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7 시네바캉스 서울

무자비한 매혹 - <뮤직 룸>

[2017 시네바캉스 서울]


무자비한 매혹 - <뮤직 룸>


사트야지트 레이의 <뮤직 룸>(1958)은 음악에 사로잡힌 한 늙은 사내의 몰락을 그린 서사시이다. 이 영화를 서사시라고 칭한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다 무너져가는 성과 음악회가 이뤄지는 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사시는 이 영화의 규모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난 뒤 마음에 남는 심상을 설명하는 말에 가까운데, 그 작은 사적 공간 속에 역사와 민족, 문명이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분명한 근거가 아니라 빈약한 심상에 의존하는 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필연적인 방식처럼 여겨진다. 영화의 시작은 서사 이전, 아직 준비되지 않은 관객을 사로잡는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공중에 매달린 채 천천히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보여주는 간소한 이미지가 영화의 출발점이다. 까만 배경 속에서 오롯이 빛나는 샹들리에를 향해 카메라가 서서히 줌인하면서 샹들리에는 점점 화면에 가까워진다. 이때 시퀀스를 흐르는 음악은 이 숏에 무성영화에 가까운 흥취를 불어 넣는다. 무성영화에서 후시 녹음된 소리가 화면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부터 촉발된 것이라 착각하게 마련이듯, 움직이는 샹들리에는 마치 지금 들려오는 음악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악기 혹은 음악-기억을 담은 신묘한 물체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착각하는 순간 샹들리에는 무시무시한 힘을 얻는다. 카메라가 샹들리에를 향해 줌인한다는 기술적인 설명은 이 시퀀스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카메라는 샹들리에에 붙들린 채 끌려갈 뿐이다. 카메라 뒤에서 샹들리에를 마주하게 된 관객은 마치 우주 한가운데서 서서히 다가오는 미지의 물체를 마주했을 때만큼이나 무력하게 샹들리에 이미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샹들리에의 화려한 이미지와 맞붙는 숏은 성의 꼭대기 테라스에 임시로 마련된 의자 위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늙은 남자 로이의 얼굴 클로즈업이다. 그의 얼굴은 살아 움직이며 관객을 희롱하는 샹들리에와는 대조적으로 무료하게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샹들리에만큼이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불가해한 얼굴로 거기 있다. 샹들리에와 로이의 얼굴은 영화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두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샹들리에가 기억하고 예언하는 힘이라면, 사내의 얼굴은 망각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웃의 신흥 부호 마힘의 아들 입회식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다시금 그를 사로잡고 잊힌 기억과 대면하게 만든다.

이후 영화가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로이의 과거는 우아하고도 처절한 몰락의 서사다. 로이의 뮤직 룸에서 열린 음악회는 그의 재산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들을 죽게 만든다. 그런데도 음악은 지칠 줄 모르는 포식자처럼 그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죽음으로 내달리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음악은 남자의 삶을 서서히 좀먹는 악령인가. 하지만 관객은 음악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결코 설 수 없다. 음악은 서사를 넘어 관객을 매혹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제외하고 극 중 로이가 반응하는 유일한 소리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마힘의 집에서 들려오는 개발의 소리다. 그런데 로이가 모든 것을 쏟아부은 마지막 음악회 도중 무희의 몰아치는 움직임에서 촉발된(혹은 움직임과 꼭 맞춰 들리는) 악기의 반복된 소리는 어쩐지 개발의 소리와 겹친다. 이는 마지막까지 음악이 로이의 편이 아님을 씁쓸히 인정하게 한다. 그러나 로이는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채 그것이 자신을 위한 음악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의 무지함은 결코 그를 비난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로이의 몰락은 비스콘티의 <레오파드>(루키노 비스콘티, 1963)에서 버트 랭커스터의 육신 위에 새겨진 애잔하면서도 매혹적인 쇠락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런데 <레오파드>에서 음악은 주인공의 편에서 몰락의 정조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사용됐다면, <뮤직 룸>에서 음악은 주인공의 몰락과는 관계없이 그를 비웃으면서 샹들리에와 함께 다음 삶을 영위한다. 이는 선악과는 무관한 음악의 본성이다. 그것은 일종의 무심함인데 다름 아닌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관한 무심함이다. 이 영화가 무시무시하도록 아름다운 이유도 거기 있다.

 

김소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