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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네바캉스 서울

[비평교감 3] 영화 글쓰기가 영화를 판단하거나 심판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감독들이 영화로 서신을 주고받듯, 비평가들이 영화비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취지로 마련한 ‘비평교감’의 마지막 시간에는 변성찬 평론가와 남다은 평론가가 찾아왔다. 자신들은 씨네필도, 학구파도 아니라며 쑥스러운 미소로 시작했지만 금세 영화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말해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변성찬 : 아트시네마가 처음 제안을 할 때 자유롭게 하라고 했다. 때론 자유가 더 큰 구속을 주지 않나 싶다(웃음). 영화도 특정 영화를 골라 쓰라고 하면 편하게 쓰겠는데 아무거나 골라서 쓰라고 하면 괴롭다. 관객이 다섯 명 보다 적으면 바로 뒷풀이로 가려고 했다(웃음). 아무튼 우리는 솔직담백하게 얘기하도록 하겠다. 영화는 어땠나?

 

남다은 : 유운성-김영진 평론가는 씨네필, 장병원-정지연 평론가는 학구파다. 앞서 본 <서신교환>은 굉장히 우아한데 우리가 말로 비평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그만큼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된다. 그래서 최대한 주관적이고 솔직하게 말하려 한다.

     영화는 사실 별로 기대를 안 했었다. 두 감독의 전작을 보긴 했는데 의심스러운 구석들이 많았다. 처음 엔리케의 편지는 감흥이 크게 오지 않았다. 전체적으로는 김소영 감독이 좀 밀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서신교환>은 형식상 한 감독이 영화를 찍으면 다른 감독이 응하는 방식이라 흥미로웠는데, 김소영 감독의 영화를 보면 엔리케 감독의 영향을 받으면서 욕심을 내긴했는데, 살짝 미진하지 않았나 싶다.

 

변성찬 : 첫 번째 편지가 좋다는 것에 공감한다. 특히 나뭇잎 연기가 좋았다. 그 나뭇잎이 외화면으로 사라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굉장히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외화면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면 불안하다(웃음). 반면에 네 번째 편지에서 외화면으로 비행기 소리가 나오는데 이 부분에서는 나른해진다. 이런 면에서 이 에피소드가 내게 강렬한 인상을 줬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기에 이 작품은 연애편지 같은 느낌이 있다. 엔리케 감독이 먼저 편지를 보냈고, 거기에 대한 김소영 감독의 반응은 조금 시크하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아까 말했듯이 이전의 비평교감에 참여한 비평가들은 캐릭터가 뚜렷하다. 그러면 나와 남다은 평론가가 왜 엮이게 되었을까? 나와 남다은 평론가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씨네필이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씨네21>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디포럼 상임 작가라는 점이다. 2007년부터 한 해씩 번갈아가면서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어서 동료 평론가들 중에서 일 때문에 자주 만나는 편이다. 하지만 다들 알 듯이 가까운 사이일수록 진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 못할 때가 많다. 영화 글쓰기를 한다는 건 매번 비평이란 뭘까 고민하는 시간인데, 이런 식의 무거운 주제를 진지하게 서로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공식적인 자리가 마련되어 서로의 비평행위나 영화적 글쓰기에 대해서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됐다. 먼저 남다은씨가 영화 평론가라는 직업을 갖게 된 계기는 뭔가?

 

남다은 : 먼저 씨네필이 아닌데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지와 그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스스로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말하겠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아카데미로 들어가는 글을 쓰기는 싫고 내 안에 에너지는 너무 많았다. 평소에 글 쓰는 걸 좋아했고 남들보다 영화를 많이 보긴 했지만 씨네필은 아니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씨네21>로 등단했다. 한마디로 영화에 대한 고민이 없는 상태에서 영화 평론가가 된 거다. 그래서 그 당시에 쓴 글들을 보면 읽어줄 수가 없다.

