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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 talk

"가장 애착이 가는 영화다"

2월 작가를 만나다: 장현수 감독의 <라이방> 상영 후 시네토크

지난 19일 저녁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맞아 '2001년의 기억!'이란 제하로 마련된 특별한 작가를 만나다가 열렸다. 이달의 주인공은 <라이방>을 연출한 장현수 감독. 특히 이 자리에는 특별한 손님들도 함께했다. <라이방>의 주연배우들이 10년 만에 다시 상영되는 영화를 관객과 함께 보며 영화에 대한 소회를 나누기 위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은 것이다. 따뜻한 영화 <라이방>의 감동이 여전히 남아 있는 가운데 감독, 주연배우들과 함께한 그 특별한 시간을 여기에 전한다.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라이방>은 개봉했을 당시 1만 명 정도의 관객을 모으는데 그쳤지만, ‘와라나고 운동’이라고 해서 이 영화가 극장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로 나갔다는 점에서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와라나고 운동’에 대한 소회가 궁금하다.
장현수(영화감독): 특이하게도 2001년에 훌륭한 저예산영화들이 ‘와라나고’(<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이렇게 네 작품이나 나와서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가 됐다. (웃음) 다른 이야기지만, 십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배우들이 연기를 참 잘했고, 연출자로서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연기였다고 생각된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연출적인 부분보다도 배우들에 대해 더 많은 얘기가 오갔으면 한다.

허남웅:
<라이방>은 배우분들에게도 애착이 많은 영화로 알고 있다.
조준형(배우): 요즘은 디지털로 영화를 많이 만들지만 이 영화는 필름으로 만든 영화다. 배우나 감독들에게는 필름영화에 대한 집착이 있다. <라이방>은 예산 문제로 필름을 3만자정도 썼다. 그래서 최대한 NG를 내지 않기 위해서 항상 많이 긴장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라이방>은 영화촬영 전에 연극을 통해서 이미 너무나 많은 연습을 해서 연기하는 데에 있어 막상 영화를 찍을 때는 감정이 휘발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연기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하면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김해곤(배우·영화감독): 이 작품을 할 때 개인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감독님이 이 영화를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해서 서로 모여 대본을 리딩을 하는데 너무 못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연극<라이방>을 먼저 올리게 됐다. 현장에서 감독님이 연기에 대해 디렉팅을 하실 때 배우는 늘 호흡을 길게 가다보니, 감독님은 매번 짧게 끊으시더라. 감독님이 ‘짧게’를 요구하실 때 마다 배우로서 좀 답답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편집본을 보고 나니까 감독님의 지시가 이해가 갔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장현수: 김해곤씨는 이제는 충무로 감독이 되셨다. 몇 번 연출을 해보고 나니 아마 감독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이승진(배우): 앞으로도 배우활동을 하겠지만, <라이방>은 이제껏 해온 연극·영화·뮤지컬을 통틀어 스스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작품이다. 개봉한 지 십년이 지난 후에 이렇게 다시 관객과 만난다는 게 쉽지 않다. 당시 많은 평론가들이 <라이방>을 그해 최고의 영화로 꼽았었다. 당시에 어느 학생의 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수능시험을 못보구서 자살까지 생각했던 어느 학생이 정말 우연히 극장에서 <라이방>을 봤는데 관객은 자기뿐이었고, 영화를 보고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그 학생의 글을 보고 뿌듯했다. 백만, 천만 명의 관객이 보는 것보다도 뿌듯했다. 개인적으로 정말 소중한 영화이다.

