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 보티커 특별전]





버드 보티커의 영화 세계


버드 보티커 감독은 영화의 개별적 완성도나 이후 이어진 비평적 평가에 비해 국내에는 그 이름이 비교적 덜 알려진 편이다. 이에 “버드 보티커 특별전”을 맞아 외국의 평론가와 감독들이 버드 보티커와 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 글들을 소개한다. 영화평론가이자 감독인 폴 슈레이더는 버드 보티커 영화의 특징뿐 아니라 그에 대한 기존의 비평적 평가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되짚어보고, 마틴 스콜세지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각각 <외로이 달리다>와 <코만치 스테이션>에 느낀 매혹을 들려준다(유튜브에서 원본 영상을 볼 수 있다).


비평에서의 사례 연구 : 버드 보티커의 경우 Budd Boetticher: A Case Study in Criticism 

– 폴 슈레이더 Paul Schrader


1.

버드 보티커는 ‘발견된’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다른 많은 감독들의 경우처럼, 시간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영화가 너무 많기 때문에 잊혀졌다. 지난 10년 동안 프랑스의 앙드레 바쟁(Andre Bazin)과 미국의 앤드류 새리스(Andrew Sarris)의 주된 노력으로 그에 대한 비평적 노력이 증가하면서, 그는 저예산 영화감독이라는 모호한 위치에서 벗어나 보다 너른 비평적인 주목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구원 작전은 또한 보티커를 특정한 비평 체계 안에 위치시켰고, 이 비평 체계는 그 영화들 자체와 동의어가 되었다. 새로이 발견된 예술가들의 경우 이들을 지배하듯 보이는 전매특허 같은 것이 있다. 일정 기간 동안 발견자-비평가들은 아무 방해를 받지 않은 채 자신들의 발견에 특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티커는 ‘작가’ 감독이, 그의 영화들은 ‘작가’ 영화들이 되었다. 그러나 보티커의 영화들을 각광받도록 만든 특정한 비평 체계와 그 영화들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비평 체계란 고유의 경향과 역사를 가지고 있고, 각각의 예술가들은 종종 그들에게 들어맞지 않는 비평 경향 안에 휩쓸리기 쉽다. 보티커의 영화들은 상당한 보편적 특징들을 갖고 있고 이는 그의 ‘작가성’ 이나 개성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의 영화들은 가장 훌륭한 비평가들 혹은 심지어 감독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훌륭할 수 있다.


보티커는 미국이 낳은 작가 감독군에 속해 있었다. 『필름 컬처 Film Culture』 1963년 봄호에서 앤드류 새리스는 대체로 현실 안주적이었던 비평가 집단에 수십 명의 평가절하된 감독들을 문자 그대로 ‘쏟아넣었’다. 앤드류 새리스가 분류한 감독들 중 다수는 이미 팬층을 거느리고 있었고, 새리스의 이론이라는 것도 『카이에 뒤 시네마』가 이미 6년 전 형식화한 ‘작가’적 접근에서 끌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인의 관심을 자국 감독들에게 실제로 끌어온 이가 바로 새리스였다. 보티커에 대한 새리스 특유의 소개는 1957년작인 <칠인의 무뢰한>에 대해 앙드레 바쟁이 썼던 깊이 있는 분석에 비하면 다소 가볍다 할 수 있지만, 보티커에 대해 지적인 영어권 비평이 지속되는 데에 산파 역할을 톡톡히 했다. 보티커를 ‘발견’한 결과 나온 비평이 작가주의적 기원을 갖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지루한 작가 논쟁에 다시 불을 지핀다거나 작가주의의 영향에 대해 비판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그건 너무 시기상조이다). 다만 나는 보티커의 영화들을 분석하기 위해  또 다른 비평 체계(내 생각엔 이 접근이  더 낫다) 에 대한 비교군으로서 작가주의를 사용하려 한다.


이론의 영역에서 ‘작가’는 많은 것을 의미하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보통 전기적 비평과 심리적 비평의 애정어린 결합을 의미하곤 했다. 새리스는 지속적으로 한 감독에 대해 ‘개성’을 놓고 테스트를 수행하려 했고 그가 영화에 적용한 기준들도 그 뒤에 숨어 있는 개성을 폭로하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었다. 그는 종종 감독의 개성을 배반하는 미장센들의 고유한, 혹은 개인적이거나 우상숭배적인 면을 지적하곤 했다. 작가주의의 전기적-심리적 기원은 그것을 과용하는 데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워드 호크의 ‘남성성’이랄지 에른스트 루비치의 ‘터치 touches’, 프랭크 태슐린의 ‘상스러움’, 오토 프레밍거의 ‘냉소주의cynicism’ 혹은 일반적으로 ‘히치콕적인 것들 Hitchcockery’의 모든 형태에 대한 토론 등등. 그러나 최고의 작가 비평에서도 전기적-심리적 편향이 존재한다. (현재 활약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비평가의 ‘유파’는 BFI-캠브릿지 그룹, 피터 월렌(Peter Wollen), 짐 킷시스(Jim Kitses), 패디 워널(Paddy Wannel), 앨런 러벨(Alan Lovell), 로빈 우드(Robin Wood), 피터 하코트(Peter Harcourt)이다.) 이러한 평론가들이 형식주의자, 영화 본편에 집중하기 좋아하는 비평가 집단 내부에 작가주의를 정착시키려 노력하긴 했지만, 그들의 그 중요하고 막중한 과업인 비평은 결과가 좋든 아니든, 특정 개인의 심리에  형식주의자로서 접근한 면이 컸다. 사람들이 작가주의를 연관시켜 ‘빈약한’ 전기적-심리적 비평을 쓸 때 이들은 ‘훌륭한’ 전기적-심리적 비평을 썼을 뿐이다.


