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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무엇을 찍을지 보다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게 된 영화다”

[작가를 만나다] '만추'의 김태용 감독

10월의 ‘작가를 만나다'에서는 <가족의 탄생>의 피 한 방울 나누지 않는 가족처럼 ‘따로 또 같이'의 가치, 전혀 타인끼리 마음을 여는 감정에 주목하는 김태용 감독의 최근작 <만추>(2010)를 함께 보고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다. 특히 이번 관객과의 대화에는 <페스티발>의 이해영 감독과 <발레교습소>의 변영주 감독, <미쓰 홍당무>의 이경미 감독이 패널로 참여, 김태용 감독의 영화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현장을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이 영화를 둘러싸고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다루지 못한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먼저 영화에 대한 느낌들을 간단히 듣고 이야기를 진행하려고 한다.
김태용(영화감독):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리고, 좋아하는 동료 감독들과 함께 하게 되어 기쁘다. <만추>를 상영한다고 했을 때, 이 영화를 가을에 보면 참 좋겠다, 혼자만의 어떤 생각들을 가지기에 좋은 시간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이 참석한 분들을 보고 나니 그렇게 되기는 힘들겠고, 오늘은 술을 먹어야할 것 같다. (웃음)
이해영(영화감독): 이 영화를 오늘 세 번째로 봤다. 두 번째 볼 때까지는 좋은 영화인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뭔가 가슴이 저릿한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보면서 가슴이 저릿하고 멜로적으로 감동을 받았다. <가족의 탄생>을 굉장히 좋아해서, 감독으로 살면서 저런 영화를 한편 정도 만들면 여한이 없겠다 생각할 정도인데, 오늘 <만추>를 다시 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감독으로서 축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영주(영화감독):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부터 탕웨이보다 현빈씨가 눈에 띄었었다. 통속적일 수 있는 연기를 통속적이지 않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전반부를 정말 좋아한다. 이 영화가 앞으로 어떤 감성을 전달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특히 좋아하는 장면 중에 하나는 처음에 탕웨이가 버스를 타고 올 때 길이 보이는 듯하다가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카메라가 팬하면 탕웨이의 얼굴이 보이고, 그렇게 이어지는 감정들이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만추>의 김우형 촬영감독이 최근에 <고지전>를 촬영했는데, 화면의 압도적인 느낌을 받았다. 전투 장면을 넓게 잡아서 옆으로 쭉 따라가는 그 사이즈는 그야말로 결정적인 사이즈 같은 느낌이 있다. <만추>에서도 마찬가지로 보통 촬영을 할 때 배우의 섬세한 움직임을 따라가거나 명백한 화면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데, 어느 순간 기다리면서 바라볼 줄 아는 카메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경미(영화감독):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탕웨이와 현빈이 마지막에 버스를 타고 달리는데, 안개가 가득한 풍경을 원경으로 찍고 둘이 주고받는 대화가 목소리로만 들리는 그 장면에서 눈물이 터졌다. 내가 왜 여기서 눈물이 나는지, 도대체 언제부터 나의 감정이 쌓였던 것인지 질문하게 되면서 영화를 더듬어가며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힘이 있다. 대개의 영화에선 감동을 주기 위해 힘을 주는 포인트가 있기 마련인데, 김태용 감독님의 영화는 그런 것이 명확하지 않은데도 어느 순간 툭 터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

