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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2017 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배우의 표정에 대한 짧은 생각 -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 배우의 연기를 보고

[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배우의 표정에 대한 짧은 생각

-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 배우의 연기를 보고



1.

영화에서 캐릭터의 감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배우의 얼굴이다. 물론 손의 작은 움직임이나 어깨의 떨림으로도 감정을 보여줄 수 있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효율적인 건 결국 얼굴이다. 사람의 얼굴은 이마의 주름, 눈썹의 각도, 눈가의 주름, 코의 찡긋거림, 굳게 다문 입술 등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다. 배우들은 자신의 얼굴에 적절한 표정을 만들어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고, 관객은 배우가 만들어낸 이목구비의 기표들을 해석하여 캐릭터의 감정을 짐작한다. 이를테면 어떤 배우가 눈을 크게 뜨고 미간을 찌푸린 채 양 눈썹을 위로 올리고 입을 크게 벌리면 우리는 그 캐릭터가 화가 났다고 판단할 수 있다. 즉 배우의 얼굴은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는 특권적인 신체 기관이다.

이때 연기는 캐릭터의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일차 목표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표준적인’ 방식을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는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고, 기쁨을 연기하는 배우는 ‘기쁜 표정’을 지어야 한다. 이런 방식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독자적인 연기를 펼치는 배우는 ‘실험적인 연기’를 한다고 평가받거나, ‘연기를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맥락에서 연기의 의미는 배우와 관객 사이의 기본적인 합의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합의’는 자칫 상투적인 연기를 끌어낼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만약 슬픔을 연기하는 백 명의 배우들이 모두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존의 익숙한 방식으로만 슬픔을 연기한다고 상상해 보자. 아마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의 감정은 느끼지 못한 채 단지 ‘일그러진 얼굴’이라는 기표만 보게 될 것이다(요즘 한국영화에서 거의 모든 배우들이 번갈아가며 선보이는 ‘감정 폭발’의 연기를 떠올려보자). 결국 배우는 기본적인 연기 양식을 지키는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진다.

또 다른 문제는 배우가 캐릭터의 감정을 너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캐릭터의 감정을 꼼꼼하게 설명하는 연기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어떤 인물의 마음 상태는 여러 가지 감정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정확한 구성 요소와 비율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각자 자신만의 개입과 해석을 통해 그 캐릭터의 심리를 상상해야 한다. 같은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영화 보기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이며 영화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여백을 거의 남겨두지 않은 채 캐릭터의 감정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연기는 관객이 캐릭터의 내면에 개입할 여지를 차단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뛰어난 연기의 대부분이 어떤 모호한 감정의 영역을 끌어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그래서 때로는 얼굴, 또는 표정을 지우는 연기가 상투적으로 친절한 연기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이를테면 어떤 영화의 배우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릴 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동경 이야기>에서 하라 세츠코가 이렇게 운다). 이때 관객은 배우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지만 그(녀)의 슬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또한 어떤 감독은 짙은 그림자로 배우의 얼굴을 덮기도 한다(필름 누아르가 이런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스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연출은 관객이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밖에도 배우가 카메라를 등진 채 연기하거나 가면이나 붕대로 얼굴을 가리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인 방법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지만 모두 배우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지 못하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배우의 표정을 가리는 연출이 항상 정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런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의 표정과 그 감정의 관계, 나아가 ‘좋은 연기’에 대해 더 다양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3.

최근 이런 고민을 다시 하게 만든 건 <꿈의 제인> 속 이민지 배우가 보여준 연기였다. 이 영화에서 이민지가 연기한 소현은 매우 끔찍한 상황에 처해있다. 현실과 환상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이야기하자면 소현은 최소 두 명의 친구를 떠나보냈으며 자신 역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었다. 게다가 미래에도 별 희망은 없어 보여 당분간은 계속 괴로운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이처럼 누가 보아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소현은, 또는 이민지는 관객에게 (오열이 아닌) 무표정을 보여준다.

이 무표정은 일단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 정도의 힘도 없는 상태라는 걸 암시한다. 관객은 무표정을 통해 소현이 극도로 지쳐버린, 일종의 감정의 진공 상태에 처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무표정의 두 번째 효과는 관객의 불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배우의 표정은 그 캐릭터의 감정을 알려주는 특권적인 지표이다. 하지만 이민지의 무표정은 관객이 소현의 감정을 정확히 짐작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소현이 어떻게, 얼마나 슬퍼하고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다. 즉 소현의 심리 상태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이때 우리는 캐릭터의 감정을 쫓아갈 표지를 잃어버리고, 이는 결국 어떤 불안함으로 이어진다. 스크린 속에서 따라가고 있던 캐릭터가 갑자기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대상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관객은 백지와 같은 이민지의 얼굴을 보며 단지 이런저런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며, 그 얼굴의 의미는 마지막까지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민지의 무표정의 얼굴이 <꿈의 제인>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 순간의 정서가 정확하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나 역시 구체적으로 답하기는 힘들다. 다만 소현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가 이민지의 무표정을 매개 삼아 그 자체로 굉장히 생생하게 전해진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이민지의 연기는 관객에게 불안을 설명하지 않고 관객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하고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김보년 프로그램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