보티커의 영화들을 잘 아는 작가 비평은 중심 갈등을 강조해 왔다. 바로, 비도덕적 세계에서 도덕적인 인간의 갈등. 이러한 갈등은 영웅과 악당, 인간과 환경, 개인과 집단, 혹은 의지와 욕망 사이의 투쟁으로 재현될 수 있다. 각각의 경우 정의를 위한 결단은 투지와 지성, 위트, 그리고 가끔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어야 한다. 짐 킷시스는 <호라이즌즈 웨스트 Horizons West>에 대하여 영웅과 악당은 거울 이미지이며 도덕적 투쟁은 근본적으로 심리적인 것이라 주장한다. 즉 진정한 개인주의와 나르시시즘의 대결이라는 것이다. 『뉴 레프트 리뷰 New Left Review』(32호)에 기고한 글을 보면 피터 월렌에게 그러한 투쟁은 주로 환경적인 것이다. 순응을 요구하는 적대적인 환경의 덫에 갇힌 개인. 피터 쿤래트(Peter Coonradt)는 킷시스와는 반대로 보다 소품의 영화들을 논하며(『시네마 Cinema』 IV-4) 그런 갈등이 도덕적으로 분명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도덕적인 인간이 도덕적 진공 안에 있는 것이다.


이 모두는 다 좋은 비평이다. 보티커에 대한 전기적-심리적 비평에서 내가 느끼는 불만은 정확성의 문제가 아니다. 개성이라는 관점에서의 접근은 종종 완벽하게 정확하다. 새리스의 경우 일단 감독 하나를 잡아 자기의 심리 비평의 소파에 누이면 탁월한 솜씨를 발휘해 지엽적인 것에서 개성을 추출해낸다. 특히나 킷시스의 경우 보티커에 대한 그의 비평은 빈틈없고 영화에 충실하다. 대신 나의 불만은 이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있다. 이러한 심리적이고 전기적인 토대를 지닌 작가주의가 보티커의 영화들을 평가하는 데 비평적으로 충분한 관점인가? 예술작품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가치란, 창작자의 개성에 국한되지 않으며 작가를 열심히 검증한다고 해서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개성적 특질이란 작품에 있어서는 가장 일시적인 면면일지도 모른다. 나는 보티커의 개성이 그의 영화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지만, 그에 대해 아무리 철두철미한 심리 분석이라도 그 영화들의 진정한 가치에 비법을 제공해 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보티커의 명성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높아질 것이며, 보티커가 지금 각광받는 감독들, 즉 폰 스터버그, 히치콕, 루비치, 혹은 혹스 등을 뛰어넘는 이 나라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미국의 비평가들이 마침내 깨닫게 될 날이 올 거라 생각한다. 그의 영화는 ‘길이 남을’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온전히 평가하고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비평 원칙들이 적용돼야 한다.





2.

보티커 영화에 나타나는 중심 갈등은 이미 킷시스, 월렌, 쿤래트 등이 논한 바 있으며, 이는 개인의 수준에서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이고 원형적인 수준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영화에서 반발력이란 심리적이거나 환경적인 차원만이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차원에서도 기인한다. 융의 용어를 빌자면, 인간 의식이 전면에 내세우는 ‘자율적 힘’이 그것이다. 모든 예술은 얼마간 원형적이지만(모든 예술이 얼마간은 마르크시즘적인 것처럼), 보티커의 영화에서 원형이란 공공연하고 기능적이다. 그의 캐릭터들이 개인주의라는 친숙한 외피를 입고 있다 해도 위기의 어느 순간 그들은 개인이 아닌 원형으로 기능한다.


보티커의 작품에서 원형적 특성은 작가 비평의 독점적 영역 바깥, 보다 원시적이고 원형적인 예술의 영역 안에 위치한다. 원시적인 예술가들은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의 묘사를 따르면 “생명에 혼란과 놀라움을 느끼고, 절대적 가치가 직관적으로 구현된 창조물에 드러나는 명백한 독단을 피해 피난처를 찾는” 사람이다.  근대의 원형 예술에서 원형은 몰개성적이고 토템적이긴 해도 덜 절대적이다. 융의 근대 원형들은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 모두) 도플갱어들로 그 원형적 이미지 안에 도덕적 모호함을 전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윌버 스콧(Wilbur Scott)이 썼듯 모든 원형 예술은 원시적이든 근대적이든 “인간의 과학적 개념에 대한 불만”을 반영한다. 원형 예술은 마법과 종교에 뿌리를 두며, 가장 세속적인 형태조차도 여전히 기존 관념의 흔적에 고착돼 있다. 이 기존 관념이란, 인간과 사물이 있고 이 사물은 아이콘으로 기능하며, 구경꾼들은 그것들을 응시함으로써 고양되고 신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티커의 원형들은 근원적으로, 또한 기능적으로 원시적이며, 근대적이고 모호한 것들을 향하여 투쟁하여 다양한 정도의 성공을 거둔다. 보티커의 원시주의는 그의 투우 영화들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이 영화들에서 원형들은 도덕적 결단보다는 물리적 행위들을 통해 기능한다. 보티커가 랜돌프 스콧과 함께 만든 서부영화들은 근대적 의미에서 더욱 원형적이며, 도덕적 결단의 복잡성과 모호함에 집중한다. 이러한 근대적 특징들은 보티커만의 경향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원시적 특성의 감독인 보티커와 반어적이고 세련된 각본가 버트 케네디 사이의 긴장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보티커의 영화들 중에선 서부영화들이 더 오랫동안 성취로 남겠지만, 이 서부영화들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투우 영화들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삶에 대한 원시적인 시선으로도.


