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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서울아트시네마 개관 10주년 기념 존 카사베츠 회고전

[리뷰] 존 카사베츠의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

카사베츠의 예술적 진화

 

1976년 <영향력 있는 여자>로 아카데미시상식 감독상 후보로까지 지명되었던 존 카사베츠는 휘황했던 전작의 성공을 뒤로 하고 혁신을 위한 도전으로 기운다. <영향력 있는 여자>의 박스오피스 성공을 업고 카사베츠는 직접 투자, 제작한 영화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이하 ‘<차이니즈 부키>)을 발표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영화에 대한 시장과 평단의 반응은 냉담했고, 카사베츠 역시 영화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카사베츠는 영화의 흠결을 개선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노력, 비용을 지출했다. 결국 134분 이었던 1976년 오리지널 판본은 1978년 108분 길이의 재편집판으로 재개봉하였다. 재편집된 <차이니즈 부키>는 카사베츠의 시각적 스타일을 가장 풍부하게 구현하고 있었고, 내용적, 형식적 진화를 엿볼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다.

이야기는 ‘크레이즈 호스 웨스트’라는 스트립 클럽의 소유자이자 도박사인 코스모 비텔리(벤 가자라)라는 인물에 초점화되어 있다. 도박 빚으로 갱단의 겁박에 시달리던 코스모는 빚을 탕감하기 위해 자신의 클럽을 넘기는 대신 차이나타운의 거물 중국인 마권업자를 살해하라는 갱단의 제안을 받는다. 갈등 끝에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부상까지 입은 채 임무를 마치지만 이번에는 갱단들이 코스모의 목숨을 노린다.

표면적으로 갱스터 누아르의 장르 서사를 따라가지만 <차이니즈 부키>는 카사베츠의 정체성이 투사된 자기반영적 영화이다. 영화 안에서 그는 범죄 세계와 다를 바 없는 쇼 비즈니스계의 압박 하에서 살아가는 창조적 감독의 처지를 코스모의 상황에 융해시킨다. 카사베츠 영화의 인물들처럼 주인공 코스모 비텔리는 자신의 삶을 사는 예술가처럼 보인다. 코스모의 주체적 경험을 영화의 표면으로 침투시키기 위해, 카사베치는 대담한 형식의 모험을 시도한다. 조명과 프레이밍, 음악, 카메라 스타일은 독창적이고 풍부한 스타일을 구현한다. 표현적인 조명효과와 중심인물을 옹립하는 프레이밍, 코스모의 인물 됨됨이를 환기하고 그의 심리 상태를 형상화하는 시청각적 기교들이 동원된다.

몇몇 장면들은 잊을 수 없는 강렬함을 남긴다. 청부살인을 사주하는 갱들과의 대화 시퀀스, 목표물을 제거한 코스모가 중국인 갱들의 소굴에서 빠져나오는 시퀀스, 코스모가 자신을 찾아온 암살자들을 차례로 제거하는 시퀀스 등에서 신경증적인 핸드헬드, 강박적인 프레이밍, 빛과 그림자의 패턴은 코스모를 흡사 유령과 같은 형상으로 변형시킨다. 대담한 클로즈업과 정형화되지 않은 편집의 리듬, 표현주의적 조명, 프레이밍 효과는 시청각적으로 탁월한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다.

<차이니즈 부키>는 1970년대 카사베츠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준다. 바로크적인 시각적 스타일로 구현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슬을 해쳐가는 한 남자의 엑조틱한 모험은 한 편의 주관적인 판타지처럼 묘사되고 있다. <프렌치 커넥션>과 같은 1970년대 범죄 영화의 경향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차이니즈 부키>는 인디 작가로서 존 카사베츠의 예술적 진화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장병원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