     2004년에 데뷔 했을 때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지금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당시 영화는 그냥 글을 쓰는 텍스트였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영화든 소설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모르는 애가 더 무섭다고 영화적인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영화를 난도질했었다. 대학원에서 이런저런 이론들을 배웠고 그 기반에 페미니즘이 있었다. 영화는 페미니즘의 틀로 보면 너무 쉽게 분석되게 때문에 영화를 해체하면서 내가 굉장히 비판적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4년 정도 글을 쓰다가 동료 평론가들의 글을 보니 내게 너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영화를 봐도 그들은 내가 못 본 것들을 보고 있었다. 도저히 차이가 뭔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많이 고민하고 생각을 해 보니 그건 가치관의 틀이었다. 그래서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봤다. 그러다 스크린이 딱 내게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경험을 겪고 나니 이론이고 뭐고 다 쓸모가 없어지더라. 내가 몸과 마음으로 막연하게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데 이것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니 그 근원을 찾기 위해 영화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러다보니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변했다. 영화와 나와 세계가 같이 호흡하고 상호작용하는 순간을 경험한 다음에는 계속 그걸 찾으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그게 안 될 때가 많다. 영화가 문제인 경우도 있지만 내가 투명하고 맑지 않은 상태가 원인이었다. 아무튼 영화를 경험하고 난 후엔 이론의 틀이나 이데올로기에 맞춰서 영화를 보는 행위엔 흥미를 잃어버렸다. 물론 그렇게 분석해야 하는 영화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말이다.

 

 

 

변성찬 : 남다은 평론가가 씨네필로 출발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내가 봤을 때 어느 순간부터 씨네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다은 : 씨네필적인가? 나는 너무 적이 많다(웃음). 너무 주관적이다, 비약이 심하다, 족보가 없다, 레퍼런스도 없다는 등의 비난을 받는다.

 

변성찬 : 나는 레퍼런스가 많은 게 씨네필적인 글쓰기의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진전시기 위해 두 가지 질문을 하겠다. 남다은 평론가의 글을 보면 ‘영화적 활력’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의 함의가 뭔지 궁금하다. 그리고 초기의 남다은 평론가는 페미니즘적 영화 비평을 했었지만 현재는 ‘영화적 페미니즘’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예로 여성 영화제에 관련된 ‘여성 영화란 존재하는가’라는 글이 신선했다.

 

남다은 : 영화적 활력이라는 말은 멋있어 보이기 위해 쓴 것이다. 참신하거나 영화적 활력이라는 것은 영화를 봤을 때 느끼는 거지, 관념을 갖고 개념적으로 성립된 건 아니다. 하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이미 거기에 있지만 우리가 지나쳤던 것, 혹은 병적이고 비정상적이고 사사롭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순간 영화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다. 우연의 개입일 수도 있고 배우의 신체의 활동일 수도 있다. 현실의 시간을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영화적인 시간-장소-언어로 전환하는 작업들이 그렇다. 독립영화 심사를 하면서 여러 편의 영화를 보는데 자신의 문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상업영화의 문법을 따라 폭력적으로 만든 영화들은 지루하다. 문제의식은 같은데 뭔가 다른 일들이 벌어지는 영화,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른 영화, 기존의 의미망을 해체시키는 영화,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그런 영화들을 보면 영화적 활력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게 꼭 형식의 문제는 아니다. 형식이 현란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면 <서신교환>의 엔리케의 영화에 대한 감동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것 같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실은 그게 내 고민은 아니다. 이건 변성찬 평론가의 고민이다(웃음). <씨네21>에서 내게 여성영화 관련 글 청탁을 했을 때, 나는 여성 영화란 범주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다. 여성영화라는 범주가 주는 위안과 저항감을 넘어서 그것의 답답함과 구속감이 있다. 영화와 친밀해지면서 이런 걸 떨쳐버렸을 때 해방감이 더 크다. 끌레르 드니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대해 쓰면서 ‘영화가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일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다. 나에게도 유효한 질문이다. 예전에 김수현 감독의 <귀여워>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난도질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후에 <창피해>에 대해 평을 쓸 일이 있어서 <귀여워>를 다시 보게 됐다. 그 당시에는 진심으로 썼겠지만 내가 예전에 영화를 정말 잘못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글을 썼다. 나는 그런 순간이 좋다. 내가 그 사이에 바뀌었다는 점이 좋다. 예전에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볼 때 남자들의 판타지, 남자들의 욕망에 대해 많이 썼다. 무조건 그것만 썼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나 판타지가 있고 관음증이 있고 내면에 폭력적 욕망이 있는데 그것이 그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가 그걸 어떤 식으로 전시하고 풀어 가는지, 어떻게 그 안의 균열을 보여주는지를 눈여겨본다.