보티커는 투우에 대한 영화를 세 편 연출했다. <투우사와 숙녀 The Bullfighter and the Lady>(1951), <위대한 투우사 The Magnificent Matador>(1955), 그리고 아직 개봉하지 않은 <아루자 Arruza>이다. 투우는 종종 카톨릭 미사에 비교되곤 하는데, 이러한 비교를 통해 투우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스포츠’에서 분리해 ‘제의’의 전통 안에 위치시킬 수 있다. 투우사는 사제와 마찬가지로 개성이 지워지고 얼굴이 없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 즉 이 세계와 다음 세계 사이를 중재하는 사람이다. 신부도 인격을 가질 수 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이 이를 인식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제의의 과정에서는 원형적으로 기능해야 한다.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신부가 어떤 기분일지(혹은 그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투우사가 투우를 하는 동안 기분이 어떨지 아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다. 모든 투우사들은 관객들이 집단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상태의 토템이 될 수 있다. 신부가 정화되면 아이콘과 같은 존재가 되듯, 투우사는 정화되면 멕시코 광장(Plaza Mexico)을 둘러싼 동상과 같은 존재가 된다. 멕시코의 일상(과 보티커의 영화)에서 미사와 투우가 종종 엮이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같은 원형의 동전의 반대면이 되곤 한다.


스포츠와 투우라는 제의 사이의 차이점은 또한 개인주의 예술과 원형 예술 사이의 차이이기도 하다. 스포츠는 개인 행위에 기반한다. 우리는 ‘스포츠 스타’를 숭배하며 그 사람 특유의 장기에 환호한다. 제의는 형식에 기반한다. 우리가 원형을 존중하는 것은 그가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이상들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우의 제의적인 측면은 원시 종교와 비슷하다. 관중은 그 상징적인 형식은 물론 인간 대 소, 혹은 인간의 본성 대 신비와 죽음의 힘 사이의 대결이라는 컨벤션을 인지한다. 투우가 스포츠로 간주될 수는 있지만,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친밀감은 바로 제의적인 면이다. 보티커의 모든 영화에는 스포츠와 제의 사이, 개인과 아이콘 사이의 긴장이 계속된다. 이러한 긴장은 <라노운 서부극 Ranown Western> 시리즈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장점으로 작용했지만 투우 영화에서는 곤란한 문제거리가 된다. 성격 묘사에 있어 이러한 두 가지 형태 간 모순이 투우 영화들에서 표면에 드러나 있고, 개인과 아이콘 간 변덕스러운 이행은 신뢰성을 한계까지 밀어부치게 된다. 




<투우사와 숙녀>에서 원형적 특징은 ‘위상 stature’이라 할 수 있다. 나이 든 투우사인 마놀로 에스트라다(길버트 롤랜드 Gilbert Roland 분)과 그의 아내 세일로(케이티 주라도 Katy Jurado 분)에게는 위상이 있다. 젊은 미국인 제작자인 척 리건(로버트 스택 Robert Stack 분)은 투우사가 되기를 꿈꾸는 인물로, 그에겐 위상이 없다. 리건은 처음에는 인간적으로 제시된다. 반면 마놀로는 원형적이다. 리건은 공격적이고 과시적이며 사려가 없다. 마놀로는 원숙하고 여유가 있으며 평화롭다. 리건은 개인주의자이다. 마놀로는 형식주의자이다. 마놀로는 투우의 형식을 연구하며 기술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그의 투우는 양식적이다. 그는 ‘넘버 원(numero uno)’으로서 자신의 과제가 개인의 기량을 보여주는 것 이상일 뿐 아니라 보편적이고 제의적인 무언가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리건은 마놀로에게 투우의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고 마놀로는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리건은 기술은 빠르게 배우지만 ‘위상’은 결코 얻지 못한다. 리건의 투우는 그의 과시욕의 연장일 뿐이며, 견습 투우사로서 느리고 방법론적인 길을 따르기보다 큰 경기에 곧바로 뛰어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첫 번째 큰 경기에서 그는 투우에 들이받힐 뻔하고, 그를 구해준 마놀로가 그 과정에서 소에 받힌다.


