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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Talk

[시네토크] 젊음이란 것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 이창동 감독이 선택한 제리 샤츠버그의 <허수아비>

2월 4일, 국내관객들에게도 조금은 생소한 제리 샤츠버그의 <허수아비>가 매진을 기록했다. 이창동 감독의 시네토크가 있던 날이었다. 상영관을 가득 매운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시네토크 내내 자리를 뜨지 않았고 감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많은 질문들이 오갔고, 질문들 하나하나에 차분하게 대답하던 이창동 감독의 모습은 영화의 여운 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젊음이란 주제를 떠올려 이 영화를 선택했다는 이창동 감독과의 대화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프로그램 디렉터):
오래간만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것으로 알고 있다. 제리 샤츠버그 감독은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일원이긴 했지만 오랫동안 잊혀진 감독이었다. 여전히 국내관객들에게도 그의 작품은 생소한 편이다. <허수아비>를 선택한 이유를 먼저 듣고 싶다.

이창동(영화감독): 사실 무언가 추천한다는 게 굉장히 어렵다.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고, 많은 영향을 받아서라기보다, 어떤 영화를 추천해야 나에게도,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의미가 있는 작품일까를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주제를 먼저 생각하기로 했다. 이번 경우에 ‘젊음’이라는 주제를 먼저 떠올렸다. 영화를 좋아하고, 그 감정이 가장 강했을 때가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까지였다. 그때 영화들을 보며 느꼈던 어떤 감성이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소중하고, 지금은 많이 닳아 없어진 것 같아서 어떤 슬픔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젊음’에 관한, 젊은이들의 감정을 그린 영화들을 골라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요즘의 시대적 분위기라고 하는 것이, 젊은이들이 과연 삶에 희망이 있는지, 일단 취직과 같은 아주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좀 더 멀리까지, 삶의 희망 같은 것을 생각하고 그런 것을 화두로 삼는 시대인 것 같다. 그래서 ‘젊음’이란 것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었다.

이 영화는 이십대 때, 극장이 아니라 TV에서 봤다.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보다가, 점점 영화에 빠져 들어갔고, 영화가 끝난 뒤에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굉장히 복잡한 슬픈 감정을, 굉장히 두께가 두꺼운 감정을 느꼈다. 이 영화를 추천하면서, 영화를 보며 그때의 그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지 한 번 확인해보고도 싶었다.


김성욱:
이전과 달리 오늘 볼 때의 느낌의 차이가 있었는지?

이창동: 비슷한 느낌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보다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이전에 봤을 때는 지금보다 더 강한 감정을 느꼈을지는 모르나, 영화에서 보이는 것들이 그렇게 명료한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그때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저게 도대체 뭐지?’하는 느낌을 많이 갖고 있었다. 지금은 이 관계가 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둘의 관계는 친구이기도 하고, 어쩌면 연인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부자관계일 수도 있는,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관계이다. 그래서 삶이나 인간관계에 대해서 훨씬 더 중첩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젊었을 때는 어쩌면 연인과의 관계보다도 친구와 만나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훨씬 더 강한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친구관계라는 것이 중요한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친구관계를 바탕으로, 성을 뛰어 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들이 좀 더 분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김성욱: 두 번의 이상한 파티 장면이 인상적으로 기억되는데, 두 사람이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느낌이다. 여행이 직선적이었다면 두 장면에서는 원형적이고 공동체적인 느낌이 있다. 감독님은 어떤 장면을 인상적으로 보았는지 궁금하다.

이창동: 기억 속에 있는 인상 깊은 장면은 영화의 시작 부분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과 분수대에서 난동 피우는 장면이었다. 오늘 보니까 그것들과 함께 다른 강렬한 장면들도 많이 눈에 띈다. 축제와 같은 것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이 영화에서의 그 두 번의 파티 장면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 외지인으로 들어와서 함께 어울리게 되는 상황인데, 그 둘과 그들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실 영화에서 그 축제가 별 볼일 없어 보이고, 그 자체로는 재밌어 보이지는 않는데, 그걸 삶에서 흔히 경험하지 못하는 즐거운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 같은 것이 보인다. 특히 스트립쇼 같은 경우는 어떤 성적인 느낌도 물론 있겠지만, 자신이 껴입던 옷을 다 벗어버리는 모습에서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추한 것까지 다 드러내고 싶어 하는 그런 모습이 느껴졌다.


김성욱:
두 남자의 관계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알 파치노가 연기하는 인물은 동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진 핵크만이 연기하는 인물은 굉장히 모순적이다. 진 핵크만과 같은 복합적인 남성성의 묘사는 당시 70년대의 영화 안에서도 독특하다고 느꼈다.

이창동: 진 핵크만은 별난 남성성을 갖고 있고, 약간 마초적인 느낌도 있다. 알 파치노와 대조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장점이자 개성은, 두 인물 모두 우리가 쉽게 규정하기 힘든, 굉장히 복잡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진 핵크만은 아버지의 모습 같은 면도 있고, 그러면서도 현실에서 콤플렉스나 열등감을 갖고 있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상처를 지닌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 점이 흥미롭다. 결국은 이 영화를 쉽게 해석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단순히 ‘허수아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개념을 넘어서서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김성욱:
제리 샤츠버그는 언젠가 “당신은 배우와의 작업에서 훌륭한 성취를 이뤄냈다”라는 말에 “나는 훌륭한 배우를 캐스팅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배우와의 작업을 어떻게 했을까가 궁금한데, 감독님의 경우에도 배우와의 작업을 어떻게 생각하나?

