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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talk

[시네토크] 치밀한 기록이 더 큰 생명력을 가진다 - 김동원 감독이 말하는 <칠레전투>


시네토크

치밀한 기록이 더 큰 생명력을 가진다

- 김동원 감독이 말하는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칠레 전투 3부작'


올해로 8회째인 '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마지막 주인공은 김동원 감독이다. 영화제 마지막날이었던 24일은 그가 선택한 <칠레 전투> 3부작이, 약 4시간 반 동안 상영되었다. 마지막 3부 상영 후 이 작품을 선택한 김동원 감독과의 시네토크에서는 비껴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고민들과 다큐멘터리가 가진 기록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김동원 감독은 영화 속에 나왔던 빅토르 하라의 노래 ‘우리 승리하리라’를 찾아 관객들과 함께 들어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영화제 대미를 장식한 그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공교롭게도 새로운 정권이 시작되는 첫 날의 하루 전에 의도치 않게 이 영화를 틀게 되었다. 우연처럼 상영하게 되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 이 영화를 추천하셨고, 어떻게 이 영화를 어떻게 접하게 되셨고, 다시 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하셨는지.

김동원(영화감독): 내가 이 영화에 대해서 처음 들은 건 86, 7년 쯤인 것 같다. 장선우 감독이 쓴 책에 남미의 영화들이 소개되었는데, 그 때는 볼 방법이 없었고, 90년대 지나서 책에 있던 영화들을 구해볼 수 있었다. 그 때 시네마 누보 운동과 맞물려 쓰이는 용어인 ‘제 3영화’들이 현실과 치열하게 맞닿아 있는 영화라고 소개 되었는데, 사실 조악한 비디오 화질이라 그런지 (영화에 대해) 실망한 경우가 많았다. 98년도에 인권영화제를 통해 <칠레 전투>를 보았는데, 4시간 반이라는 것을 알고 겁을 먹었으나 한 번 보기 시작하니 지루하다는 느낌 없이 보게 되었다. 그 다음에도 몇 번씩 보면서 새로운 디테일들이 새록새록 다가오면서 매번 나에게 큰 영화가 되는 기분을 느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셨을까 궁금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있었던 현장들, 상계동부터 최근에 용산이나 강정 같은 곳의 주민들 얼굴이 떠올랐고 투쟁 과정들이 영화와 오버랩 되는 걸 많이 느꼈다. 오늘도 영화를 보면서 구즈만 감독이 끝까지 가졌던 희망의 크기가 지금 나에게 어느 정도의 크기로 남아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성욱: 새롭게 다가오는 디테일이 어떤 것들인지 궁금하다. 이 다큐멘터리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이 다큐를 어떤 시각을 가지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면.

김동원: 이 영화를 보고 영화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이 얼만큼 의의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는 72년부터 73년까지 1년여 동안 촬영을 하고, 편집까지 포함해 제 3부작이 완성되기까지는 6년이 걸렸다고 한다. 감독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1부, 2부는 주로 부르주아들의 반혁명, 즉 그들이 어떤 논리로 아이옌데를 공격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는가에 대한 논리와 과정들이 촘촘하게 들어가 있다. 반면, 노동자들과 민중의 시각에서 아이옌데 집권 하에 있었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실험들과 민중이 힘을 키워나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노동자들과 민중의 역량을 따로 모아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1부, 2부에서는 아무런 음악이 깔리지 않는다. 구즈만 감독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건조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1, 2부를 묘사하고 있다면 3부에서는 애잔하게 편곡된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빅토르 하라의 노래를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반복해서 들려준다. 이는 구즈만 감독의 주관적인 정서일 수 있지만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1부, 2부에서는 감독이 중립적이지는 않되 최대한 객관적이려 하는 태도였다고 한다면, 3부에서는 자기 속내를 마음껏 내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구즈만 감독이 자기 자신을 억누르면서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맨 마지막에 자기의 표현을 하긴 했지만, 그 표현마저 절제되어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구즈만 감독이 이 영화를 끝내고 당연히 망명을 해야만 했다. 쿠바에서 편집을 하고 세계 곳곳을 유랑하다가 95년 즈음 20년 만에 (칠레에) 돌아왔다고 한다. <칠레 전투>를 90년 초 무렵 젊은이들에게 보여주는 장면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에 나오는 사람들을 몰아넣고 학살했던 국립 경기장 같은 장소들, 영화를 찍다 죽은 카메라맨인 호로세 뮬러의 가족들도 만나는 것을 엮어서 <칠레, 끈질긴 기억>을 만들었다. 그 영화도 인권 영화제에서 봤는데, 구즈만 감독은 첫 영화인 이 영화에서부터 최근의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까지도 아이옌데 시절과 혁명기의 칠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가들은 한 가지 주제에 평생을 매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구즈만 감독도 다른 주제의 영화들은 없는 것 같다. <칠레, 끈질긴 기억>에서 보면 젊은이들이 20년 전에 조국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더라.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이 영화를 보여주는데, 여기저기서 “우리에게 이런 역사가 있었는지 몰랐다”며 흐느끼기도 한다. 구즈만 감독은 역사에 대한 이 트라우마를 가지고 평생 작업을 하는 것 같다.



김성욱: “기록되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다”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한국의 경우에도 80년대 후반 이전까지는 기록 되었던 부분들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이옌데 정권 시절에 구즈만 감독도 극영화를 찍을 생각을 했다가, 지금은 극영화를 찍을 때가 아니라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영화가 없었다면 그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다른 기록을 통해서는 알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현장성 있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록이 가진 힘이 다른 다큐멘터리보다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사건 이후에 ‘재구성’해나가는 게 아니라, 현장의 중심에서 기록을 해나갔다는 것 자체가 크게 와 닿았다.

김동원: 다큐멘터리는 기록을 하는 영화지만, 최근에는 기록보다는 감독의 주관성을 표현하는 데 더 많이 쓰이기도 한다. 기록을 한다는 것은 대상을 제작 주체보다 우위에 놓는다는 태도인 것 같다. 그만큼 대상을 존중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구즈만 감독이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지만, 자기 의견을 드러내는 것을 굉장히 절제하는 태도를 보인다. 누가 기록하느냐 보다 ‘기록됨’이 더 중요하다는 태도일 것이다. 영상시대에는 카메라로 누군가를 찍지 않으면 글로 아무리 열심히 쓴다 하더라도 묻혀진 역사가 되고 말지 않나. 요새는 ‘찍(히)지 않으면 역사가 아니다’라고도 말한다. 시각적으로 확인할만한 기록, 대중들이 다가갈 만한 통로가 없으면 수많은 역사들이 묻히고 만다. 칠레의 9‧11에 관한 영화들은 이 영화 말고도 많다. 그러나 이 영화만큼의 무게감을 가진 기록물은 없는 것 같다. 영화적인 완성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옌데 집권 3년 동안에 과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건이 어떤 변증법적인 충돌을 가지면서 전개되었는지 이 영화만큼 꼼꼼하게 찍은 기록물이 없다고 본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솔라나스 감독의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가 당시에는 더 문제작이었다. 이 영화는 솔라나스 감독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스타일의 힘은 강하지만 기록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점에 와서 평가를 하자면 솔라나스가 실험했던 화려한 수사, 강렬한 톤은 구즈만의 냉정한 톤이 가진 영화적 힘에 못 미친다고 본다. 결국 치밀한 기록이 훨씬 더 큰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정리: 지유진(관객에디터) 사진: 김윤슬(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