 

변성찬 : <창피해>를 보고 창피함을 느꼈다는 건가(웃음). 내가 물어봤던 건 개인적인 윤리에 기반한 비평과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비평에 대한 고민과 접합되는 지점이다. 특히 이것이 독립영화와 중첩되는 지점이 있어서 이런 질문을 했다. 남다은 평론가의 글이 내게 많은 도움이 돼서 인용까지 한 부분이 있다. “가부장적 체제의 도덕 관습 규율을 먼지처럼 가볍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양식, 욕망하기를 욕망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 나는 이 부분에서 “먼지처럼 가볍게 만드는” 이란 부분이 좋다. 여성영화가 가부장제의 의식, 감성과 맞서 싸우면서 같이 무거워지면 굉장히 힘들고 스스로의 벽에 갇히는 꼴이 된다. 소위 싸워가면서 닮아가는 메카니즘이 있는데 그런 유형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정체성을 공고화하기 보다는 지속적으로 바꾸고 갱신해 나가는 힘을 잃지 않을 때 정치적이건 미학적으로 대안으로서의 여성영화가 갖는 범주가 의미가 있다고 본다. 독립영화도 이와 같다고 본다. 오글거리지만 도움이 많이 됐다. 고맙다(웃음).

 

남다은 : 이제 내가 질문을 하겠다. 데뷔가 늦고 그 경로가 특이하다. 그리고 대단히 학구파다. 짐작으로는 영화에서 어떤 위안을 얻어서 시작했을 텐데 어떻게 영화 비평을 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또한 <씨네21>에 독립영화에 관한 글을 격주로 연재하고 있는데 거기 자기소개 란에 “진정한 독립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다”라고 표현했다. 때론 독립이라는 말이 구태의연하고 상업영화를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단어로 사용되곤 한다. 그래서 ‘독립’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썼는지 궁금하다.

 

변성찬 : 굉장히 늦은 나이라고 했는데 2002년 마흔 살에 시작했다. 시작할 때는 일종의 노후대책과 같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물론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긴 했다. 나이를 먹어서도 일종의 취미처럼 계속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하며 가벼운 연서를 쓰는 마음으로 지원했다가 수상 통보를 받고 부랴부랴 영화사 세미나를 했다. 그때는 영화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생활할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오래 버티면서 지금까지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상황을 말하자면 나는 상업 영화에 대해 쓰지 않거나 쓰지 못하고 있다.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독립영화 전문 비평가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독립영화의 진정한 독립에 기여하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진정한 독립’을 선험적으로 제시하고 싶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면 ‘여성 영화’라는 경계가 지나치게 견고하고 단단해지는 위험을 피할 수 있을까라는 남다은 평론가의 고민과 같은 맥락이다. 보통 독립영화라고 하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영화라고 받아들인다. 내 생각에 이것은 필요조건일 수 있지만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독립영화에는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감정으로부터의 독립. 즉 정서적 독립이 훨씬 더 장기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나 스스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감정이라고 하는 것, 특히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오랜 기간 동안 자동적으로 익힌 것이다. 예를 들어 태극기만 보면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이라는 것이 절대로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런 집단적인 감정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때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다. 2000년대 초반에 동두천의 기지촌에서 성노동을 하던 분이 미군에게 강간당하고 끔찍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시위가 일어나곤 했었는데 시위 현장에 ‘미군이여 강간은 너네 나라에서‘라는 팻말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런 거다. 특히 이런 집단적인 감정들이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감정이 되기가 쉽다.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통념을 재생산하는데 굉장히 강력한 무기로 사용될 것이다. 이건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독립영화의 정치성을 보면 출발점부터 계급적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적과 싸우면서 적과 동일한 무기를 사용할 때 적과 닮아버리는 위험성이 있다. 그랬을 때 정치라는 건 동맥경화에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나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정치가 이런 동맥경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원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영화에서 새로운 스타일이나 미학이나 이런 것들이 중요한 이유는 미학주의나 좁은 의미의 형식주의 때문이 아니라, 쉽고 관습적인 방식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또는 자연스럽게 그런 영화적 순간과 만나면서 우리가 받는 그런 감정의 재생산에 대해 질문하고 벗어나게 만들고 정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 문제의식을 벤야민을 패러디해 이야기하자면, 진정한 독립영화는 정치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정치를 시행하는 영화다.