이후 예측 가능한 변화가 펼쳐진다. 리건은 투우장으로 돌아와 승리를 거두고 이전보다 더 슬픔에 찬, 그러나 더 현명한 사람이 되어 은퇴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신은 멜로드라마의 예측 가능한 차원만이 아니라 보다 불가해한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리건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위상’을 얻는다. 단지 원숙함, 기술, 혹은 지혜만이 아니라, 마놀로가 지녔던 종류의 원형적 위상도 획득하는 것이다. 그는 마놀로의 자질을 물려받는다. 그는 마놀로에게 기도해 힘을 구하고, 성공적으로 ‘살우(殺牛)의 순간 pas de morte’을 완성해낸 후 군중에게 망토를 이끌던 손이 자신이 아닌 마놀로의 손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마놀로의 대리인이 된다. 마놀로가 군중의 대리인이었던 것처럼.


리건의 변신에서 놀라운 점은 자신의 추락을 야기한 바로 그 방식으로 변신을 달성해 낸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과시욕’이다. 리건이 마놀로의 죽음을 초래한 것은 그가 과시욕을 부리고자 했고, 투우의 정수에 해당하는 기술을 잘못 사용했으며, 투우사로서의 자기 자신을 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위상’을 얻는 것 역시 과시를 통해서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투우장에 다시 들어간다(그는 이번 투우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는 승리냐 죽음이냐의 갈림길에서 불명예를 피할 방법을 찾는다. 그러나 리건이 일단 투우장에 들어갔을 때, 보티커는 그의 과시욕을 정당화해 준다. 그의 과시욕은 원형의 과시욕이 된다. 그에게 과시욕이 허락되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의 존재 그 이상을 드러내기 때문이자, 이는 곧 부활하는 마놀로이기 때문이다. 과시는 개인에게는 결점이지만, 원형에는 미덕이다. 그리고 보티커는 이러한 모순을 굳이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보티커의 딜레마는 아마도 이런 것이지 싶다. (1)그는 투우사를 전통적인 심리학의 관점에서 개인의 성취를 이룬 인간으로 간주한다. (2)그는 투우 그 자체를 제의, 즉 신비롭고 원시적인 행위로 본다. (3)그러나 그는 개인을 원형으로 변신시킬 목적으로 투우사를 투우장에 집어넣으면서 간편한 장치를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리건의 캐릭터가 마지막으로 투우장에 들어설 때 태도가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보티커의 마음에 이런 변화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리건이 자신의 안전과 자긍심을 포기하자, 신비롭게도 그는 마놀로의 영혼에 자신을 맡기게 되어 ‘죽음의 통과(Pass of Death)’를 완수하게 되며, 더 이상 늙은 척 리건이 아니라 길이 남을 존재, 즉 영원한 제의를 수행하는 투우사로 변신하게 된다. <투우사와 숙녀>가 투우사의 아이콘, 즉 멕시코 광장의 동상들 중 하나의 숏으로 끝을 맺는 건 더없이 어울리는 일이다.




보티커가 투우를 소재로 찍은 다음 영화인 <위대한 투우사>는 결코 <투우수와 숙녀>에 존재했던 모순, 즉 ‘개인과 한 인간 안의 아이콘의 역설적인 조합’을 직시하지 않는다. <위대한 투우사>는 아들이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는 투우사의 공포와 심적 갈등을 중심으로 한다. 투우사의 인간적인 면에 집중하는 이 영화는 보티커가 투우장에 대해 느끼는 바로 그 마법을 그려낼 마음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보티커의 딜레마는 그의 마지막 영화이자 역작인 <아루자>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루자>는 영화 역사상 독특한 영화다. 보티커의 친구였던 투우사 카를로스 아루자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이 영화는 1956년부터 아루자가 사망한 1966년까지 10년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세계 최고의 투우사 중 하나였던 아루자의 실제 모습을 담은 현란한 영상을 보여줄 뿐 아니라, 예술가가 예술가를 대하는 관점까지도 제공해 준다.


<아루자>는 아루자의 가족과 친구들을 간헐적으로 쫓지만, 영화의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은퇴했다가 기마 투우사(rejoneador, 말 등에 탄 투우사)로 성공적으로 복귀한 아루자의 커리어를 따라간다. 감독으로서 보티커는 시네마-베리테(Cinema-verite)적 양심의 가책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연출된’ 신과 ‘진짜’ 신 사이에 뻔뻔스럽게 인터컷을 삽입한다. 사실 <아루자>는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들과 달리 감독의 연출의 생산물이다. 아루자는 평소라면 거절했을 법한 영화를 찍기 위해 보티커가 자신에게 위험을 감수하도록 강요한다며 여러 차례 불평한 바 있다. 멕시코 광장에서 펼쳐진 마지막 승리의 싸움 전, 아루자는 보티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망할 영화를 찍는답시고 네가 날 죽이려  들고 있어!” 영화 내내 관객은 자신이 보는 상대가 ‘진짜’ 아루자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다.