변영주:
편집을 할 때 감독으로서 가장 고민하게 되는 것은 ‘이 쇼트를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이다. 어디까지 보여줘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감정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인데, 한편으로는 <만추>에서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너무 견고하게 쌓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태용: 말씀하신 것처럼 감독은 사실 단순하게 쇼트 하나를 고민하는 사람인 것 같다. 어디서 무엇을 찍을 것인가도 있지만,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 어디까지가 이 쇼트의 운명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만추>를 찍으면서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쇼트가 더 이상 이야기를 가지고 가야하는 의무감이 없어진 상태로 남겨진 그 순간에 대한 매혹이었다. 죽은 시간을 다루는 쇼트들에 대한 고집이나 집착이 생겼던 것 같다. <만추>가 말과 말의 행간처럼, 쇼트가 필요 이상으로 긴 지점들이 있는데, 어떤 의무감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 쇼트 때문에 생기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것 때문에 어떤 분들은 이 영화가 약간 지루하거나 과잉되었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 것 때문에 내가 감정을 가져야하는 지점을 지나서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 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성욱: 김태용 감독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는 사랑하는 확실한 두 남녀의 헤어짐의 슬픔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아직 제대로 된 감정을 모로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을 갖게 되는 영화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영화가 피부의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피부, 피부적인 접촉, 만남, 그 안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감정이 조금씩 피어오른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 감정이 피어오르는 상태에 도달하고 영화는 끝나는데, 바로 그 지점까지를 영화가 충실히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탕웨이가 모텔에서 금이 가 있는 문에 부딪혀보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마치 자기 몸에 뭔가 부딪혔을 때의 통증이라는 감각을 떠올리게 되는 듯하다. 어떤 사람과 새롭게 만났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 문에 금이 가고 깨져있는 그 상태와 굉장히 잘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사물들을 통해서 접촉, 만남, 감정을 이끌어간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굉장히 피부적인 방식으로 구축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일반적인 영화와는 다르기 때문에 어떤 분들은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할 수도 있고, 애매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경미: 감독과 영화가 닮아 있는 분이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분이 있다. 김태용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왜 항상 마음이 흔들릴까를 생각해보면, 감독님이 영화 안에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 실제로 감독님과 얘기 나눌 때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조근조근 얘기하시는데 어느 순간 슥 빨려 들어가게 하는 힘이 있다. 한 가지 질문은, 두 남녀가 모텔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감정적으로 훅 들어오는 느낌이어서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 감독님이 어디까지 디렉션을 주셨던 건지 궁금하다.
김태용: 그 장면은 리허설을 많이 했다. 워낙 공간이 좁고, 그런 씬은 액션 씬과 비슷해서 합을 맞추고 거기에 맞춰 카메라가 준비해야 되기 때문에 감정대로 움직일 수 있는 씬이 되기는 어려웠다. 결과물은 우발적으로 벌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해야 하는 씬이었다. 이 영화는 하나의 질문을 숙제처럼 가지고 찍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떤 식의 호감을 갖게 되는 때, 그것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이 유혹이든, 연민이나 열망, 욕정, 혹은 사랑이든 뭐든 간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어떤 순간은 과연 어떤 것일까. 흔히 사랑 이야기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확실한데, 그 사랑을 막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믿기지가 않았다. 사랑한다는 감정 자체를 믿는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전제를 두고 시작되는 모든 이야기에 약간의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만추>는 사랑이 없는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방 안에서 물리적으로 부딪히고 하는 것도, 서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인 것이다. 나의 마음보다 몸이 먼저 가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조금은 닫은 사람이 움직이는 데에 힘을 느끼는 것 같다. 그렇다보니 모텔 안에서도 둘은 그 안에서 어떠한 분명한 감정도 없다. 분명한 감정 없이 몸을 움직여서 하게 되는 상황으로 연출을 하게 된 것 같다.

이해영:
보통 남성감독이 만든 멜로영화를 보면, 그 감독이 영화 속의 여성 캐릭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절절히 느껴진다. 그런데 <만추>에서는 특이하게도 김태용 감독이 탕웨이의 입장에서 현빈을 그리워하고 동경하고 있다는 느낌이다.(웃음) 영화의 모든 사연과 아픔은 모두 탕웨이에게 있는 반면, 현빈에게는 긴장감은 전혀 주어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탕웨이는 자신이 어떤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해야하는지를 매 순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현빈은 자기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시크릿 가든>에서는 자신의 재능과 매력을 너무나 잘 알아서 완벽하게 컨트롤하며 연기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연기하는 <만추>에서의 현빈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김태용: 정확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웃음) 실제로 탕웨이와는 너무 편하고 친구 같았다. 탕웨이와는 애나라는 캐릭터의 디테일한 모든 움직임을 시연 하면서 같이 캐릭터를 만들어갔는데, 현빈의 캐릭터에 대해선 디테일한 디렉션을 거의 주지 못했다. 사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영화를 찍을 때 내가 현빈이 되어서 탕웨이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마음을 열 생각도 없고, 욕망도 없데 갑자기 누군가 내 인생에 푹 들어온다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하면서 시나리오를 썼었다.