허남웅:
장현수 감독님은 <라이방>을 만드시기 전까지는 주로 액션영화들을 만들어오셨는데 전혀 다른 성향을 영화를 만드신 게 아닌가 싶었다. <라이방>을 만드시게 된 계기는?
장현수: 액션영화들을 계속 만들다가 마지막으로 <남자의 향기>를 만들었는데, 당시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도 실패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만들기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 나와 비슷한 연배의 다른 감독들은 무얼 하고 있나 궁금했다. 그런데 오히려 다들 더 큰 상업 영화들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인생에 남을 만한 영화, 가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허남웅: 배우분들이 자신들의 본명 그대로 출연하고 있다. 배우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연기를 할 경우 분면 다른 지점들이 있을 것 같은데.
조준형: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이다보니 아무래도 부담감이 크다. 본명으로 연기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발견해야하는, 어려운 질문들을 가지고서 작품에 참여했다. 지금 다시 보니, 흉내는 나의 모습을 가지고 냈지만, 부족한 면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승진: 당시 작품을 만들면서 감독님 뿐 아니라 배우들 모두 영화에 나오는 그대로 살았다. 그래서 몰입해서 충분히 재밌게 영화를 찍었던 것 같다.
장현수: 여기 이 배우들을 모두 정말 좋아한다. 당시엔 다들 아직 이름이 알려지기 전이었다. <라이방>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유명 배우들을 캐스팅할 수도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조준형, 김해곤, 최항락 이 세 사람만 떠올랐다. 그들이야말로 이 영화의 택시기사들처럼 생각됐다(웃음).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상황 말이다. 그래서 연기를 주문할 때, 이를테면 준형의 캐릭터는 내가 아는 조준형만큼만 연기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배우들은 배우들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나다운 것’과 감독이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보니 고생을 많이 했다.



허남웅: 장현수 감독님과 <라이방>을 작업하면서 에피소드들이 많이 있었을 것 같다.
김해곤: 나는 슬렁슬렁 연기를 하는 편이었는데 감독님이 혼을 많이 내셔서 많이 힘들었다. 원래 영화에서의 모습처럼 그렇게 살찐 편이 아니었다. 감독님이 데리고 다니시면서 계속 먹이셔서 당시 8킬로그램이 쪘는데, 그 몸무게가 아직도 빠지지 않고 있다. (웃음) 그때 당시에는 많이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조준형: 다시 보니 그 때보다 지금이 머리숱이 더 많다. 당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웃음) <라이방>은 프리프로덕션까지 포함해서 4년이 걸렸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했기 때문에 10년 동안 끈질기게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가 되고, 연극도 크게 성공하고, 이렇게 회고전을 통해서 관객들과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것 같다.
이승진: 당시 정말 행복했다. 학교를 갓 졸업하고서 좋은 선배 배우분들과 함께 작업 한다는 게 마냥 행복했다. 어느덧 10년 후에 당시 형님들 나이가 되고 보니 저도 당시 형님들 못지않게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다.(웃음) 그 때의 경험이 많은 도움과 자양분이 되어 준 것 같다.

관객1: 영화를 찍으시기 전에 연극을 먼저 올린 것과 택시기사라는 직업의 설정,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개에 대한 설정이 궁금하다.
장현수: 처음에 시나리오가 나오고 1년쯤 연습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제 맘에도 안 들고 연기자들 스스로도 만족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영화를 한 여름에 찍었으면 했는데, 그전에 마침 부산에서 연극무대 기회가 생겨서 영화 촬영 전에 한달 반 정도 먼저 연극을 하게 됐다. 택시기사는 굉장히 쉽게 설정됐다. 그 나이에, 친구가 소중하고, 그늘을 찾아다닐 나이, 그 나이가 되어 뭔가 다른 새로운 걸 할 수 없기에 꼼짝 없이 현실에 붙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개에 관해서는 시퀀스 하나를 아예 들어낸 것이 있다. 최상무가 도망가고 나서 하소연할 곳도 없는 세 사람이 자기들만 보면 짖는 것 같은 강아지에게 몰려가 분풀이 하려는 장면을 설정했었다. 그 장면에 애니메이션을 같이 넣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통째로 그 장면을 빼게 되었다.

관객2:
영화를 정말 재밌게 봤다. 영화를 보면서 인간의 순수성을 놓치지 않으시는 감독의 모습들 느낄 수 있었다.
장현수: 고맙다. 스스로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상업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진짜 하고싶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한 것이다.  


