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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

본능과 죄의식의 경계에 선 여성 ‘마스코’

[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훔친 욕정>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들에는 상호작용과 교환을 위한 탐닉과 섹스가 난무한다. 그의 영화들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이 마음을 빼앗기고 욕망에 젖어드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 혹은 인물 주변의 상황이 만들어낸 아이러니 때문인데, 이는 곧 타인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광기로 이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설정할 수 있게 만드는 지점인 섹스장면들은 절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스조 영화의 주인공들은 전쟁, 사회, 혹은 자본 등을 통해 본능이 도태된 집단의 단면을 보여준다.

 

평범했던 주인공이 특정 사건이나 또 다른 특정 인물의 이야기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기존 주인공이 가지고 있었던 자의식은 온전히 동물적인 감정으로 탈바꿈한다.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탐닉은 곧 인간의 신체에 대한 지독한 페티시로 이어지며, 영화 속의 인물들은 서로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결여되고 금지된 감정과 애증을 불러일으킨다. 야스조의 영화에서 표출되는 인물들의 욕망은 단순한 개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섹스를 통해 봉인하고 금기되었던 본능을 무의식적으로 꺼내 보여주며, 이러한 섹스 행위는 소외된 인간들이 마치 물물교환을 하듯 자신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만드는 방어기제의 한 부분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야스조의 많은 영화들이 쾌락과 억압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여있다고 가정할 때 외도와 불륜을 소재로 하는 <훔친 욕정>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훔친 욕정>은 유부남인 아사이의 동거녀로 지내다가 부인을 쫓아내고 아사이의 사랑을 독차지한 마스코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마스코의 조카 시게코의 출연으로 인해 마스코와 재혼한 아사이는 시게코를 탐하기 시작하고 마스코는 아사이와 시게코의 중간에 놓인 채 아사이의 전처로부터 빼앗아 온 자신의 ‘욕정’을 탓하기 시작한다. 아사이의 전처는 배신과 증오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는데, 마스코는 전처의 죽음 때문에 시게코와 아사이의 외도를 직접 목격하고도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한다.

 

마스코는 사랑하는 사람과 조카와의 관계를 부정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결코 그 이상의 집착을 두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 <훔친 욕정>의 주인공인 마스코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꺼이 손에 넣고야마는 욕망의 결정체인 셈이지만 조카에게 빼앗겨버린 아사이에 대한 집착이 결국 마스코 스스로 벌하고 치유하게 만드는 묘한 이중성을 띄고 있다. 마스코는 완벽한 배신을 눈앞에 두고도 조금 더 농밀하고 파격적으로 배신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제어해버린 것이다.

 

마스코라는 여성이 보여주는 이러한 의외의 소극적 태도는 마스코의 몸과 행동을 대신해 각개 장면들로 분출되고 조립되는데, 영화 속에서 그녀의 광기어린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는 바로 물이다. 영화는 특정 계절을 확고히 명시하지 않으나 마스코가 살고 있는 집, 그리고 마스코의 주변인들이 계속해서 들이키는 물로 인해 마스코를 중심으로 알 수 없는 갈증의 정서가 녹아있다는 것을 은밀하게 비춰준다. 잔이 흘러넘치도록 담아내는 물과 커피를 마시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타인에게 지독히도 숨기고 싶은 욕정과 욕망들을 단숨에 들이켜 봉인시키려 노력하는 인간의 은밀한 추태가 연상된다. 그리고 이것은 감정을 억제하고 스스로를 벌하려는 마스코의 애증이 결국 그녀의 내면에서 돌이킬 수 없게 찢겨져버린다는 결말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강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