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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 talk

"영화적인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

[시네토크] 시네마테크의 선택작 에릭 로메르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

지난 6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의 옥상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개막식 이후로 꾸준한 입소문을 탄 에릭 로메르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행렬이었다. 매진을 기록한 화제작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 상영 후에는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진득한 발걸음으로 로메르라는 작가와 이 소박하고 아름다운 영화의 자장을 짚어보는 뜻 깊은 시간의 일부를 여기에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런 영화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이 영화에 갖게 되는 의문이고, 동시에 에릭 로메르라는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다. ‘이런 영화를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뭘까’라는 질문과 거기에 내포된, ‘그렇다면 영화는 무엇일까’라는 존재론적인 의문을 발생시키는 영화다. 어쨌든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은 굉장히 재미있는 영화다. 로메르는 <녹색광선>을 만든 이후에 즉흥적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자체도 뭔가 일관된 것이 있는 것 같기는 하나 전체적인 구성이 굉장히 느슨하다. 제목 또한 수수께끼다. 이 영화에서 모험이라고 불릴만한 것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의문과 마찬가지로 이런 영화 안에서 영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로메르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은 그리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에릭 로메르 영화의 본성적인 측면을 굉장히 많이 갖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다.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레네트가 파리에 남기 위해 그림을 팔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듯, 이 영화를 레네트라는 예술가의 생사투쟁을 건 모험담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영화 이야기의 상당부분이 돈의 순환과 관련되어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지만,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돈과 관련한 문제가 심각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돈의 문제를 다룬 사회적인 드라마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혹은, 이 영화는 일관적이고 반복적으로 침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이 가장 부각되는 것은 <블루 아워>라는 첫 번째 에피소드이지만 네번재 에피소드와도 연결된다. <블루 아워>에서의 침묵은 자연의 정적, 다시 말해 굉장히 자연적인 사건이다. 동시에 그 침묵은 인간간의 소통의 영역에서도 발생하게 되고, 레네트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타인과 교환할 때에도 침묵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 면에서 침묵을 통한 인간적 소통을 다루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아주 대조적인,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에 있는 두 여성간의 우정을 다룬 드라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제도와 인간의 문제를 다룬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드라마로 볼 수도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레네트는 2000프랑에 그림을 판매하는 데 성공하지만, 화상은 4000프랑에 그것을 판매한다. 이런 면에서 종국적으로 제도의 승리를 확언해주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두,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반복적으로 정치, 법, 규범 등과 개인 간의 충돌, 모멀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빈자를 어떻게 구제할 것이냐, 하는 도덕적인 딜레마에서 드러나듯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또,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주로 강조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연이라는 세계와 파리라는 도시적인 환경 간의 대립이 드러나기도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로메르 영화의 상당수가 젊은이들을 그리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특히나 젊은 여성 둘을 빌어서 80년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두 개의 뉴웨이브가 겹쳐지게 된다. 로메르는 이 영화를 초기 누벨바그의 동료들이 만들었던 단편 영화의 느낌으로 되돌아가서 만든 작품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런 맥락에서 16mm로 영화를 찍었고, 굉장히 느슨한 에피소드들로 연결된 영화가 탄생했다. 동시에 거기에는 80년대라는 특정한 상황이 간접적으로 많이 들어가 있다. 이런 면에서 새로운 조건들 안에서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침묵에 대한 이야기라 했지만 영화에서는 말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중요성도 상당히 많이 느껴진다. 이렇듯 전체적으로 이 영화가 도대체 뭘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는 굉장히 애매하다. 지금 말씀드렸던 모든 것이 이 영화에 있을 수도 있고, 이 모든 것들이 이 영화에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굉장히 단순하고 소박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뉘앙스를 띄고 있고 굉장한 모호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서두에 말씀드렸듯 로메르의 영화를 볼 때는 ‘이런 영화를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뭘까’라는 질문과 ‘그렇다면 영화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로메르는 고다르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평생을 영화적 존재론에 대해서 고민하고 영화가 갖는 독특성에 대해 생각했던 작가다. 로메르는 자신이 시네마테크에서 무성영화로 영화를 시작한 사람이라 말한다. 그에게 시네마테크는 대단히 중요한 공간이었다. 크게 보자면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시네마테크가 영화에 과거가 있다는 것을 보존해주었다는 점이다. 로메르는 ‘예술에 있어서 과거는 언제나 보존되어야 한다. 그것은 과거가 풍요롭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가 없이는 새로운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예를 들어 라파엘로의 그림이 없었다면 그를 흉내 내는 미술가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남아있다면 이미테이션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고, 전혀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네마테크라는 공간 안에서 영화의 과거를 본다는 일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일이었다. 그 지점이 고다르와는 조금 달랐다고 생각한다. 고다르는 굉장히 혁신적인 영화를 만든 감독이지만 언제나 과거의 채무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과거가 남겨준 숙제를 스스로 펼쳐내는 데 굉장한 고민을 한다. 고다르가 누벨바그가 시작인줄 알았던 끝이라 말했다면, 로메르는 조금 더 낙관적으로, 과거의 풍요로움이 있다는 것을 그것들을 제외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가치평가의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시네마테크에서 얻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로메르는 영화가 문학이나 회화를 차용함으로서 더 나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네필리적인 것에 대해 오히려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 같다. 시네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영화를 통해서만 모든 것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부정한 것이다. 영화 옆의 현실에는 영화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것들이 있다. 시네필리적인 현상에 대한 약간의 부정적인 태도는 그의 작업과 관련된다. 달리 말하자면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클리셰들이나 영화로부터 차용해 온 부분들을 끊임없이 부정하려고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 안에서 영화적으로 보이는 것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이 다른 누벨바그리언들과 로메르의 차이를 만드는 것 같다.


로메르는 타고난 이야기꾼인데, 그 이야기들이 어디서 발생하는 것인지 언제나 의문을 갖게 된다.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에서 역시, 이 네 가지 에피소드 안에서 사건과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로메르적 사건은 우연에서 발생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아무 이유나 설명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등장하는 미라벨과 역시 그저 시골길을 걸어가던 레네트는 우연히 만나 미라벨의 자전거 바퀴를 함께 고치게 된다. 그 다음에 벌어지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우연성에 근거하고 있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어보이는, 소소한 사건들이지만 동시에 이 우연은 부조리할 정도다. 너무도 우연적인 일들이 너무도 쉽게,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말은 이런 우연적인 사건에 연결점들을 만들고, 인물들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 하는 데 사용된다. 로메르적 사건이라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드라마틱한 일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물들이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 그들이 느끼는 바에 대해서, 그들의 관계들에 대해서 토로하는 순간 진정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것들이 거의 대부분 지나간 행위에 대해 다시 이야기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메르적 담화의 핵심은 진행 중인 일에 대한 담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나 담화는 현재진행 중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이미 지나가버린 것, 혹은, 앞으로 올 것들의 사건과 행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로메르의 담화는 가장 연애론적인 사건이다. 이미 헤어진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앞으로 등장하게 될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녹색광선>의 전체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로메르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갖고 있는 위험성이 있다. 마치 이 영화의 화상이 레네트의 그림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며 ‘내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수긍해야 한다’는 듯한 기세를 보이는 것과 비슷한 입장을 갖게 될 것 같은 우려가 있다. 로메르의 영화를 보고 나서는 각자가 자신의 입장을 갖고 그것을 견지하는 가운데 편안하게, 끊임없이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것 같다. 각자의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실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리: 박예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