 

 

 

남다은 : 교감이 아니라 강의를 하고 있다(웃음).

 

변성찬 : 영화 글쓰기나 비평 행위가 나에게 갖는 의미가 뭔지에 대해서 덧붙일 말이 있다. 나는 영화 글쓰기나 비평 행위가 영화를 판단하거나 심판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다른 것이 아니라 나의 문제의식을 영화와 함께 영화가 준 감흥을 갖고 실험적으로 풀어나가는 글쓰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영화에 대해 갖는 어려움 중에 하나는 찬반에 방점을 찍는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런 의식이 영화 평론가라는 위치에서는 직업윤리 상 필요하다는 얘기가 있기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하기까지가 가장 어렵다. 항상 반복되는 일이라 작정하고 시작해도 이런 직업적 자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때만 글이 써진다. 물론 판단이나 심판이 비평 전체가 가져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영화적 글쓰기가 반드시 그래야만 할까라는 생각이 최근에 많이 든다. 내게 자극과 감흥을 줬던 영화에 대해 쓰면서 내가 더 원하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영화를 글쓰기를 통해서 실험적으로 만들어 가는 행위가 비평 행위라고 생각한다. 영화 글쓰기 역시 다른 의미에서는 창작이나 창조 행위인 것이다. 남다은 평론가의 글도 그렇게 보인다.

 