보티커에 의하면 <아루자>는 “내 가장 친한 친구가 하필이면 세계 최고의 투우사였기 때문”에 만들어진 영화다. 가장 친한 친구인가 최고의 투우사인가.  이 대립은 <아루자> 곳곳에 스며있다. 투우사와 친구, 투우사와 원형 간의 긴장은 <투우사와 숙녀>만큼이나 <아루자>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한편에서 보티커는 아루자를 오랜 친구이자 동료로 바라본다. 그는 카를로스의 감정, 고유한 기벽,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영화에는 아루자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신들, 그러니까 아내와 아이, 또 (멕시코의) 파스테헤에 있는 그의 소들과 함께 하는 신들이 제법 등장한다. 대부분 이 신들은 ‘연출된’ 것으로, 마치 아루자의 인간적인 면을 입증하기 위해 법정에 제출한 증거라도 되듯 부자연스럽게 찍혀 있다. 예를 들어 저 멀리 그의 농장을 배경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듯 보이는 아루자의 클로즈업에서 내레이터(안소니 퀸 Anthony Quinne)는 이렇게 말한다. “아루자는 지쳤다.” 이런 신은 우선 관객의 심리라는 면에서 실패이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감정을 읽도록 관객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관객은 이런 식으로 주문을 받으면 오히려 적대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이 신이 실패인 더욱 중요한 이유는, 아루자에게 느끼는 보티커 자신의 흥미가 잘못 연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루자에게서 가장 흥미롭고 가치 있는 특징은 그의 감정이 아니며, 이는 보티커도 알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흔한 감정들은 보티커가 아루자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나가는 그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사소하고 재미가 없다. 보티커의 심장은 이런 교과서적 심리학에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반면, 보티커는 아루자를 오랫동안 계속돼 온 투우라는 제의에서 일종의 아이콘이자 원형으로 여긴다. 아루자가 진정으로 독특해지는 것도 이런 맥락이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관객들의 기대대로 보티커가 아루자를 숭배하는 것이다. ‘라이브’로 찍힌 투우 신들은 양식적으로 구조화돼 있다. 귀환과 반복이라는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일단 투우장에 들어서면 아루자는 변하지 않는 도덕극의 ‘에브리맨(Everyman, 15세기 영국의 도덕극인 『에브리맨』의 주인공 - 번역자 주)’이 된다. 아루자는 경기를 할 때마다 본질적으로 같은 것들을 한다. 즉 같은 움직임과 같은 패스. 관객도 같은 태도를 취한다. 멀리서 주의를 집중하는 관중으로서의 태도. 이제 관객은 아루자를 2차원적으로 보게 된다. 심리학적 연구의 어떤 허울도 사라져 버린다. <아루자>는 영화가 시작한 바로 그 방식으로 끝이 나는데, 이는 멕시코 광장 주위의 조각상 중 하나의 모습으로 끝이 났던 <투우사와 숙녀>와도 같은 방식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상이 아루자 그 자신이다. 영화는 동작 중인 아루자를 담은 정지 화면(freeze frame)으로 결론을 내며, 내레이터는 그의 의미 없는 죽음(그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을 간단하게 언급한 뒤 기억되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이라고 말한다. 이후 영화는 아루자의 조각상을 긴 앵글의 숏으로 잡는다. 그 분위기와 목적은 의식적으로 우상숭배적이다. 아루자는 아이콘으로 변형되어 이제 영원히, 사제처럼 투우사의 신전의 문을 지키고 서 있다. 그 숏은 마지막 신의 또 다른 신, 즉 아루자의 부인과 아이들이 TV에서 카를로스의 모습을 보고 있는 신과 노골적으로 모순 관계에 있다. 이제 멕시코 광장 앞에서 아이콘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아루자는 고유의 개성적 인격도, 아내나 아이도 없을 것이며 그한테 그런 게 있었는지 아닌지조차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보티커의 딜레마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명확하다. 친구로서 보티커는 카를로스를 다른 누구나 그러하듯 많은 문제와 신경증을 지닌, 그러나 기술 좋고 재능 넘치는 남자로 본다. 관객으로서 보티커는 아루자를 많은 멕시코인들이 항상 본능적으로 투우사를 대해온 것처럼, 그들의 집단 무의식의 원시적인 상징으로 본다. <투우사와 숙녀>에서도 그랬듯, 보티커는 자신의 태도를 경고 없이 재빠르게 바꿀 수 있다. 마지막 투우 전, 아루자의 차가 광장으로 들어올 때 차 안에서 찍은 숏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시점은 아루자의 것이고 관객도 그의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일단 투우장에 들어서면 시점은 관중의 것이 되고, 아루자는 그 자체로 더 커다란 드라마의 일부가 된다.



3.

버드 보티커는 아마도 미국 역사상 가장 원시적인 영화감독일 것이다. 영화는 20세기와 함께 태어났고 자본주의와 기술의 부산물이다. 영화란 게 종종 순진하고 단순한 생각을 담으며 감상적이기도 하지만, 원시적인 적은 별로 없었다. 현재 ‘원시적’이라 여겨지는 많은 영화들은 실제로는 지극히 간결하거나 단순한 영화에 불과하다. 영화는 종종 개인의 역경을 탐구하지만 집단의 역경을 탐구한 적은 거의 없었다. 보티커는 본능적으로 ‘원시적인’ 딜레마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개인은 어떠한 지점에서 원형적이 되는가? 이것은 상당한 지적 깊이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비록 보티커 자신에겐 그런 지적 깊이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예술의 기원에까지 이르는 주제이다. 저속하지도 천박하지도 않고, 성직자다우면서도 원형적인 것,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가 바로 ‘원시적(Primitive)’이라는 말이다.


