잡다단한 이미지들이 무차별적으로 아무 연관성 없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1부에는 비교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모든 장면들이 하나와 다른 하나 사이의 연결점이 전혀 안 보인다. 이미지의 연결에서 몽타주적 감각이 전무하다. 1부의 이미지는 최소한 5,6명 정도의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찍은 것 같은데, 핸드폰에서 고화상 카메라까지 여러 다양한 디지털 장비로 찍은 것이다. 음식을 먹고, 춤을 추고, 수영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찍은 이미지들은 대체 누가 찍는지, 그리고 왜 찍는지,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모호한 형태로 촬영되어 있다. 말하자면 디지털적인 세계로서 구현된 현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1부에 대해 자본주의의 풍경을 담아낸 이미지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첫 대사에서 말하듯 돈은 공공재이고 그런 의미에서 물 같은 것이라면, 지중해의 크루즈라는 것은, 공공재라고 하는 물 위에 떠 있는 자본주의이며 이 자본주의는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것이 1부와 3부를 연결하는 것 같다. 크루즈라는 하나의 거대한 배 안에 다국적의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그들 전체가 모두 엑스트라처럼 등장한다. 이 배는 <타이타닉> 같은 배가 아니다. <타이타닉>은 위와 아래를 계급적으로 분리시켜놓고 그 분리된 계급성을 드라마로 구성한다면 이 영화는 그러한 위계성 자체를 철폐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인물들의 중심성, 주체가 대상을 찍는 관계의 중심성, 이미지의 위계성이라는 것이 없다. 이미지의 위계가 없다는 것은 디지털이라는 것 안에서 모든 이미지들을 무차별적으로 배치했다는 것이다. 디지털은 모든 이미지를 무차별적인 평등성 안으로 집어 넣어버린다. 이것은 누가 찍는가의 기원도, 근원도 존재하지 않는 무차별성이다. 드팔마는 <리댁티드>라는 영화를 찍을 때, 모든 장면을 영화에 등장하는 군인이 들고 다니던 캠코더로 찍은 영상과 CCTV 영상을 수평적으로 연결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방식으로 찍혀진 이미지들이다.

이 영화에는 그럼에도 인간적인 개입이 있는 촬영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사진이다. 디지털적으로, 동영상적으로 구성되어있는 이미지들은 평등한 형태의 무차별적인 이미지로 구성되는데, 그 행위 내부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손이라는 것을 빌어 구성해나가는 측면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영화 안에서 사진과 동영상 간의, 촬영한다는 것과 이미지로 구성되어져 있는 것 간의 충돌성이라는 지점이 있다. 3부에서 팔레스타인 작가에 의해 사진과 관련해서 팔레스타인에 언제 처음 사진이 등장하게 됐는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어떤 이미지를 찍는다는 것, 고유의 무언가를 촬영한다는 것, 그것이 갖는 보편화된 이미지에 대한 저항성의 측면이 사진과 관련해 등장하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부의 디지털 이미지는 위계성이 없어 평등해 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무차별화시키는 지점 안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글로벌화라는 것이 부각되고 있다. 고다르는 자주 ‘국가의 꿈은 하나이고, 개인의 꿈은 둘이 마주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국가는 하나를 원한다. 국경의 철폐라는 것, 지금으로 말하자면 신자유주가 극단적으로 일자를 추구해나간다. 국가가 하나를 꿈꾸는 반면 둘을 원하는 개인들의 꿈, 그것은 사랑을 원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개인으로서의 둘을 전제한다. 게다가 국가라는 말이 불어에서는 존재라는 것과 연결된다. be동사를 쓰지 말라고 하는 건 국가로서의 하나라는 존재로 전제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유럽의 위기라는 것이 지중해에 떠있는 크루즈호라는 설정 안에서 최근의 그리스 위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의 위기와 유럽의 문명적 위기라는 것이 1부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아마도 스페인 내전 당시에 사라진 황금에 대한 이야기와도 연결되고 있다. 유럽사회 내에서 고다르가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 보자면 프랑스 혁명, 그리스적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또 하나가 스페인이다. <작은 병정>을 만들 당시 고다르는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겐 스페인 인민전선의 투쟁도 없다. 우리는 전쟁과 박물관의 자식일 뿐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스페인 인민전선을 언급하면서 언제나 회답처럼 나오는 것이 앙드레 말로다. 말로가 스페인 내전과 관련해 썼던 책의 제목이 ‘희망’이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스페인 내전을 얘기하면서 ‘필름’과 ‘소셜리즘’이 없는 가운데 기다리게 하는 것이 희망일 것이다.

고다르와 절친한 사이인 알랭 베르갈라의 표현에 따르자면, <필름 소셜리즘>은 가장 절망적인 영화이다. 아무것도 없고, 뭔가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어떤 희망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희망의 한 지점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들이다. 고다르 영화 중에 이렇게 동물이 많이 나오는 영화는 처음인 것 같다. 특히 2부에 등장하는 라마가 특이하다. 알랭 베르갈라는 고다르의 현재의 위치가 이 라마 같다고 말한다. 라마는 원래 유목적인 동물인데, 이 영화에서는 언제나 묶여있고, 움직임이 없다. 대신 귀만 쫑긋 세우고 사람들 주변에 있다. 마치 라마처럼 고다르가 스위스의 자기 집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듣고 있는 그런 예술가적 위치를 얘기하는데 그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 고다르의 영화에서 동물과 아이의 등장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영화의 1부에는 사실 대화라는 것이 없다. 말은 있는데, 일반적인 의미에서 A컷과 B컷으로 대화가 연결되는 씬이 없다. ‘사상은 우리들을 나누고, 꿈은 우리들을 합친다’는 대사가 나온다. 고다르는 이 영화로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얘기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꿈이 우리를 합치게 만든다고 말한다. 사상, 이데올로기는 다 언어에 기초해 있는데, 이 영화에는 언어에 대한 부정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아이와 동물은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그들은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되는 언어 이전의 언어로 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 이후에 고다르가 만들고 있는 영화의 제목은 <안녕, 언어여>이다. 인간적 대화라고 하는 것이 갖는 불충분성과 어려움이라는 것을 넘어서는, 다른 언어의 방식으로서의 대화, 소통 혹은 관계 맺기. ‘하나 안에 또 다른 타자가 있고 타자 안에 또 다른 하나가 있어서 결국 우린 셋이다’라고 대사, 또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감명 깊게 들었던 ‘진보는 우리들을 타자에게로 이끈다’는 표현이 있다. 마찬가지로 동물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목인 필름과 소셜리즘은 영화 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뭔가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절망적인 느낌도 있지만 그럼에도 말로의 책의 제목을 빌어 어떤 희망의 지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알게 될 거야, 도래하게 될 거야, 라는 것이 영화이거나 소셜리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 사진: 정지은(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