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 웰즈와 아나크로니즘

지난 8월 21일 오손 웰즈의 <위대한 엠버슨가> 상영 후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현대성’이란 제목의 영화사 강좌 마지막 시간이 이어졌다. ‘오손 웰즈와 아나크로니즘’을 주제로 열린 아닐 강좌의 강사는 유운성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맡았다. 그날 현장을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유운성(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지금 보신 <위대한 앰버슨가>는 오손 웰즈가 처음에 편집했던 버전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고, 오리지널 버전은 아직 볼 수가 없는 상태다. 오리지널 버전은 132분인데 지금 보신 버전은 88분이고, 심지어 몇 개의 장면은 웰즈가 연출하지조차 않았으며 그나마 웰즈가 연출한 장면들조차 순서가 많이 바뀌어있는 상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처음 공개된 이래로 지금까지 영화 비평가들에게 ‘어디까지가 영화 비평인가’라는 질문을 제시해오고 있다. 삭제된 장면들은 볼 수 없지만 스크립트, 시나리오, 그리고 웰즈가 내렸던 연출 지침 등은 남아있기 때문에 원래의 영화를 어느 정도 추측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사료들을 토대로 ‘이 장면은 원래 이런 것이었어, 몹시 탁월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영화 비평인가 하는 지점이다. 그런 면에서 먼저 이 영화에 얽힌 사건들을 말씀드리며 웰즈가 처음 만들려고 했던 것을 상상적으로라도 그려보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웰즈가 영화를 만들고 나서 개봉 이후에 다시 본 첫 번째 영화가 <위대한 앰버슨가>라고 하는데, 아주 불쾌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한다. 차라리 이 영화에 가해진 일을 모르는 채로 죽는 편이 나았으리라는 것이다. 웰즈는 자신 몰래 행해진 편집들만 아니라면 이 영화는 <시민 케인>보다 훨씬 더 뛰어난 영화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이렇게 불완전한 판본으로 남게 된 이유에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텐데, 하나는 흔히 회자되는 대로 ‘뛰어난 예술가의 영혼을 억누른 사악한 헐리우드 제작사들’ 때문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웰즈 자신의 심리적인 기벽과 성격적인 결함이 이 영화를 시작부터 파탄으로 몰고 갔다는 주장이다. 찰스 히건 같은 평론가는 웰즈가 이 영화의 후반작업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것은 완성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주장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로버트 캐링거라는 학자의 것으로, 그는 RKO에 남아있던 여러 자료들을 모아 <위대한 앰버슨가>의 일종의 텍스팅적인 복원을 시도하여 <위대한 앰버슨가의 복원>이란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에 실린 자료들 자체는 후에 평론가들이 많이 참조하게 되었지만, 그가 시도하는 오이디푸스적인 맵핑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를테면 엄청난 셰익스피어주의자였던 웰즈가 어떤식으로도 <햄릿>을 연출한 적이 없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고, <햄릿>이 그의 자전적인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조너선 로젠봄은 캐링거의 이러한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이 영화에 일어난 일은 당시 웰즈가 처해있던 제작 상황을 보는 것으로서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위대한 앰버슨가>의 촬영이 끝나고 바로 1주일 후에, 웰즈는 차기작으로 계획했던 <잇츠 올 트루>의 촬영을 위해 브라질로 떠나게 된다. 리오 카니발 장면이 꼭 필요했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당시 <위대한 앰버슨가>의 편집 담당은 로버트 와이즈였는데, 웰즈는 그와 전화와 전신으로 연락을 해가며 원격 편집 감독을 했다. 이런 방식은 한 달여 동안 순조롭게 이루어져 132분짜리 오리지널 판본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런데 42년 3월, 당시 RKO의 수장이었던 조지 셰퍼는 와이즈에게 영화 길이를 좀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 했고, 와이즈는 이를 웰즈에게 전한다. 웰즈가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사이, 무작위의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오리지널 판본의 첫 사전시사가 진행되었다. 관객들로부터 회수된 설문 결과는 그리 처참한 편이 아니었지만, 당시 참가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상영장의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했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경영진들이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이틀 후에 임의로 17분을 단축시킨 115분 버전의 시사회를 한 것인데, 이번에는 설문 결과가 조금 더 호의적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웰즈는 이후에 영화를 더 단축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이에 따라 웰즈는 여러 가지 수정안들을 미국으로 보내지만, 마침내 셰퍼는 웰즈의 동의 없이 재촬영을 결정한다. 결국 재촬영 분량들을 끼워 넣고 러닝타임을 단축시키고, 장면들의 순서를 바꾼 상태로 <위대한 앰버슨가>는 결국 42년 8월에 개봉했고, 처참히 실패했으며, 웰즈는 다시는 헐리우드에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이런 대략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원래 웰즈가 만들려고 했던 <위대한 앰버슨가>를 상상적으로나마 그려보고 나서야 여기서 드러나고 있는 아나크로니즘, 시대착오적 감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웰즈의 몇몇 특이한 영화들, 대표작인 <시민 케인>이나 후기의 걸작 <한밤의 종소리>, 혹은 <위대한 앰버슨가> 못지 않게 수난을 겪다 결국 미완으로 남겨진 <돈키호테> 같은 영화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사라져간 귀족적 용맹함에 대한 송가라고 할 수 있는 영화들이다. 휄즈는 실제로 자신이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미덕들이라고 말했다. 이는 어떤 매너나 예법,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던 시대에 대하 향수가 아니라, 매너나 예법을 넘어서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고 그것이 생기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에 대한 향수다. 이 영화에서 어린 시절의 조지는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런 소년이 마을 안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사실 웰즈적 영웅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그들 모두가 자신의 시대에 충실한 채로 남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구식이 되었음을 알고도 그것을 용기 있게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이 구식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구식으로 남는 것은 차이가 있는데, 웰즈의 인물들은 전자다. 조지 역시 그런 사람이고, 심지어 유진조차도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자신이 예견했던 시대와 어긋난 사람이 된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유진이라는 캐릭터가 꽤 중요한데, 이 인물에게는 웰즈의 좀 다른 측면의 아나크로니즘이 투영되어 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것이 흔히 뒤쳐진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나크로니즘이라면, 발명가인 유진은 자신의 시대와 다른 새로운 시대를 불러들이는 사람이지만 정작 그 시대가 왔을 때는 그 시대와 자신이 맞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는 사람이다. 사실 이 영화를 거듭 볼수록 가장 웰즈적이라고 느껴지는 인물은 조지가 아니라 오히려 유진이다. <위대한 앰버슨가> 같은 영화들을 만들던 시기에 웰즈는 혁신가였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이 길을 닦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영화들의 시대가 왔을 때 그는 구식 인물이 되어있었다. 예언적이라고까지 말하는 건 아니지만 유진이라는 인물은 웰즈가 느꼈을 시대에 대한 어긋남이나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인물들은 타임머신이 발명된다고 해도 자신과 맞는 시대를 발견할 수 없다. 오직 시대와의 어긋남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들이다. 남아있는 판본들과 사료들을 통해서 재구성해보면, 이러한 웰즈의 시대착오적 영웅들의 딜레마가 가장 잘 표현된 영화가 바로 <위대한 앰버슨가>라는 생각이 든다.

(정리: 박예하 관객 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