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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우리 시대의 프랑스 영화 특별전

[리뷰] 자크 리베트의 <도끼에 손대지 마라>

사랑의 미스테리

 

<도끼에 손대지 마라>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 연작소설 <인간희극> 중 <랑제 공작부인>을 영화화한 것이다. 원작의 배경은 <인각희극>의 핵심시기인 ‘왕정복고 시절’이며, 발자크는 원래 ‘도끼에 손대지 마라’를 소설제목으로 정하면서 ‘위기에 처한 인간’을 청교도혁명에 빗대려했다. 발자크의 의도를 따른다면 영화는 정치적인 알레고리이자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풍속도로 기능해야 하겠으나, <도끼에 손대지 마라>는 사랑과 열정을 탐구하는 데 더 매혹을 느낀다. 아르망 장군은 무도회에서 공작부인 앙투아네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첫사랑에 흔들리는 전쟁영웅과 사교계 유명인의 관계는 전쟁처럼 진행된다. 남자는 서툰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여자는 도덕적 우월감과 강요된 정숙함 때문에 속마음을 감추기 일쑤다. 급기야 앙투아네트를 납치하면서까지 사랑을 구하려던 아르망은 끝내 진실하지 못한 그녀의 모습에 뒤돌아선다. 그제야 이해관계보다 감정이 소중함을 깨달은 그녀는 편지로 사랑을 계속 고백하지만, 그의 냉정한 반응에 세상을 등진다.

영화는 1823년 현재시점과 5년 전 플래시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물질(철창과 커튼), 사회와 종교의 덕목, 심리적인 상처, 육체(산 자와 죽은 자)’의 순서로 드러나는 장벽은 두 사람의 소통과 결합을 방해한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감동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신과 육체로 교감하고 관계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닌 것이, 두 사람은 몸과 마음을 불태우면서 마침내 어떤 사랑의 정수에 도달한다. 연인을 곁에 두고도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고, 사회의 눈과 상관없이 무모한 짓을 저지르고, 죽음으로써 운명을 넘어서고, 사라진 사람을 시로 기억하는 것. 이 모든 과정이 사랑의 다른 모습이며, 통속적인 이야기는 그렇게 우아함과 불멸성을 득한다. “음악과 종교와 사랑은 고결한 영혼의 확장 필요성을 표현한다”라는 대사는 영화 자체에도 적용 가능하다. 발자크의 말을 조금 바꿔 말하자면, 각각의 장면들은 거대한 영화를 세밀하게 구축하고, 전지적 관점에서 삽입된 자막은 시간의 흐름과 이야기의 전개를 미끈하고 아름답게 연결하며, 세심하게 선곡된 간결한 음악은 영혼이 떨리는 순간을 전한다. 거의 대부분 장면에 등장하는 잔느 발리바와 기욤 드파르디유의 조화도 일품이다. 리베트 영화 특유의 양식화된 몸짓 사이로 보이는 것들 - 본심을 읽기 힘든 여자의 미묘한 표정과 고통 받는 남자의 분노에 찬 얼굴은 봄날의 눈처럼 때론 포근하게 감싸고 때론 차갑게 몰아친다.

<도끼에 손대지 마라>의 주제는 ‘미친 사랑’이며, 그런 점에서 나란히 언급되어야 할 작품은 리베트의 1985년 작품 <폭풍의 언덕>이다. <푹풍의 언덕>과 <도끼에 손대지 마라>는 비슷한 주제를 전달하고, 두 작품은 유명 작가의 원작을 각색한 것이며, 두 작품은 리베트가 간혹 선보이는 시대극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작품이 진정으로 공유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폭풍의 언덕>과 <도끼에 손대지 마라>의 진짜 주제는 ‘게임의 미스터리’이다. <폭풍의 언덕>의 대사 “그녀의 게임에 휘둘리지 말아요”는 <도끼에 손대지 마라>에서 “내 사랑과 게임하려 들지 말아요”로 변주된다. 게임, 그것은 원작 <랑제 공작부인>이 속한 <인간희극> 가운데 ‘풍속 연구’ 편의 핵심 언어다. 발자크는 ‘풍속 연구’의 작업을 통틀어 인간의 감정이 벌이는 게임을 빌려 시대를 묘사했다. 리베트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필생의 키워드인 미스터리를 품는다. 앙투아네트는 왜 아르망을 사랑하면서 싸늘하게 행동하는가. 아르망이 사랑을 문밖에 두고 마지막까지 망설이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건 단순히 자존심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리베트는 격렬한 사랑 자체보다 그 격렬함을 초래하는 동인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삶은 우리가 생각하고 예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삶의 미스터리, 어쩌면 그것은 어떤 진실보다 더 진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글/ 이용철(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