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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프랑수아 트뤼포 전작 회고전

[시네토크] “트뤼포의 영화세계”

지난 7월 1일, <부드러운 살결> 상영 후 유운성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의 강연이 이어졌다. 유운성 프로그래머는 트뤼포의 초기작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며, 비록 개봉 당시엔 냉대를 받았지만, 이후에 재평가 받으며 트뤼포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라는 이야기로 운을 떼었다. 트뤼포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예외적으로 보이는 작품이기도 한 <부드러운 살결>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트뤼포 영화 세계 전반의 특징적인 면들을 짚어나간 이 날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유운성(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 작년 미국의 필름포럼에서 <부드러운 살결>이 상영되었을 때, 짐 호버만은 이 영화를 두고 재평가되어야 할 영화라고 쓰면서, ‘가정domestic 서스펜스 영화’라고 표현한다. 개인적으로는 ‘친밀함intimacy의 서스펜스’라고 부르고 싶다. intimacy는 친밀함의 의미도 있지만 성적 의미도 갖고 있다. 이 ‘친밀함intimacy'를 가지고 트뤼포의 영화 세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다.

 

친밀함의 서스펜스

‘친밀함’이라는 말을 정의한다면, 오직 둘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관계라고 말하고 싶다. 둘 이외의 다른 어떤 관계가 끼어들거나, 보아서도 안 되고, 시각적으로든 언어적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둘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노출되어서도, 알려져서도 안 되는 관계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두 가지 충동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내부적으로는 이 관계를 감춤과 동시에 알리고 싶어 하는 충동이 있고, 외부적으로는 그런 관계의 낌새가 있을 때 바깥의 사람들이 그 관계를 알고 싶어 하는 충동이 있다. 친밀함의 관계가 성립이 될 때, 그것은 굉장히 흥미진진한 영화적 소재가 되는데, 문제는 영화는 이 친밀함’ 담아내기에 굉장히 불편한 매체라는 점이다. 관계 외부의 듣는 사람, 듣는 기계 같은 것을 일체 허용하지 않아야하는데, 이미 카메라가 관계를 포착하는 순간 친밀함은 파괴된다. 영화는 친밀함에 굉장한 호기심을 갖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다루기 불편한 매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친밀함의 관계를 맺고 있는 당사자들이 이걸 파괴하는 가장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은 자신들의 성적인 관계를 직접 카메라로 담아내는 셀프포르노 형식이 될 것이다.

영화는 바라보는 것, 응시 없이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영화가 아무리 친밀함의 공간에 호기심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영화적으로 하면, 결국은 관음증적인 형식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트뤼포가 가장 좋아하는 히치콕 영화 중 하나인 <이창>의 두드러진 테마이기도 하다. 트뤼포는 영화가 친밀함의 공간에 다가가려고 하면 관음증적인 것이 되거나 그 관계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굉장히 잘 알았던 감독이었다. <이창>같은 영화는 이런 공간에 다가가면서 사실은 그것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의식, 죄책감이 있기 때문에 영화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변명이 필요해진다. 가령 <이창>의 제프리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있다는 설정은, 실체적 결함 자체가 그런 죄책감을 시각화한 것으로 보인다. 결말부에 가서 주인공이 나머지 다리까지 깁스를 한 것은 죄책감을 갖고 기어이 모험을 한 것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트뤼포는 이런 식의 역설적인 구조를 꽤나 두려워했던 감독처럼 보인다. 트뤼포는 영화에서 베드씬 찍는 것을 꺼려했던 감독이었다. 친밀한 관계에 대해 호기심은 있는데, 패러독스도, 죄책감도 싫어했던 점들이 트뤼포 영화의 모순적인 태도들과 다양한 면모들을 만들어낸다. 트뤼포는 동료 누벨바그 감독들 중 어떤 이보다도 친밀함이라는 관계, 그 관계가 이뤄지고 있는 영화적 공간에 대해 깊이 관심 갖고 있던 감독이었다. 트뤼포의 연애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친밀함의 공간에 다가가면서 그것의 직접적인 재현을 피하려는 일련의 시도들로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장르로 가거나 영화 스타일 자체를 전시하는 식으로 눈가림을 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뭔가 보고 싶고, 관찰하고 싶은 건 있는데, 여기에 결부되는 죄책감은 피하고 싶다는 데에 트뤼포 특유의 유아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관음증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고 어떻게 친밀함의 공간으로 다가갈 것인가.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죄책감만이라도 피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나오는 트뤼포의 세 가지 해결책이 있다.

