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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 소식

[특집] 대전아트시네마, 10년의 극장전

대전아트시네마,  10년의 극장전


올해로 대전아트시네마가 개관한 지 10년이다.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시네마테크 대전에서 활동하던 현 강민구 대표는 지역상영회를 개최하다 2006년 지역의 예술영화관으로는 처음으로 민간예술영화관 대전아트시네마를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는 협동조합 형태의 영화관을 구상 중에 있고, 개관 10주년을 맞아서는 <극장전 part 1. 꽃의 왈츠>라는 영화를 제작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해, 대전아트시네마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전용관 지원 사업에서 시설 낙후 등의 이유로 지원을 받지 못했고, 그럼에도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화관의 불빛을 꺼뜨리지 않고 있다. “영화는 영화다”, “사라지는 극장의 풍경”, “지역 안의 영화”라는 세 가지 섹션으로 10월 10일 개관 10주년 특별전 “시네마: 영화 혹은 영화관”을 개최할 예정인 대전아트시네마 강민구 대표를 만나 소회를 들었다. 아울러, 영사기사로 출발해 대전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램 기획을 하고 있는 장승미 씨에게도 10년의 감회를 물었다.


“늘 흔들리며 여전히 일하고 있다”

- 대전아트시네마 강민구 대표와의 대화


김성욱 먼저 개관 10주년을 축하한다. 10년의 감회가 있다면?

강민구 특별한 감회는 없다. 10년의 세월 동안 사람도 극장도 극장의 영사장비도 늙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삐걱대며 서로 기대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어느 순간 그 한 축인 사람이 사라지면 금방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예술영화에 빠진 게 대학시절이었다고 예전에 말했었다. “당시는 미국과 홍콩의 상업영화가 국내 영화계를 주름잡던 시절이었는데, 그런 때에 유럽의 예술영화를 접하고 이전의 상업영화에서는 맛볼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면서 문화적 충격에 휩싸였다”고 말했었다. 원래 전공은 철학인데 어떤 계기로 영화에 빠져들게 됐나? 어떤 영화를 인상적으로 기억하나?

-당시로 이야기하자면 극장보다는 EBS의 영향이 더욱 컸다고 생각한다. 물론 극장을 전혀 안 간 것은 아니지만 즐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EBS의 ‘세계의 명화’, ‘일요시네마’ 등을 많이 본 편이다. 함께 미학을 공부하던 선배 때문에 문학평론을 공부해 보자는 생각으로 휴학을 했었다. 그런데 당시에 워낙 문화적으로 한국사회가 요동을 치던 시기였다.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사회』에서도 영화평론 글들이 실렸었고 문학평론보다는 영화평론이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물론 그 덕분에 문학평론을 하겠다고 공부를 하던 것은 바로 정리가 되었다. 평론이라는 것이 좀 더 분석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실 어떤 기준에 대한 상상력이 무한하지 않으면 하기 힘들더라.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분석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평론이라는 글 자체는 상상력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상상력이라고 하면 역시 영화가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고 판타즘을 주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계간 『리뷰』나 『문화과학』에서도 심도 있게 문화 현상을 다뤘었다. 그리고 영화잡지 『키노』의 탄생부터 『씨네21』까지 대단했다. 그런데 이런 잡지에서 언급되는 영화들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당시로서는 EBS밖에 없었다. 계속 녹화를 하면서 영화를 보곤 했는데, 고다르의 영화가 확실히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다른 방식의 영화 제작, 연출에 대한 소개도 많았고, 미학 공부를 하면서 아도르노부터 브레히트나 루카치의 책들을 읽으며 영화를 지적으로 소화하려던 시기였다. 그런 게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웃음).

그러다 미국 고전영화들을 보면서 영화에 대한 또 다른 눈과 태도가 생긴 것 같다. 영화를 지적으로 소화하는 것과 영화적으로 소화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으니까. 그래도 아직까지 최고로 자주, 반복적으로 본 영화는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이다. 이후의 아시아 영화들도 너무 좋아한다.

지역의 극장들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사라지거나 멀티플렉스화되었을 텐데, 어릴 적 대전 지역에서 영화관을 다녔던 기억이 있다면? 특별히 기억하는 영화관이 있나?

-특별히 기억하는 영화관이라는 것이, 사실 당시의 특별했던 어떤 상황과 마주했을 때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극장을 정해놓고 다니지는 않았기 때문에 특별하게 기억하는 영화관은 없다. 물론 상황에 따른 기억이 남아 있는 극장은 몇 군데 있다. 그런 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극장은 “고려극장”이라는 옛 극장이다. 극장의 외관부터 상영관까지 정말 예스럽고 멋스러웠다는 생각이 든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동시 상영관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극장 옆의 만화방과 번갈아가며 다니던 극장이라 그나마 어린 나이에 꾸준히 다녔다. 이 극장의 외관을 사진으로 남겼으면 좋았을 텐데 사진을 구하기도 힘들더라.