허남웅:
연기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얘기를 나눠보니 연극과 스파르타씩 디렉팅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배우들의 애드립도 많았는지?
조준형: 감독님이 배우들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연기를 할 수 있는 가장 큰 베이스가 된 것 같다.
김해곤: 연극을 할 때는 감독님이 거의 터치를 하지 않으셨지만 영화를 할 때는 굉장히 긴장해서 치열하게 작업했다. 준형씨는 감독님이 편애하셨는지 모르겠지만(웃음), 저는 원래 성격이 장난도 자주 치고 하는데, 감독님이 영화 작업하실 때는 엄숙하셔서 어렵게 했던 것 같다.
이승진: 당시에 영화를 보고 많은 분들이 배우들이 애드립을 잘한 것 같다고 하셨는데 사실 당시 애드립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연극을 할 때 대사를 안 외우고 자연스럽게 애드립으로 했던 것들을 모으고 다듬어서 영화 대본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따로 애드립을 하지 않았다.

관객3: 영화의 계절이 여름이고 인물들이 떠나는 곳도 베트남인데, 계절의 설정에 대해 궁금하다.
장현수: 처음부터 이 영화는 한 여름에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택시기사들에게는 여름이 아주 고역이다. 그늘을 찾아간다는 설정에도 여름이라는 계절이 적당했다.

허남웅: <라이방>이라는 제목도 재미있고 의미가 큰 것 같다.
장현수: 처음 제목은 ‘농담’이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끊임없이 허튼 소리하고 농담하면서 시간 떼우고 하는 그런 사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제목으로 쿤데라의 소설이 나온 것을 보고 그 제목을 포기하고 고민을 하던 차에, 택시기사들이 쓰는 썬글라스를 떠올렸다. 택시기사들이 가장 많이 끼는 게 ‘라이방’이기도 하고, 영화 대사에도 나오지만 나를 가리고 싶고, 어딘가 숨고 싶은 마음을 떠올리며 소심하고 나약한 소시민 설정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허남웅: 배우의 입장에서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특별히 마음에 와닿은 것이 있다면?
김해곤: 감독님이 말씀하시면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웃음) 나중에 대본을 다듬어가는 과정을 보니까 너무나 쉽고 명쾌하게 정리되는 부분들이 좋았다.
이승진: 시나리오가 물론 좋았지만, 학교를 막 졸업하고서 장현수감독님 영화에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감독님이 승진역할을 두고 많이 고민하셨다고 들었다.
장현수: 승진역할을 위해서 오디션을 많이 봤지만 딱히 맘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촬영 날짜가 다가오면서 어느 날 승진이 찾아왔는데 첫 인상도 맘에 들었고, 첫 대사를 읽는 순간 너무 맘에 들어서 막 웃었던 기억이 난다.


허남웅: 감독님께서는 현재 한국영화아카데미원장으로 재직하고 계신데, 요즘 학생들을 접하시면서 연출관에 혹시 변화가 있으셨는지, 혹은 끝까지 고집하고 계시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장현수: 액션 영화를 많이 찍고 나서 <라이방>까지 끝내고 나니까 한편으로는 영화계에 빚을 갚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기회가 되어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을 맡게 되었는데, 영화아카데미 학생들이 여태까지는 무겁고 영화제용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그게 맘에 안 들어서 학생들에게 너희들도 어차피 상업영화로 시작해야한다고 많이 다그치는 편이다.

허남웅: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다.
조준형: 관객 여러분들께 감사하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필름 안에서 작가의 주체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버리고 작가의 분신이 되어야 하는데 여태까지는 스스로를 더 드러냈던 것 같다. 앞으로 겸손한 자세로 연기해야겠다.
김해곤: 장현수감독님이 다음 작품하실 때 출연하려고 한다.
이승진: 저도 마찬가지다. 감독님 다시 좋은 작품 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정리: 장지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