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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스타일의 혁신: 닛카츠 창립 100주년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

[시네토크] “이마무라 쇼헤이, 일본영화사에서 전무후무한 감독”

<끝없는 욕망> 상영 후 유양근 박사와의 시네토크 지상중계

 

지난 10일, 이마무라 쇼헤이의 <끝없는 욕망> 상영이 끝난 후 유양근 박사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스즈키 세이준을 중심으로 진행된 이번 닛카츠 100주년 특별전 가운데에서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특별한 자리였다. 50년대 전후 신세대 일본 감독들의 특징과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세계의 디테일을 짚어보던 현장을 전한다.

 

 

유양근(니혼대학 예술학 박사): 이번에 함께 상영한 <인류학 입문>을 보신 분들은 이마무라 쇼헤이가 대략 어떤 유형의 영화를 찍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에 이르기까지 사실 이마무라는 어느 정도 일관된 작품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 보신 <끝없는 욕망> 안에 그런 공통점들이 상당부분 드러나 있다.

 

50년대 중후반은 일본에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났고, ‘전후는 끝났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전쟁의 아픔이나 현실적인 문제에서 회복되었다는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와 더불어 전장을 경험하지 않은 신세대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나라를 망가뜨린 기성세대가 아무런 반성도 없이 이전에 하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분노한 상태였다. 그 분노에는 이때까지 일본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에 대한 부정과 미국식 민주주의를 따라가자는 여론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이 시기에 등장한 신세대 감독들의 영화에서도 나타났다. 닛카츠는 전쟁 전에도 이미 있었지만 전쟁이 활발해지면서 국책으로 다른 회사와 합병되어 없어졌었다. 그런데 50년대 후반에 제작 부분이 회생되어 일종의 신생회사가 되었다. 당시 일본영화는 도제 시스템으로 감독이 되기까지는 조감독 5, 6년, 그 전 견습생을 포함해서 총 15년, 길게는 20년이 걸렸다. 그러나 새로 생긴 닛카츠는 신인 감독들을 등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마무라도 여기에 속한다. 예전의 룰에 따르면 감독이 되기 힘들었던 젊은 세대가 감독이 될 수 있는 세태가 생긴 것이다. 이 세대는 또한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전 세대인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 등의 거장들이 가지고 있는 학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세대의 감독들은 영화사에 들어가서 감독이 하는 일들을 보고 그걸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폭이 굉장히 넓은, 대학교육을 받은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다 보니 나타나는 캐릭터들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또한 일본영화에서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인 ‘템포’도 달라졌다. 커트 수를 떠나서 스토리의 전개 방법이나 캐릭터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템포다. 이전까지는 상당히 느리고 정보를 많이 주는 방식이었다면 이들은 스토리텔링을 빠르게 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런 영화가 결국 젊은 세대에게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끝없는 욕망>은 오프닝부터 굉장히 이색적이다. 이마무라는 평이한 앵글을 써오던 이전세대의 감독들과 달리 특이한 앵글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일종의 분할화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위에 있는 부분과 아래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는 합성과 세트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그는 지속적으로 부감에 가까운 각도를 사용한다. 사람들 머리 위에서 상황을 한 번에 잡는 앵글이다. <붉은 살의>나 <돼지와 군함>에서도 이런 샷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일종의 모험심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인간세상 사는 것들이 다 똑같은 것 아니냐’ 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조명 역시 독특하다. <도둑맞은 욕정>이나 <끝없는 욕망>은 사실 일종의 코미디이다. 이런 영향을 준 사람은 그와 함께 많은 작업을 했던 가와시마 유조라는 감독인데, 그 감독의 작품들이 소시민들의 삶을 다룬 가벼운 희극이었다. 거기에 비해 이마무라는 자신의 작품을 ‘중희극’, 무거운 희극이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희극임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의 <싸이코>에서 보일법한 흔들리는 조명들을 쓰고 있다. 이는 장르를 떠나 상황에 맞게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그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캐릭터다. 이전의 영화들은 악역과 선한 역이 분명한 차이를 보였고 끝내는 선이 악을 이기는 이분법적 스토리였다. 그러나 이마무라의 영화에서는 그다지 착한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악인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고 그 둘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마무라는 사람 사는 것은 다 양면성을 지니고 있고, 그런 인간을 사랑하며, 그 캐릭터를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중심적 모티프 중 또 하나가 ‘구멍 파기’다. <신들의 깊은 욕망>에서는 남근 모양의 바위를 파서 무너뜨리는 형벌을 받는 남자가 나온다. 50년대 중후반에 나온 영화 제목들 중에 욕망이나 욕정이라는 단어로 원초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경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전까지의 영화의 가치관들이 계속 억압해 왔던 것들이 바로 그 ‘욕’이다. 