보티커가 서부극 장르에서 거둔 놀라운 성취는 이 영화들이 개인에서 아이콘으로의 이행을 다룰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작품들은 더욱 현대적이고 모호한 특성을 지니게 된다. 버트 케네디(Burt Kennedy)의 각본들이 보티커에게 필요한 연결점을 제공해 주었던 것 같다. 케네디의 ‘세련된’ 각본들과 보티커의 원형, 이 둘이 보티커를 아이러니와 다크 유머, 비관주의, 그리고 도덕적 모호함으로 가득 찬 세계로 인도했다. 케네디의 각본들을 각색하는 과정에서의 중압감(서부극 중 일부는 12일 촬영으로 만들어지곤 했다)은 일시적으로 보티커를 딜레마에서 벗어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 랜돌프 스콧(Randolph Scott)은 현대적인 원형이 되었다. 스콧은 개인과 아이콘 사이의 차이를 감지하고 그 사이를 오갈 수 있었다. 아루자와 스콧의 차이점은 행동(선행 good works)에 근거한 도덕과 결단(은총 Grace)에 근거한 도덕 간 차이점이기도 하다. 마빈 핼버슨(Marvin Halverson)은 (보티커의 영화들이 많은 부분 관련성을 갖고 있는) 도덕극에 대한 글에서 중세와 근대의 도덕률의 차이를 대조한 바 있는데, 이러한 대조는 보티커의 영화 중 투우 영화와 서부극의 차이에도 적용시키기에 딱 좋다.


“중세의 도덕극은 인간이 신 앞에서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해 있다. 인간은 수많은 선행을 통해 자신이 신이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에브리맨』은 인간이 교회가 제공하는 다양한 방편의 도움을 통해 자신을 구원한다는 중세적 관념을 드러낸다. 그러나 20세기 인간의 경험은 그러한 관점을 입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20세기 인간은 자율성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출구 없음 NO EXIT’이라는 표지판을 발견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대 도덕극과의 차이란, 그 사이 몇백 년 동안 드라마 상의 변화를 상징할 뿐 아니라, 동시대에 삶을 이해하고 기독교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진 면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도덕에는 두 가지 형태, 즉 행동의 도덕과 은총의 도덕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은총의 개념은 근대 도덕률을 다룬 영화들(예컨대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출하다>)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보티커의 원시적 원형을 근대의 맥락 안으로 던져넣는다. <라노운 서부극> 시리즈에서 랜돌프 스콧은 기술로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는다. 이는 원초적/원시적 존재인 아루자의 입장과 다르다. 대신 그의 무기는 지성, 위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덕에 대한 철저한 감각이다. <7인의 무뢰한 Seven Men from Now>은 예외로 두고, 스콧은 특출나게 뛰어난 총잡이는 아니며, 종종 다른 사람들 손에 휘둘린다. 각각의 서부극에서 그는 적어도 한 번은 적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며, <부캐넌의 고독한 질주 Buchanan Rides Alone>에서는 다섯 번이나 겨우 목숨을 건진다. 그는 그저 그가 옳다는 이유로 살아남으며, 마찬가지로 그의 적들은 옳지 않기 때문에 패배한다. 스콧이 왜 승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세속적인 이유는 없다. ‘정상적인’ 경과에서라면 그는 영화의 두 번째 릴이 돌아갈 때(즉 영화 시작 후 20분 정도 경과된 후)면 이미 죽은 목숨이어야 할 것이다. 옳음에 대한 도덕적 관념 때문에 그는 매번 무모하게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며, 매번 무죄를 선고받는다. 마치 외부의 힘이 그를 지탱해주고 인도해 주는 듯, 그 역시 그 힘이 자신을 정당화해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보인다. 보티커의 영화에서 스콧은 마치 브레송이 그리는 잔다르크처럼 이상한 방식으로 특별한 소명을 받아 삶을 유지하는 사람이며, 세속적인 존재의 위험들에 합리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다.



스콧이 존재하는 것은 이러한 신비로운 은총을 통해서이며, 그러한 은총이 그를 원형적으로 기능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그의 결단 때문이다. 그는 마치 말을 탄 ‘에브리맨’과 같다. 은총은 심지어 세속적인 형태에서조차 ‘선한 행동’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주어진 것, 동시에 그가 선택해야 하는 무언가이다. <라노운 서부극> 시리즈는 여타 근대 도덕극들과 마찬가지로 행위가 아니라 은총, 행동이 아니라 결단의 딜레마를 담고 있다. 그러나 결단은 쉽지 않다. 결단은 복잡하고 모호하다. 인간은 은총의 존재를 인지하고 은총을 위해 결단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리하여 결단을 하고 그것을 죽음의 순간까지 지켜야 한다. <라노운> 시리즈에서 보티커와 케네디의 캐릭터들은 도덕적 결단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거나 추락시킨다. 스콧은 계속해서 도덕적인 질문들을 가지고 적들과 맞선다. <코만치 스테이션>에서 리처드 러스트(Richard Rust)는 죽은 동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어. 그는 그런 거친 세상밖에 몰랐으니까.” 스콧이 대답한다. “사람은 언제든 돌이킬 수 있어.” 그러자 러스트가 다시 답한다. “그건 그렇게 쉽지가 않아. 절대 그리 쉽지 않다고.”