남다은 : 이런 게 중요하다. 영화 평론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글인가가 화두다. 어느 분은 감독을 향해 쓴다고 하고, 유운성 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저널에 쓰는 글은 독자들이 이 영화를 볼 건지 말 건지를 판단하게 해줘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누구를 대상으로 쓰는가? 나는 동료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쓴다. 동료 평론가들이 좋아하면 나는 가장 좋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나를 향해 쓴다. 영화 같은 경우도 세상을 향해 만드는 영화는 점점 보기 어렵고 힘들다. 오히려 내가 그 세계 안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을 영화 속에서 들여다보면서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가는 작가들의 궤적을 볼 때 가장 기쁘다. 다시 말해 일기는 아니지만 끊임없이 세계와 나와 영화 사이를 연결해주고 생각하게 하고, 결국은 내 내면으로 들어오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를 볼 때 가장 괴로운 것은 영화 속을 제대로 안 들여다봤다는 것을 느끼면서 영화가 내게 안 붙을 때이다. 분명 굉장히 좋은 영화라는 걸 알지만 영화가 온전히 내게 안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럴 땐 영화를 안 보고 혼자 시간을 갖는다. 사실 어떤 매체에 쓰느냐에 따라 글이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누구를 대상으로 쓰는 지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변성찬 : 나는 딱 한 명이다.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플로 반응을 보이니까 관심이 없어졌다(웃음). 아까 말했던 정치의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정치로의 전환이라는 것은 사실 벤야민이 했던 얘기기도 하고, 60년대 서구가 요동치고 대단히 정치화 됐던 시기에 고다르를 위시한 창작자뿐만 아니라 이론가 비평가 그룹을 다 포괄한 정치적 모더니스트들이 갖고 있던 의식이다. 그래서 영화를 평가할 때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감정을 만들어 내는지가 중요하던 시기가 있었다. 나는 서구의 정치 모더니즘에 자의식을 갖고 있지도 않고 씨네필도 아니지만 기존의 독립영화에서 자리 잡아왔던 영화적 재현 방식이나 스타일에 자연발생적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새로운 시도들이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거의 반세기 이상이 흘렀고 시공간적 조건이 다른데 독립영화라는 범주 내에서 새로운 흐름들이 조심스럽게 지속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서구에서는 그들의 영화 언어를 비평 언어로 바꿔주는 담론의 개입이 있었지만 한국 비평계에서 그런 작업이 부족하다. 그래서 독립영화에 대해서 글을 쓰는 자리에 있는 이상 그런 징후나 흐름들을 나름의 시각으로 최대한 지지하는 것이 내 임무인 것 같다. 그래서 철지난 방법이긴 하지만 영화를 만든 감독을 대상으로 글을 쓰다 보니 작가론적 글쓰기를 많이 한다.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작가의 전작을 보고 작가가 갖고 있는 고유한 화두가 정리가 되지 않으면 작품에 대해서 말을 보태는 게 힘든 부분이 있다. 그다음에 신경 쓰는 게 있다면 동료 평론가들의 반응이다.

 

남다은 : 그래도 비평교감인데 민망하지만 마지막으로 서로의 글에 바라는 점과 앞으로의 다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웃음)

 

변성찬 : 진짜 민망하다(웃음). 남다은 평론가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 언젠가부터 미세하게 변한 지점이 있었다. 그전의 글은 특정 지면들을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글들 중 하나였지만 어떤 계기 이후로 페미니즘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진정 페미니즘적인 정서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설득력 있는 비평언어로 바꿔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흐름대로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남다은 : 고맙다. 변성찬 평론가의 글을 워낙 문장도 좋고 구조도 훌륭하고 탄탄하다. 그러나 요즘 독립영화 비평을 쓰면서 경직되고 진지해진 것 같다. 조금 더 풀어졌으면 좋겠다. <아리랑>에 대해서 굉장히 자유롭게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갔으면 좋겠다. 물론 진지하게 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독립영화를 아직도 경직되게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안에서 영화와 함께 자유롭게 노는 글을 가끔 쓰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변성찬 평론가를 글을 쓸 때 술을 한 두 잔씩 먹으며 쓴다고 하던데, 술을 조금 더 먹고 쓰면 어떨까?

 

변성찬 : <아리랑> 글을 쓸 때 과음했었나보다(웃음). 최선을 다해보겠다. 지금은 밀려 있던 독립영화가 품고 있는 정서를 세상에 알리는 걸 주력하고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독립영화 비행‘이라는 코너에서 홍상수의 신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정서의 독립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그 누구보다 훌륭한 독립영화 감독이 홍상수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더 자유롭게 노는 글을 쓰려고 노력해야겠다.

 

남다은 : 늦게까지 들어줘서 고맙다. 영화를 통해서 영화 안에서 보고 내 몸으로 느낀 것을 믿고 거기서 시작하겠다. 그걸 믿기 위해서 열심히 보고 열심히 느끼고 열심히 살겠다. 글을 쓸 때 항상 이걸 염두에 두겠다.

 

변성찬 : 남아서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 비평교감이라는 프로그램이 각자 흩어져 있는 한국 비평계의 교감의 장을 마련하자는 취지인 것 같다. 싸움이 됐건 연대가 됐던 이런 장이 필요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공감이고 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