 

트뤼포의 세 가지 도피법

첫 번째는 죄책감을 덜 가지는 상태에서 다가가기이다. 이 방식은 친밀함의 공간에 개입하거나 들어가려는 사람을 어린이와 어른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부의 침실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아이처럼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트뤼포는 자신의 남자주인공을 그런 식으로 가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인물이 어쨌든 영화에서는 성인으로 나타나니까 사회적으로는 무능하고, 성인의 특성 가운데 일부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은, 다리에 깁스를 한 주인공이라는 히치콕의 물리적인 처리방식이 심리적이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처리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이런 점에서 트뤼포의 ‘앙트완 드와넬 연작’의 장 피에르 레오가 굉장히 트뤼포적인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해결책은 친밀함이 두 사람 사이에서 성리보디는 것이라는 전제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이다. 친밀함과 유사한 감정으로 유지되는 삼각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쥴 앤 짐>같은 영화의 토대를 이루는 구조로,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같은 영화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시도가 그렇다는 것이지 성공하진 못한다. 결국은 두 명의 시선으로 지탱되는 친밀함의 공간과 그걸 바라보는 카메라에 대한 메타포로 삼각관계가 등장하는데, 친밀함의 원래의 전제를 억지로 감추려고 하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에서 결국은 친밀함의 공간은 사실 두 사람의 것임이 확인되고 밝혀진다. <쥴 앤 짐>은 계속해서 쥴과 카트린, 짐과 카트린으로 오가고 결국 마지막엔 동반자살이라는 아주 가혹한 방식으로 친밀함이란 둘 사이에서밖에 성립될 수 없다는 전제를 확증하고 끝난다.

세 번째 방식은 친밀함의 순간이나 관계들을 장르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영화 장르라는 것은 카메라가 바라보는 기계장치라는 불편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이런저런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죽음을 기록한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고, 때로는 외설스러운 일일수도 있는데, 이런 죽음이 장르, 이를테면 범죄영화나 전쟁영화, 액션영화에서는 죄책감 없이 카메라가 죽음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애의 과정을 바라본다는 것은 굉장히 민망한 일이지만, 이런 민망함을 덜어줄 수 있는 장르가 스크루볼 코미디나 뮤지컬이 될 수 있다. 멜로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섹스와 그것의 실패를 낭만화하는 작업이다. 트뤼포가 어떤 식으로든 차용하고 있는 이 장르들은 친밀함의 공간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뤼포는 친밀함의 공간의 구조를 누구보다도 호기심을 갖고서, 죄책감을 덜고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던 탓에 말씀드린 이 세 가지 도피법을 오가며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트뤼포의 필모그래피를 얼핏 보면 다른 누벨바그 동료들과 비교했을 때, 예술적인 연속성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비평가 시절에 이른바 작가정책의 주창자였던 트뤼포는, 자신이 감독이 되자 작가정책의 구원비평의 수혜를 가장 필요로 하는 감독이 되었다. 그 결과 샤브롤과 함께 가장 누벨바그적인 작가가 되었다. 고다르와 리베트는 아주 명료하게 극단적인 아방가르드 실험으로 갔고, 이른 태도는 사실 5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 시절에 내세웠던 ‘작가’라기 보다는 ‘예술가’의 형상이었다.

 

불편함의 정면 응시

<부드러운 살결> 같은 영화는 트뤼포 영화 경력에서 불편함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아주 드물고 희귀한 시도로 보인다. 불편함이라고 하는 것이 이 작품에 서스펜스를 낳는다. 이 영화 이전에 트뤼포가 만든 세 편의 영화 <400번의 구타>, <피아니스트를 쏴라>, <쥴 앤 짐>은 앞서 말씀드린 트뤼포의 세 가지 해결책을 차례로 제시한 영화들이었다. <부드러운 살결>은 세 가지 시도를 다 거친 다음 그것을 파기하고, 친밀함의 공간에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방식을 취한다. 트뤼포는 이 영화에서 시도했던 것과 같은 불편함을 감당하기에는 여린 구석이 있었던 감독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 이후에 적어도 관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일한 <부부의 거처>를 찍는데, 설령 부부관계와 연애관계에서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부드러운 살결>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부드러운 살결>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털어내면서, 불륜 혹은 간통이 유머와 코미디를 통해 죄책감을 경감시키는 아주 잘 알려진 트뤼포의 방식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부부의 거처>는 황당한 조합을 띈다. 르누아르의 <랑주씨의 범죄>에서의 공간의 구조 안에서 자크 따띠의 영화를 연상케한다. <부드러운 살결>에서와 같은 트뤼포의 모험 또는 시도는 불행히도 한 번에 그쳤고, 프랑스 영화 안에서 이런 식의 대담한 방식으로 극도의 친밀함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계승이 되었다면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가 아닐까 싶다.