‘돌이키는’ 것은 물리적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결단의 문제이다. 스콧은 그러한 돌이킴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절대로 자신의 도덕적 위치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은총, 즉 스콧이 소유하고 있는 이 놀라운 힘은 그것을 선택하는 누구에게나 유효하다. 악당들은(이들은 스콧 그 자신과 매우 닮아 있다) 때로 이러한 은총을 거부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너무 멀리 와서 이젠 돌이킬 수 없어.” 클로다 아킨(Claude Akin)은 <코만치 스테이션>에서 스콧과 최후의 총격전을 벌이면서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러나 스콧은 도덕적 패배주의를 거부한다. <톨 티 Tall T>에서 리처드 분(Richard Boone)이 “인간에겐 가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가 있어.”라고 말하자 스콧은 이렇게 대답한다. “과연 그런가?” 그리고 드물게 – 아주 드물게 – 악당이 회심하여 옳은 일을 위해 결단을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외로이 달리다 Ride Lonesome>에서 퍼넬 로버츠(Pernell Roberts)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유머, 더 정확하게는 위트가 스콧이라는 원형의 ‘현대성’을 재는 척도이다. 마놀로와 아주라는 상대적으로 유머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임무를 감지하고 실행한다. 반대로 랜돌프 스콧은 ‘사랑스러우면서도 말이 간결한’ 종류의 유머 감각을 갖고 있다. 그는 물리적으로 상대와 맞서는 것을 싫어하며, 말장난과 우화(word-play and parable)를 사용하는 쪽을 선호한다. 그는 시골 촌부 버전의 소크라테스적 방법론을 사용한다. 질문하고, 놀리고, 제안하는 것이다. 스콧의 임무는 원론적으로는 단순하다. 실제로 모호한 순환논리이기도 하다. 스콧은 실재에서 아이러니뿐 아니라 기쁨도 발견해낸다. 스콧의 위트에는 방어적 메커니즘이 있다. 그는 자신이 인내를 발휘한다면 시간이 자신의 선을 정당화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이러니는 필요한 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그가 충분히 인내심을 발휘해 사건들이 불가피한 경로로 흐르도록 기다릴 수 있게 해 준다. 편의주의적인 세상에서 의인화된 선이란 ‘아이러니한’ 상황이며, 스콧의 아이러니야말로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요소이다.


스콧의 짙은 아이러니는 보티커의 영화에서도 독특한 요소이며 아마도 각본가인 버트 케네디와의 협동 관계에서 나온 부산물일 것이다. 누군가는 보티커와 케네디의 상호작용에 대해 이런 가설을 세울지도 모른다. “케네디는 스콧의 캐릭터를 혼란과 당황스러움, 모욕이 난무하는 상황에 밀어놓고 ‘그 캐릭터와 놀기를’ 원했다.” 각본은 스콧을 종종 불미스러운 환경에 밀어넣곤 했는데, 이 설정은 어떤 원형을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를 ‘인간화’하려는 것이었다. <톨 티>에서 그는 어리숙하게 머리를 찧으며, <코만치 스테이션>에서는 다리를 절룩거리다가 무릎에 연고가 쏟아지자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른다. <선다운의 결전 Decision at Sundown>에서 그는 고결하다고 믿었던 아내가 그렇게 순결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마도 버트 케네디는 이러한 특징적인 에피소드들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는 케네디가 자신의 후기 서부영화들(<라운더스 The Rounders>, <워 웨건 The War Wagon>, <라티고 Support Your Local Sheriff>)에서 주인공들에게 즐겨 사용했던 전형적인 방식의 ‘치욕 주기’이며, 이는 케네디가 각본을 쓰지 않은 보티커의 투우 영화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티커의 투우사 원형은 치욕적일 수도 있는 이런 각각의 상황에 처해 자신의 임무를 양식적으로, 정확하게, 그리고 간결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케네디가 쳐놓은 덫들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티커와 케네디 간의 긴장에서 원형이 현대적이고 아이러니하게 진화한다. 스콧은 자의식과 통찰력을 획득하고, 아이러니를 발견하며, 삶의 공허를 발견한다. 그러나 결국 선을 선택하고 결국 현대적 원형이 된다. 이 말은 즉, 원시적 형상이 현대의 상황에 존재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은총을 향한 스콧의 결단은 아이러니한 위트에 의해 잘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현대 사회에서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아이러니의 감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라노운> 시리즈는 ‘결단’을 강조함으로써 현대 원형의 전통에 포섭된다. 투우 영화들에서 원형은  『에브리맨』에서처럼 오직 제의라는 선행을 수행해야 하는 반면, 서부극에서는 원형이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s)의 현대 도덕극 『붙잡음과 은총 Grab and Grace』에서처럼 은총을 받는 과정에서 결단을 함으로써 원형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랜돌프 스콧은 아루자처럼 원시적 원형으로서 기능할 수는 있지만, 또한 현대적 원형처럼 요구하는 바도 보상받는 바도 훨씬 큰  방식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스콧이 개인과 아이콘 사이의 간극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간극이 물리적인 것이 아닌 도덕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 연결이 결단과 은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이 글의 드러난 뼈대는 비평 체계를 은유한다고 할 수 있다. 보티커가 그의 캐릭터들에 부여했던 양면적 가치는 비평가가 보티커에게 부여할 수 있는 양면적 가치와 상응한다. 카를로스 아루자는 위대한 쇼맨십의 스포츠 스타로 간주될 수도 있고 얼굴 없는 원형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버드 보티커 역시 우상숭배적인 감독으로, 혹은 원형적 감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보티커와 그의 비평가들에 적용할 수 있는 선택지는 융이 정의한 대로 개별화(individualization)와 개성화(individuation)에 비교될 수도 있다. 양쪽의 방법론 모두 정신의학자에게 수용되었다. 둘 다 정확했다. 개별화는 개인의 인격의 고유함에 집중했다. 개성화는 융이 더 선호한 것으로, 인간 정신의 보편적이고 우상숭배적이지 않은 특징을 찾아냈다. 개별화는 인간이 어떻게 다른가를 찾아내려 했다. 개성화는 인간이 어떻게 비슷한가를 발견하려 했다.