대전아트시네마를 개관하기 이전인 1997년부터 시네마테크 대전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초기 시네마테크는 어떤 방식으로 활동을 했나?

-시네클럽 형태의 동아리였다. 대다수 사람들이 함께 영화감상의 취지로 모였는데, 내가 좀 오기를 부렸다.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함께 공부하고 시네마테크를 이야기하면서 전업으로 일할 수 있는 조직으로 나아가길 희망했다. 당시 서울의 “문화학교 서울”에서 자료를 얻기도 했고 부산에서 시네클럽을 하던 친구들과 자막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리저리 자료를 얻어서 복사를 많이 했었다. 물론 EBS나 NHK에서 녹화한 자료들도 꽤 있었다. 그래서 초기 비디오테크의 형태를 갖추었는데 이러한 상황 때문에 사회 초년병 시절 감당하기 힘든 빚에 시달리기도 했다(웃음). 특별히 돈벌이가 없어서 함께하던 친구와 노점에서 계란빵 장사도 했는데, 구청에서 리어카를 밤 사이에 가져간 기억이 있다.

대전아트시네마 개관이 2006년 4월의 일이다. 서구 월평동 옛 선사시네마 자리에 196석 자리였다. 어떻게 극장을 오픈하게 됐나? 개인으로서 극장을 지역에서 개관한 것은 꽤 드문 일이다. 어떤 믿음이 있었고,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나.

-가능성을 보고 시작하진 않았다. 단지 시네마테크 활동을 하면서 지역 순회상영전 및 기타 영화제를 진행할 때 장소가 늘 고민이었다. 장소를 옮기며 하는 것이 무척 피로했다. 극장을 처음 시작할 때도 ‘혼자는 무리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고, 때문에 협동조합 방식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극장에 대한 멤버쉽 정도로 생각하던 회원들을 데리고 협동조합에 대한 교육을 몇 번 했는데 결과가 좋진 않았다. 너무 아마추어적이었고 비즈니스라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스스로에게 많았다. 아직도 그렇긴 하지만.

2007년에 지금의 현 자리인, 대훈서적 건물 3층 옛 동보극장 자리로 옮겨왔다. 옮기게 된 배경은 어땠나?

-전에 있던 극장 건물이 노인요양병원으로 업종변경을 했다. 세들어 살던 세입자들이 다 나왔다. 세입자가 얼마 있지는 않았지만 망하거나 쫓겨나거나 했다. 그때의 상처 때문에 남의 건물에 투자하고픈 생각은 없다.



개관 십 년을 맞는 감정이 ‘약간의 우쭐함과 낙담’이라고 했는데,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과 낙담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우쭐했던 것은 그래도 젊은 나이에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사회 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대학 졸업 후 친구와 함께 지하실에서 시네클럽을 시작했다. 그러다 신용불량자도 되어 봤지만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극장까지 하게 되었으니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충만했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강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라는 사실을 알고 낙담을 한 것이다. 극장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폭이 넓어지니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에 대한 나름의 정리도 되어간다. 오히려 내가 반대로 변해가는 것에 초조해하기도 한다.

개관 10주년 기념행사의 전체 콘셉트가 “시네마: 영화, 혹은 영화관”이다. 개관 기념으로 만든 영화도 극장과 관련이 깊다. 여전히 영화관을 운영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보고 싶었던 영화를 누군가와 함께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편으론 극장 영업이 끝난 후 혼자 여유롭게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한 것 같다.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는 별로 나에게 와닿지 않는다. 물론 전체 예술영화관에 대한 정책이나 영화 관람 문화의 변화, 극장의 변화는 또 다른 의미가 있겠지만 말이다. 지금의 나와 대전아트시네마라는 극장은 극장운영의 문제로 볼 때는 처절한 애증관계이다.

당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고 여전히 일하게 하는 음악, 책, 혹은 영화가 있다면 어떤 것이고, 어떤 여전한 믿음을 갖고 있나?

-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은 대학시절 연애 실패 후, 외우다시피 읽었던 시집이다. 연애를 할 때 상대방은 세상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버려졌다라고 느끼는 것은 실연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허수경 시인의 시 중 “혼자 가는 먼 집”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 저렇게 아파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우산을 버리고 함께 비를 맞아주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예전의 고다르 영화보다는 차이밍량의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물론 <애정만세>에서 <구멍>까지만. 그리고 <안녕, 용문객잔> 정도까지. 마음 다잡고 일한 적은 별로 없다. 늘 흔들리며 일한다. 그게 내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요소일 것이다.

특별히 기억하는 관객이 있다면?

-조용히 왔다가 영화만 보고 조용히 사라지는 관객들이 있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기에 극장을 채울 수 있는 관객들이다. 그런 몇 분이 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잘 모르지만 그런 분들을 기억한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