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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없이 감상하자 - <부기 나이트>

[폴 토마스 앤더슨 35mm 필름 투어]



모자이크 없이 감상하자

- <부기 나이트>




 

<부기 나이트>의 국내 개봉(1999.3.20) 당시 엔딩 장면에서 더크 디글러(마크 월버그)의 성기를 모자이크 처리하게 한 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처사는 폭력이었다. 모든 영화가 대표작이자 마스터피스라고 할 수 있는 폴 토마스 앤더스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 <부기 나이트>(1997)는 제도권에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공동체를 형성해 유사 가족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밟는다. 제도권의 상식은 종종 보기 좋은 것을 상수에 두고 그렇지 않은 것을 골라내어 나쁜 것 혹은 쓸모없는 것 취급해 경계 밖으로 쫓아내고는 한다.


더크의 경우를 들어 설명해 볼까. 원래 이름은 에디 아담스. 공부 대신 나이트클럽 주방 아르바이트에, 동급생 여자와 잠자리를 나누는 게 엄마에게 들통난 17세의 소년은 호된 질책을 받고는 집을 나온다. 갈 곳 없는 그를 받아주는 건 포르노 영상물 업계에서 거장 대접을 받는 연출자 잭 호너(버트 레이놀즈)다. 에디가 남다른 아랫도리의 소유자임을 간파한 잭 호너는 성인물 배우로 데뷔를 권유한다. 부모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에디는 유일한 재능을 뽐낼 기회를 얻자 그 즉시 업계의 ‘빅’스타로 ‘발기’한다.



엄마가 알지 못하는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며 집을 나온 에디, 아니 더크는 엄마를 향한 복수심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엄마를 대신해줄 앰버(줄리언 무어)와 유사 모자 관계를 맺고 연출자로 만난 잭 호너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롤러 걸(헤더 그레이엄)과는 남매처럼 격의 없이 지낸다. 이들을 한곳에 모아준 건 성인물이지만 더 중요한 감정은 외로움의 빈틈을 메워준 사랑이다. 더크와 마찬가지로 잭 호너의 주변을 원으로 두른 앰버, 롤러 걸, 버크 스워프(돈 치들), 리틀 빌(윌리엄 H. 머시), 스코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아픈 과거의 기억이 있거나 괴로운 현실에 처해 있다.


근데 왜 하필 포르노이냐고? 섹스하는 광경을 비디오로 찍으면서 웬 사랑에, 가족 타령이냐고? 이들이 성인물에 종사하는 건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쉽게 돈을 벌기 위한 선택이 아니다. 더크에게, 엠버에게, 롤러 걸에게, 버크 스워프에게, 리틀 빌에게, 스코티에게 성인물은 당당한 돈벌이였고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장이었으며 아픈 과거를, 괴로운 현실을 공유하며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가족과 같은 공동체의 개념이었다.


잭 호너가 더크를 발굴하고 앰버와 롤러 걸에게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서 카메라는 더크의 시점을 대체하면서 종종 그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 독립적인 한 사람의 시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때의 시점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이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극 중 인물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설정이다.



선택한 업종이 포르노라는 게 특별할 뿐 일희일비하는 일상은 이들을 루저 내지 별종으로 바라보는 제도권의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삶의 주기라는 것은 성공과 실패의 중간 단계를 주로 유지하는 가운데 위로 살짝 올라가기도 아래로 단번에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부기 나이트>가 성인 영화의 인기가 절정에 있던 1970년대 후반과 비디오의 출현으로 극적으로 침체한 1980년대 초반을 극 중 배경으로 잡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성공의 달콤함에 빠져 스며드는 쓴맛을 감각하지 못하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지나간 세월을 후회하고는 한다. 이에서 중요한 건 새 출발의 다짐이다.


17세의 문제아에서 포르노의 빅스타로, 스포츠카의 주인에서 남의 돈이나 훔치는 약쟁이로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탄 더크 디글러는 잭 호너를 찾아 다시 재능을 살리기로 한다. 오랜만의 신작 출연을 앞두고 의지를 다지기 위해 거울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물건’을 꺼내 바라보며 용기를 얻는다. 그런 중요한 장면의 성기를 모자이크 처리했다? 그로 인해 아픈 기억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여, “폴 토마스 앤더슨 35mm 필름 투어”에서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없는 더크 디글러의 전설적인 ‘그것’을 노 모자이크로 감상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지 아니한가!

 

허남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