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별전/서울아트시네마 개관 10주년 기념 존 카사베츠 회고전

[리뷰] 존 카사베츠의 ‘얼굴들’

인물에 대한 넘치는 애정

 

두 번의 스튜디오 작업은 존 카사베츠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했다. 그는 할리우드 시스템 아래에서 영화를 찍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스튜디오와 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절대로 상업영화를 찍지 않기로 결심했다(물론 그 결심도 어쩔 수 없이 바뀌지만). 카사베츠는 할리우드의 역겨움을 <얼굴들>의 도입부에서 드러낸다. 시사실에 모여 앉은 영화 관계자 중 한 명이 “이번엔 뭘 팔 거야?”라고 묻자 상대편 인물이 “돈이죠”라고 대답한다. 이어 옆 인물이 “사실, 이건 아주 좋은 영화예요”라고 말하면 다시 다른 인물이 “상업영화 영역의 <달콤한 인생>이라고나 할까요”라며 너스레를 떤다. 돈의 원칙으로 운영되는 할리우드와 더 넓게는 돈으로 지배되는 미국사회에 대한 비판은 카사베츠 영화에 심심치 않게 나오는 풍경이다.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에서 한 갱스터는 마르크스를 인용해 “돈은 대중의 아편이야”라고 말한다. <얼굴들>에서 회사원들이 창녀 위에 군림하고 협박하기 위한 카드로 들이미는 건 여지없이 돈이다. 1965년, 카사베츠는 만 달러를 가지고 <얼굴들>의 촬영을 시작했고, 삼 년 동안 다섯 편의 영화에 출연해 번 이십만 달러를 들여 작품을 완성했다. 그와 장모의 집이 영화의 주요 로케이션이었으며, 그의 집 차고가 영화의 편집실이었다.

 

카사베츠가 ‘<얼굴들>에 대한 소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 연극무대용이던 <얼굴들>의 초고를 쓸 당시 카사베츠는 자기 삶에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렇게 나온 시나리오가 미국 중산층과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과 공포로 물든 건 당연한 일이다. 주인공인 포스터 부부와 그 외의 인물들은 교외에 살며 편협한 생각을 품은 중산층의 전형으로 제시된다. 서로 진실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지내던 그들은 어느 날 술에 취해 가면 아래 얼굴을 하나씩 드러낸다. 누군가는 거침없이 행동하고, 누군가는 야만적으로 변하고, 누군가는 본모습을 들킨 것에 놀라고, 누군가는 짧은 자유를 만끽하려 애쓴다. 밤은 끝나지 않을 듯이 길게 이어지며, 몸에 맞지 않는 낯선 악몽에서 깨어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얼굴들>은 배우와 카메라가 연주하는 재즈에 다름 아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배우들은 감정의 출렁임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성난 말처럼 널뛰는 카메라는 배우의 얼굴과 신체의 조각 위를 더듬는다. 그러므로 얌전히 앉아 인물과 이야기를 분석할 생각은 떨쳐버려야 한다. 영화와 함께 달리기가 우선 급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추해빠진 중년 부부는 각각 젊은 창녀와 제비족과 밤을 보낸 뒤 자신과 상대방의 벌거벗은 얼굴과 마주한다. 마침내 마리아가 남편 리처드에게 “내 삶이 싫어. 그냥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순간, 카사베츠는 이제 당신의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극은 없다. 악몽에서 깨어났으니 현실을 살 일만 남았다. 카사베츠는 현대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인물에 대한 애정을 거둔 적이 없다. 카사베츠는 아무리 나쁜 인물도 미워할 수 없게 그린다. 그는 삶에 있어 ‘애정’만큼 소중한 게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이용철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