<부드러운 살결>은 친밀함의 관계, 특히 불륜을 소재로 삼아서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데 따르는 서스펜스를 담아내는 데 최선을 다한다. 영화에서 두 연인들이 친밀함의 공간을 성립시킬 수 있는 공간들을 찾아 헤매는데, 적어도 이 영화에선 결국은 호텔방이거나 둘의 일체의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낯선 시골의 모텔 정도 밖에 없다. 트뤼포는 만들면서도 이 영화가 히치콕적인 서스펜스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트뤼포가 왜 히치콕이라는 감독을 그렇게 좋아했을까를 생각해보면, 히치콕의 영화가 궁극적으로는 섹스로 향하는 연애의 도정을 서스펜스 모험의 형식으로 가장 탁월하게 담아내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히치콕의 영화는 모험의 과정은 보여주지만 항상 성관계 직전에 끝나버린다. <부드러운 살결>의 초반에 리스본 호텔의 엘리베이터 장면을 보면, 굉장히 히치콕적인 방식으로 찍혀졌다. 주인공 라쉬네와 스튜어디스인 니콜, 니콜이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장면에서 긴장감을 포착해내는데, 서스펜스를 담아내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올라갈 때의 시간을 실제의 시간보다 훨씬 길게 잡는다. 히치콕적인 서스펜스에서의 시간의 왜곡을 잘 활용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리스본 호텔의 엘리베이터에서 과거의 연인이었던 두 남녀의 공간에 침입해서 관찰을 했더 라쉬네는 영화가 진행되면 자신과 니콜과의 친밀함을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애쓰게 있다. 이 영화는 <신나는 일요일>처럼 노골적인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히치콕의 <이창>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라쉬네에게는 <이창>의 제프리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깁스가 스토리와 스타일상 무려 두 개가 있다. 트뤼포가 이런 식의 직접적인 방식으로 친밀함 공간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죄책감을 경감시키기 위한 , 혹은 죄책감을 안고 이 영화를 찍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메타포적인 깁스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깁스는 주인공 라쉬네가 갖고 있는 작가로서의 명성이 있다. 명성이라는 것은 <이창>의 깁스보다 훨씬 더 고약해서 자꾸만 타인의 시선을 끌어들여 친밀함을 방해한다. 두 번재 깁스는 스타일상의 선택으로 보이는데, 라쉬네 역할의 배우 장 드사이의 연기에서 표현적인 요소를 거의 박탈해버린다. 트뤼포 영화 중에서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의 주인공과 더불어 유독 가장 매력 없는 남자주인공이다. 이처럼 무색무취하고 매력 없는 인물이 있었나 싶다. 스타일상의 면에 있어서 이 인물에게 깁스를 해버리는 방식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마 이 인물을 연기한 배우가 역할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고 실제로 트뤼포도 이 배우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 영화를 좀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은 라쉬네라는 인물이 굉장히 친밀한 관계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를 바라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 점은 이 영화가 뒤틀리는 계기가 된다. 오늘날로 보면 라쉬네라는 인물은 셀프 카메라 형식으로 자신들의 연애를 간직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라면 트뤼포 감독 자신의 꽤 정확한 반영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 라쉬네가 우연히 불륜의 관계에 빠져들었다기보다, 사실은 극단적으로 서스펜스를 유발할 수 있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관찰하기 위해 여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야외에서 카메라로 여자의 모습을 열정적으로 기록하다가 자동으로 놓고 자신도 함께 사진을 찍는다. 스스로 아내와의 불화를 만들어낼 증거를 기록하는 셈이다. 사실 이처럼 사진이라고 하는 것, 혹은 사진을 수집한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트뤼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트뤼포 영화 안에서 그것은 꽤 중요한 계기가 될 때가 있다. 한편으로는 사진을 찍는 행위 그 자체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이창>의 주인공과 연결된다.

트뤼포는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왜 이런 식의 영화 찍기로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을까. 영화적 친밀함이라는 것이 항상 외설적인 것의 경계에 있는데 그 것이 경계에 머물기 위해선 친밀함 자체를 시각화하지 않는 한에서만 외설의 바깥에 머물 수 있다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그런 친밀함을 담아내야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다가가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그건 영화 자체의 딜레마이기도 하면서 트뤼포의 다양한 연애영화들을 생성하게 만든 동기가 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부드러운 살결>은 트뤼포 이후의 다양한 도피의 방식들로 다시 가기 전에 있었던 좀 특이한 사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트뤼포가 연애, 영화, 관계에 대해서 접근하는 모든 강박관념, 불안, 죄책감, 서스펜스와 같은 것이 모두 담겨져 있는 영화로 보인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 김아라(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