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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2016 가을날의 재회 + 자비에 돌란 특별전

자비에 돌란에게 부재하다는 “깊이”가 뭐길래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2016년 11월 2일(수) ~ 20일(일)까지 '가을날의 재회+자비에 돌란 특별전'을 진행했습니다.


자비에 돌란에게 부재하다는 “깊이”가 뭐길래



자비에 돌란의 이름에는 따라붙는 수식어가 많다. ‘천재’ 혹은 ‘스타’, ‘젊음’과 ‘스타일’. 그런데 이런 수식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칭찬의 근거이자 비판의 무기로 사용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같은 작품이라도 ‘젊고 감각적인 천재 감독’의 걸작인 동시에 ‘치기 어린 스타 감독’의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유난히 돌란에게 이러한 이중 척도가 적용되는 것일까. 애초에 많은 이들이 돌란에게 간편하게 적용하는 ‘천재/스타’, ‘깊음/얕음’의 이분법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천재가 아닌 스타’라는 비판에 관하여

돌란이 천재인지 스타인지 밝히려는 시도는 곧 천재와 스타를 양립 불가한 것으로 보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이때 말하는 ‘스타’가 걸작보다는 팬덤을 토대로 존립하는 자라면, ‘천재’는 이에 대비되는 번뜩이는 영감의 창조적 주체일 것이다. 나아가 이 이분법은 스타를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자로, 천재를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자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렇게 정의되는 천재는 동시대적이기보다는 18세기 낭만주의의 개념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에른스트 카시러의 『계몽주의 철학』에서 18세기 천재의 개념을 알 수 있다. 이때 천재는 “미를 엄격하고 확고부동한 규칙에 맞추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며, “자신의 완전한 힘으로부터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주체였다. 즉, 당시의 천재는 태생적으로 자신의 내부에 진리를 품은 자를 일컬은 것이다. 교육되기보다는 타고나는, 대중에 휩쓸리기보단 유리된 낭만주의적 천재. 돌란에게 적용되는 이분법의 한 극과 똑 닮은 정의이다.

이후 산업혁명을 지나 자본주의가 서구에 자리 잡으면서 예술과 천재의 개념도 바뀌었다. 앤디 워홀이 그만의 천재성으로 상품과 예술 사이의 경계를 흐렸듯이, 대중적인 것과 천재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졌고 가끔은 정비례 관계를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천재냐 스타냐’의 굴레를 씌우기 전에 천재라는 단어 자체가 어떤 뉘앙스를 전제하고 있는지, 왜 스타를 은연중에 폄하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우선일지 모르겠다. 18세기적 천재의 잔상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렇다고 그 잔상의 권력을 이용해 스타라서 천재는 아니라며 돌란을 비판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 골방에서 작업하는 고독한 예술가만을 진정한 천재라고 칭할 것인가. 매력적인 자신도 하나의 작품으로 내세운 전략이야말로 가히 ‘천재적’이지 않은가.



‘깊이가 없다’는 비판에 관하여

돌란에게 쉽게 던져지는 또 하나의 말이 ‘깊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깊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생 경험? 다작(多作)의 경험? 세상의 모든 현상과 모든 세대를 인생의 끝에서만 보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런 관점만이 진정한 깊이라고 믿는다면 젊음의 시각은 단지 ‘성숙한 어른’의 시각으로 도달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도리어 어떻게 보면 돌란은 아주 드물게 젊은 사람들의 영화를 ‘깊이 있게’ 만드는 감독 중 하나다. 아직 세상의 풍파를 다 거치지 않은 10, 20대의 삶은 중장년 이상의 세대가 삶을 담아내는 방식과는 다르게 구현될 수밖에 없다. 태어나 처음 다치는 순간들, 죽을 것 같은 상실감, 뒤따르는 근거 없는 희망과 이 모두를 감싸는 무조건적인 멋에 대한 맹신은 테오 앙겔로풀로스나 파올로 소렌티노 영화처럼 연출될 수 없다. 무거운 침묵 속 허무의 함축보다는 무책임할 정도로 과잉된 돌란의 이미지가 더 알맞을지 모른다. <하트비트> 속에서 인물들을 비추는 자극적인 터키색과 붉은색 조명이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만큼이나 거룩한 의미를 갖지 않아 오히려 자유롭듯이. 인생의 끝에 서서 그것을 규정하려고 하지 않는, 당당히 시작점에 서서 수습 불가한 것들을 늘어놓는 돌란이야말로 진정 젊음을 젊은 시각으로 표현한다. 젊음의 태도로, 그 나름의 깊이로, ‘어른 흉내’를 내지 않은 채.



자비에 돌란 지키기

사실 가끔 앙겔로풀로스나 소렌티노의 영화를 보면 답답하다. 이들은 모든 것을 겪어버린 후의 심정을, 이미 후회를 넘어선 초연함의 자세를 내보인다. 아직 다 겪어보지 않은 입장에선 이들의 자세가 온전히 공감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훌륭한 작품들임은 분명하기에, 지속적으로 이런 작품들에 노출되다 보면 어느새 겪지도 않은 풍파를 겪어버린 사람이 된 듯 무거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작품들이 ‘젊은 시각의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 그렇기에 작품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돌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재가 아닌 스타라고, 어려서 깊이가 없다고 비난하기보다는 반대로 그가 너무 빨리 ‘성숙’하지 않기를 기원한다.



이호정 l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