이마무라는 특히 <돼지와 군함>에서부터 그 억압에 반발하며 성과 욕망에 대해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세계』라는 책에서 이마무라 쇼헤이의 특징 6가지를 꼽았는데, 그 중 세 가지가 하층계급에 대한 것이다. 그는 자신보다 1년 늦게 데뷔한 동시대 감독 오시마 나기사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말에 “그가 사무라이라면 나는 농민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둘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으나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오시마가 사회의 부조리를 정치적으로, 저널적으로 이야기했다면 이마무라는 기표에 나타나는 움직임에 주목하기 보다는 정말 ‘구멍을 파서’ 그 아래를 본 사람이다. 오시마와 이마무라 둘 다 나름의 일관적인 길을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구에 오시마가 먼저 눈에 띈 것은 천황이나 전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가지는 선정성, 선명성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밑으로 파고들어간다’는 면에서, 일본 영화를 지속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이마무라와 이치가와 곤에게 주목하고 인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보신 <끝없는 욕망>이라는 작품 전체를, 이 우에노의 작은 마을을 일본이라고 생각해보자는 것이 제 아이디어다. 이것을 일본이라고 상정했을 때, 이마무라는 변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뭘까. 전쟁 전에는 천황에 따르고 군국주의를 숭배하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식 자본주의에 달려드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이마무라가 생각하는 일본적인 것이 아닌 것 같다.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를 생각했을 때 그 답은 인간이다. 욕망을 가진 인간. 즉 욕망이라는 것이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기제임은 분명한데, 욕망의 분출을 억압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그것을 억압하는 것은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오시마 나기사가 그것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했다면 이마무라쇼헤이는 드러내지 않고 하층민의 삶을 통해 이야기 한 것 같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일본영화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감독이며, 전무후무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 하는데, 이런 지점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와도 통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다시 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역시 이런 보편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관객1: 영화를 보면서 김기영의 <하녀>나 봉준호의 <괴물>이 떠올랐는데 특히 괴물은 플롯과 스타일이 거의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 본 영화를 포함해서, 이 영화들이 하층계급들의 욕망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긍정한다기보다는 약간 두려워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층계급을 바라보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무조건 긍정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어떤 냉소인 것 같기도 하고. 봉준호의 경우 하층계급을 정말 긍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유양근: 김기영의 경우 물론 하층민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당시 주류로 형성되어가고 있었던 중산계급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파헤치기 위해 하층민들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하층민들을 그리려고 했던 것들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 봉준호의 경우 <괴물> 속에서 송강호 일가족이 겪고 있는 아픔이나 삶의 대척점에는 정권이 있고, 가진 자들이 있고, 언론이 있다. 일종의 대비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층민들의 아픔을 그렸다고 극단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마무라는 반대항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마무라는 하층민들 그 자체를 다룸으로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오시마는 오히려 반대편에 있는 것들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한 사람이다. 사실 이마무라는 의사의 아들로 나름대로 유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초반부터 하층민들의 삶을 발굴하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자신의 영화 속에 나오는 어떤 캐릭터든 모두 사랑한다는 점이다. 인간이라는 속성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 같다. 언급하신 감독들과는 결론적으로 대척점을 가지고 있느냐, 반대편의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정리: 박예하(관객 에디터) | 사진: 황초희(자원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