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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시차 - 동시대 영화 특별전

[리뷰]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삶의 가치 - <안개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삶의 가치

-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안개 속에서>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러시아 감독(정확한 출신을 밝히자면 좀 복잡하다)인 세르게이 로즈니차는 알렉산더 소쿠로프가 그랬던 것처럼 오랜 시간 동안 탁월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펼치며 명성을 얻다 극영화를 병행하게 된 인물이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러시아의 현실 풍경과 역사에 천착했던 그는 장편 드라마로 옮겨 오면서 변화를 택했다. 그런데 변화라는 말을 하기에는 조금 망설여지는 점이 없지 않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도 일관된 스타일을 추구하기보다 다양한 면모를 보였던 그는, 프랑스의 한 평자가 쓴 것처럼 ‘지금 영화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 중 한 명’인 까닭이다. 다큐멘터리와 장편 데뷔작 <나의 기쁨>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풍자와 여유가 넘치던 그는 <안개 속에서>에선 사뭇 다른 표정을 짓는 쪽이다. 예기치 못한 삶의 방향이나 삶에 있어 도덕과 선택의 문제를 주제로 삼은 <안개 속에서>는 일면 러시아 문학의 고고한 전통 아래 선 듯 보인다.


바실 비코프가 1989년 발표한 소설을 각색한 <안개 속에서>는 나치 점령기의 벨라루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또’ 나치에 희생당한 영웅에 관한 지겨운 이야기 아니냐고? 대답은 일부는 ‘예스’고 일부는 ‘노’다. <안개 속으로>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세 남자를 길게 따라가는 쇼트로 시작한다. 때가 잔뜩 묻은 옷, 그리고 고문을 당해 피가 말라붙은 뒤통수. 하지만 영화는 그들 중 누군가 내뱉는 마른 숨소리 한 마디만 들려줄 뿐, 정작 그들의 목이 매달리는 장면을 화면 바깥으로 돌린다.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덤덤하게 그것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이 오히려 감정을 자극한다. <안개 속에서>는 그들의 죽음과 관련된 수셰냐란 인물과, 그를 죽이라는 명을 받고 도착한 빨치산 뷰로프와 보이틱이 맞닥뜨린 세 가지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사건은 예상했던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40분 가까이 시간 순으로 전개되던 영화는 세 남자의 사연을 각각 전하면서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고 플래시백을 빌려 숨겨진 진실들이 불려 나온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을 떠나 빨치산이 된 뷰로프, 선로를 보수하는 동료들(영화의 도입부에서 공개처형당한 사람들이다)의 사보타주 계획 때문에 갈등했던 수세냐, 두려울 때마다 도망치면서 살아온 보이틱. 그들의 과거는 그들의 미래를 예언하는 거울이 된다. 죽음을 각오한 자는 살고, 그를 죽이려고 했던 자는 죽는 아이러니에서 보듯, 삶은 우리가 의도했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안개 속에서>가 결국 이야기하려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제각기의 삶이 지니는 가치다. 죽음을 포함해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으며, 그 가치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설령 안개 속이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데는 거울이 필요 없는 법이다.



이용철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