관객1:
데뷔작으로 공포영화인 <여고괴담2>을 만드셨는데, 어떻게 <만추> 같은 영화를 만드시게 됐는지, 그리고 특별히 시애틀을 영화의 배경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하다.
김태용: <여고괴담2>도 사실 사랑 영화다. 영화를 만들 때, 장르적인 것보다 한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이 둘은 어떻게 될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이 공포든 다른 무엇이든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시애틀은 일 년에 55일 정도만 해가 뜰 정도로 워낙 흐린 날씨다. 가을, 겨울에는 자살률도 높고, 약간 신비로울 정도로 안개와 비로 항상 축축해 있다. <만추>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 때, 가을이란 것을 기후의 느낌과 공간이 잘 맞아 떨어지는 것에서 담아내고 싶었고, 그런 이유로 시애틀을 선택하게 되었다.

관객2: 영화의 일관된 톤을 잡아내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것 같다. 컨셉 조율하는 과정이나 헌팅하실 때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나.
김태용: <만추>는 영화적인 무드가 중요한 영화이다. 무드를 만드는 여러 가지 요소 중에 촬영과 미술이 있는데, 영화의 룩과 관련된 부분은 사실 김우형 촬영감독과 류성희 미술감독 이 두 분이 다 하셨다. 워낙 잘 하셔서 연출자로서는 배우에 좀 더 많은 신경을 쓸 수 있었고, 많은 힘이 됐다. 두 분이 기본적이 준비를 처음부터 같이 해줬고, 두 배우는 현장에 미리 와서 두 달 동안 같이 리허설을 했다. 사전에 준비하고, 얘기했던 촬영감독과 미술감독, 배우들이 있어서 짦은 촬영 기간을 소화해 낼 수 있었다.

관객3: 포크 장면에 대해 궁금하다. 아마도 애나가 훈이 자기를 위해서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가 첫사랑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게 하는 데에 그 장면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는 사실 애나의 삶에 많은 책임이 있을 수 있는 인물인데도, 미안하다고 말한 뒤 무언가 더 덧붙이지 않고 장면이 끝난다.
김태용: 그 장면의 리허설을 하면서 감을 도저히 못 잡았었다. 너무 웃겨서도 안 되고, 너무 슬퍼서도 안 되는 어떤 지점, 웃다가 갑자기 ‘어, 이게 뭐야’ 이런 느낌이어야 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감정이 과해서 애나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슬픔이 너무 확 오고, 어떤 때는 너무 가볍게 가다보니 애니가 울 때까지도 우리의 웃음기가 아직 남아있게 되어서 어려움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원하는 만큼,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으로 나온 것 같다.


관객4: 영화가 몽환적인 느낌이었다. 몽환적인 느낌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안개의 역할이 궁금하다.
김태용: 안개는 이 영화의 제일 중요한 요소다. 가만히 보면 <만추>는 정말 단순하고, 어떤 것도 숨기는 것 없이 툭툭 가는 영화다. 그런데 영화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안개가 걷히고 나면 다른 게 보일 수도 있는데, <만추>는 안개를 깔고 봐야만 하는 영화라고 생각된다. 안개를 걷고 보려고 하면, 오히려 이 영화를 제대로 못 본다고 생각한다. <만추>의 안개는 단지 미장센의 역할 이상으로 이 영화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제일 큰 요소인 것이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 주원탁(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