이창동: 작년 칸 영화제에서 샤츠버그의 데뷔작을 복원해 상영했었다. 영화제의 포스터는 페이 더너웨이가 젊었을 때의 모습의 흑백 이미지인데, 페이 더너웨이가 바로 샤츠버그의 데뷔작에 나왔었다. 샤츠버그는 원래 잘 나가는 상업 사진작가였다고 한다. 그의 데뷔작을 픽업한 것이 칸 영화제였다. <허수아비>는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으니까, 칸으로서는 자신들이 발굴한 감독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사실 샤츠버그의 다른 영화를 본적이 없어서, 칸 영화제에서 샤츠버그와 만나 얘기할 때 많이 긴장했었다(웃음).

샤츠버그에 대한 인상은 굉장히 합리적이고,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좋은 배우를 캐스팅했을 뿐이다”라는 대답은 연기의 본질을 꿰뚫는 대답이 아닐까 싶다. 가끔 학생들에게도 “연기 연출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건 감독의 오만일 뿐이다.”라고 얘기한다. 어떤 배우를 캐스팅해서 그 배우가 어떻게 하게 하느냐까지가 감독의 역량이다. 연기는 감독이 시키는 게 아니라, 배우가 스스로 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잘 할 수 있는 배우를 잘 못하게 하는 경우인데, 오히려 연출의 과정에서 그런 경우가 있다. 열심히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배우들이 점점 더 잘 못하게 만드는 그런 경우가 있다(웃음).


김성욱:
영화의 엔딩이 인상적이다. 영화의 시작도 대단히 어렵지만, 어떻게 끝내느냐 것도 언제나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엔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창동: 엔딩도 놀랍지만 이 영화의 시작도 놀랍다. 길 위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5분도 채 안 걸리는 시간일 텐데, 그 시간 동안 특별한 이야기 없이도 두 사람이 서로 공감하고, 같이 길을 걸을 수 있는 마음의 유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적인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피츠버그행 왕복표를 끊는다는 것은 결국 돌아온다는 의미일 것이고, 그 표를 끊는 단순한 장면을 통해 관객들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끔 한다. 그가 신발 밑창에서 돈을 꺼내고, 그 앞에서 신발을 두드리는 것이 저항의 느낌일 수도 있고, 또는 앞으로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보겠다는 느낌도 있다. 아주 작은 디테일이지만 많은 것을 함께 갖고 있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런 장면은 보기는 쉬운데, 막상 찍기도, 시나리오를 쓰기도 어렵다.

김성욱: 영화를 만들 때 엔딩을 미리 염두에 두는 편인가?

이창동: 엔딩이 잘 안되면, 시나리오 자체를 못 쓰는 편이다. 내 나름대로는 어쨌든 시나리오 상에서 어느 정도 엔딩이 만들어져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관객1: 영화를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시는지 궁금하다.

이창동: 작품마다 매번 다른 것 같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생겨서 영화를 만들 수도 있지만, 돌이켜 보면 영화들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생각해왔던 것이 쌓여서 축적되어 있다가 어떤 작은 계기를 만나 그것이 튀어나와서 작용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를테면, <박하사탕>의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냐는 질문에, 어느 날 화장실에서 면도를 하다 거울을 보고, ‘내가 왜 이렇게 늙었나.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를 떠올렸다고 종종 대답했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나, 사실 거의 거짓말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런 아주 작은 계기로 <박하사탕>의 이야기 구조를 다 생각해낸다는 것은 거짓말에 가깝다. 그런 것들이 오랜 동안 쌓여서 어떤 아이디어를 형성할 수 있다.


관객2:
영화를 보며 내가 잘 알지 못했던 남자의 모습, 아버지의 모습을 느꼈다. 감독님은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지 궁금하다.

이창동: 말씀하신대로 이 영화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허수아비처럼 무력해진 아버지, 아버지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인물의 이야기이다. 저의 아버지는 이 영화의 인물만큼이나 굉장히 무력한 아버지였다. 한국사 전체로 보더라도 제 세대의 아버지 세대가 그런 세대인 것 같다. 자기가 선택할 수 없었던 역사의 격변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세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아버지는 자기 파괴적으로 사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마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때로는 반면교사로 작용하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닮아가면서, 나를 형성하는 상당히 큰 부분이었을 것이다.


관객3:
오늘 ‘젊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고 하셨는데, 감독님께서는 20대 초반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보내고 싶으신지 궁금하다.

이창동: 시간은 결코 결과를 알고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이 시간의 뒤에 뭐가 있는지 안다면 절대로 이렇게 살지 않을 거다. 그러나 뭐가 오는지 알 수 없는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박하사탕>을 만들면서 전하고 싶었던 것이 그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영화가 너무 결정론적이지 않느냐고 얘기하기도 했지만, 사실 제 의도는 그 반대였다. 결과를 먼저 알고서 원인을 거슬러서 인간을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지 실감하기를 바랐고, 이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젊은 관객들이 뭔가 다른 선택을 하면서,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이 있었다. 영화가 영화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끝을 내기 바랐기 때문에 그런 영화가 됐다. 지금 젊은 분들은 자기에게 다가올 결과를 알 수 없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시간의 엄격함과 무게를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나이가 들면서 불행한 건, 젊었을 때 가졌던 현실에 대한 아픈 생각들, 스스로에 대한 감정들 같은 것들이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퇴색해간다는 것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감수성, 감각이 점점 더 무뎌져 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현명해진다고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점점 더 희망을 잃어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젊은 분들이 지금의 고통이나 절망을 자기 것으로 껴안고, 그것을 자기의 재산으로 여겼으면 좋겠다.



정리: 장지혜 (관객에디터)     사진: 이호규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