어떤 예술가들은 세계를 자기 자신의 인격의 확장으로 보며, 개별화는 그들 모두에게 딱 들어맞는다. 반면 보티커처럼 다른 예술가들은 자신의 인격을 보편적이고 선(先)-존재적(pre-existing)인 원형과 통합시킨다. 이들의 기여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개성화이다. 작가주의적 접근은 보티커의 개성의 ‘독특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정신의학에서 ‘개별화’를 닮았다. 이는 보티커에게서 피상적인 특징만을 찾아낸다. 작가 비평이 보티커의 개성에 천착할 때, 그의 예술에서 결정적이고 원형적인 특징들은 놓치게 된다. 킷시스는 <아루자>에 대해 “그 힘은 근본적으로 정적인 주인공의 성격에 의해 약화된다”며 잘못 해석한다. 그러나 원형 분석은 그러한 정체야말로 아루자의 성격에서 근본적인 것임을 드러낸다. 보티커는 이를 이해했고 사실 그 정적인 상태야말로 이 작품의 힘을 이루는 근간이다. 월렌은 보티커의 예술을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묘사하면서 이렇게 썼다. “개인주의의 측면에서 죽음은 극복될 수 없는 절대적인 한계이다.” 그러나 <아루자>의 엔딩 장면은 오히려 그 반대를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죽음은 개인이 원형이 되었을 때 초월될 수 있는 한계인 것이다.


심리적-전기적 비평 체계는 보티커의 예술에서 가장 오래 남을 특징들을 건너뛰어 버린다. 카를로스 아루자의 가장 길이 남을 특징은 그의 인격도 그의 감정적 깊이도 아니다. 오히려 원형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다. 버드 보티커의 가장 길이 남을 특징도 그의 ‘개성’이나 그의 신경증이 아니라, 그의 개성을 직관적으로 원형적 구조에 통합하려 했던 욕구였다. 보티커의 영화들은 미국의 비평 집단에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많은 대중매체의 리뷰어들이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난 ‘발견된’ 작가 감독들을 잘난체하며 거부하기 때문이다. (스탠리 카우프먼(Stanley Kauffmann)이 돈 시겔(Don Siegel)의 <호건과 사라 Two Mules for Sister Sara>에 대해 쓴  리뷰에서 보티커 비평에 대해 일침을 날린 것은 비교적 근래의 예에 속한다.)  또 어떤 면에서는 전기적-심리적 방법론 그 자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보티커의 ‘개성’은 확실히 미국의 다른 많은 감독들, 예컨데 오슨 웰즈, 찰리 채플린,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 샘 페킨파 등에 비해 별로 풍부하지 않다. 그러나 보다 큰 이유로, 관객과 비평가들이 자신들 주변에 있는 위대한 직관력의 ‘원시 예술’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에 다소 느리기 때문이다. 원형의 딜레마와 은총의 딜레마는 그러한 흔한 관습에 위치해 있으며, 많은 지식인들은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2001년에 목성과 그 너머에서 초월성을 찾으려 들지만(<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의 제목이 ‘목성과 그 너머 무한’이다 - 번역자 주), 정작 원형적인 ‘초월성’에 가장 근접한 것은 랜돌프 스콧이 출연한 일련의 서부영화들에 이미 존재했고 이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W. H. 오든(W. H. Auden)은 그의 시 「잠시 동안 For the Time Being」에서 말 구유를 방문한 두 방문자 그룹을 대조시킨다. 동방박사들(the Wise Men)은 생각을 하느라 ‘끝 없는 여행’으로 시간을 보냈는데 이 생각의 내용이란 바로 그리스도-아기에게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목자들은 같은 장소에 즉시, 본능적으로 왔다. 예술가들은 같은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른 은유를 찾아낸다. 브레송의 영화 <소매치기 Pickpocket>에서 미셸은 감옥에서 영적인 ‘해방’을 맞은 후 잔느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 오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보티커의 <외로이 달리다 Ride Lonesome> 에서 퍼넬 로버츠는  마침내 ‘회심’(보티커의 서부영화에서 성공적으로 이를 수행해 낸 유일한 사람이다)한 후 스콧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습군, ‘이것’이라 보이던 게 알고 보니 ‘저것’일 줄이야.”



출처│『시네마 Cinema』 1970년 가을호(통권 6권 2호)

번역│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