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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풍> 상영 후 크리스티앙 페겔슨 강의

[1968+50 새로운 세상, 새로운 영화 May ´68 by Godard]



“지금 고다르가 중국에 산다면 어떤 영화를 만들지 궁금하다.”

- <동풍> 상영 후 크리스티앙 페겔슨 강의




이나라(이미지문화 연구자) 오늘 강의를 해줄 크리스티앙 페겔슨 씨는 영화와 사회학을 공부했으며, 현재 파리 3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오늘은 지가 베르토프 시기의 고다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들려줄 계획이다.

크리스티앙 페겔슨(영화평론가) 이 길고 지겨운 영화를 참을성 있게 봐주셔서 감사하다(웃음). <동풍>은 프랑스 관객에게도 그리 쉬운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50년 전 영화이고, 2018년의 우리는 50년 전과 다른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풍>에 대해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사회학에 기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영화 텍스트와는 조금 거리를 둔 채 비판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특히 작가주의적 관점보다는 프랑스와 유럽이라는 사회의 맥락에서 <동풍>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은 영화와 픽션이 60년대 중반의 중국과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중국과 프랑스는 문화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매우 먼 편인데 왜 68년 프랑스의 사람들은 중국의 정치 현상인 마오이즘을 그렇게 가깝게 느꼈을까? 68년 5월 프랑스에서 약 두 달 동안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점거 운동을 벌였을 때 나는 십 대였다. 당시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1966년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중국 TV가 방송해주던 선전 활동을 프랑스와 유럽의 TV를 통해서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마오쩌둥의 책을 들고 거리에서 그의 이름을 외치는 장면들 말이다(한국의 관객들은 북한의 ‘위대한 영도자’ 때문에 내가 어떤 분위기를 말하는 건지 잘 알 것이다).

사실 1960년대 말 한국에서는 맑시즘이나 마오이즘, 문화대혁명 등의 개념들에 접근하기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한국이 당시 독재 정권 치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전체주의의 안 좋은 예인 북한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다르 역시 바보는 아니다. <동풍>을 만들 때 그는 이미 사십 대였고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든 뒤였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마오이즘에 끌렸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이게 왜 완전히 말이 안 되는 행동이 아닌지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내 생각에 마오이즘에 대한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이끌림은 단지 마오이즘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재적 접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 문화대혁명과 마오이즘

1960년대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마오이즘과 문화대혁명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이 개념을 재고할 수 있다. 몇 가지 사실만 언급해보자. 58년부터 60년대까지 중국에서 ‘대약진운동’이 일어났다. 마오쩌둥이 이끈 이 운동은 농민들이 공산당에 호감을 갖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대약진운동은 4,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단적으로 설명하면 몇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프랑스 전체 인구가 사라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약진운동은 결국 실패했고, 60년대 중반 마오쩌둥은 새로운 혁명인 ‘문화대혁명’을 계획했다. 문화대혁명을 요약하면 약 1,700만 명의 젊은 중국인들을 시골로 보내 농부들과 함께 먹고 자고 일하면서 공산당과 혁명에 참여하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4~5년간 지속된 이 짧은 운동이 결국 공산당이 중국 사회에 미치는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이 문화대혁명은 상당히 억압적인 측면이 있었다. 약 250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그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자신의 가족들이 공산주의에 따르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감옥에 투옥시켜야 했다.

나는 바르트나 사르트르, 보부아르 같은 당시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왜 단순히 마오주의를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의 이미지 자체에 매혹당하고 영향을 받았는지 묻고 싶다. 대표적으로 필립 솔레르스와 줄리아 크리스테바 부부는 1960년대에 중국을 방문한 뒤 그 변화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매우 어리석은 말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마치 1930년대 소비에트를 방문한 뒤 그 사회를 높게 평가했던 작가들의 행동과 비슷했다. 내가 알기로 당시 중국의 어두운 현실을 용감하게 이야기한 사람은 시몬 레이스(Simon Leys)라는 학자가 거의 유일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의 현실과 중국인들의 일상이 어떻게 억압받는지 이야기했다. 하지만 혼자서 프랑스의 주류 흐름에 맞서는 건 역부족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이야기를 해보자. ‘마오이즘’이란 사상 자체가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사회가 중국의 사례로부터 어떤 아이디어를 얻은 건 확실하다. 그건 어떤 ‘대립’이 운동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 대립을 자양분 삼아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대립을 통해 운동의 불꽃을 피운 다음 이 운동성을 통해 기존의 것을 거스르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이 생각에 따르면 사회에는 ‘공공의 적’이 있고 혁명의 주체들은 여기에 맞서 싸워야 했다. 고다르의 영화에도 이런 생각들이 드러난다. 그는 (조금 모호하지만) 일종의 ‘내전’을 일으키자고 주장한다. 이때 고다르는 영화가 폭탄과 무기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참고로 ‘동풍’이라는 제목 자체가 동쪽에서 온 바람이 운동에 동력을 제공할 것이라는 의미다. 여기에선 오리엔탈리즘의 어떤 전형을 찾을 수 있다. 동쪽으로부터 온 것이 서구에 혁명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중국 여인>



<동풍>



- <중국 여인>과 <동풍>

1966년, 고다르는 <중국 여인>을 만들었다. 다섯 명의 학생이 파리의 한 집에 모여 마오의 사상을 따라 프랑스에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는 내용이다. 이들을 조금 비꼬는 것 같은 뉘앙스도 녹아 있고 <동풍>보다 재미도 있다(웃음). 이 영화에 나온 것처럼 문화대혁명은 지금까지 TV를 통해 이미지로만 접할 수 있었지만 68혁명을 이끌었던 급진적인 학생 운동가들이 ‘외부’의 운동이었던 마오이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이십 대 초반의 남녀들은 베이징의 라디오방송국이 송출하는 마오의 사상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마오의 어록을 공부한다. 그러다가 소련의 장관이 프랑스를 방문한다고 하자 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고다르는 다소 느슨한 정치적 관점 속에서 중국이 문화대혁명을 통해 끊임 없는 운동성을 만들어내는 급진적이고 새로운 사회이며, 소련은 혁명과는 거리가 멀어져버린 보수적 사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와서 보면 <중국 여인>은 마오이즘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전에 만들어진 예언적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영화를 만들면서 고다르는 상업적 제작 방식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하였다.

<중국 여인> 전에 만들어진 <미치광이 삐에로>에도 이와 비슷한 국제적 맥락이 반영되어 있다. 프랑스가 점점 미국화될 것이라는 전망과 비판이 있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이 녹아 있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 만든 <중국 여인>과 <동풍> 같은 영화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 ‘키노 프라우다(Kino-Pravda)’

<동풍>, <중국 여인> 같은 영화들이 중요한 건 고다르가 중국을 (소비에트 관료제와는 다른) 새롭고 급진적인 사회로 그렸기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들은 지가 베르토프가 말했던 것들 - 카메라는 새로운 도구이자 무기이며, 할리우드 영화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재현이나 스펙터클과 맞서 싸워야 하며, 우리가 만드는 영화가 할리우드보다 더 현실에 가깝고, 변화를 더 급진적인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 - 을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고다르는 <동풍>을 통해 베르토프의 ‘키노-프라우다’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천하려 했다(하지만 <동풍>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진실’이나 ‘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고, 아무리 교육을 잘 받은 노동자라도 이해하기 어렵다). 60년대 중반, 고다르를 비롯한 프랑스 감독들은 거의 40여 년 동안 망각의 심연에 빠져있었던 지가 베르토프나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을 읽으면서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두 감독은 작품을 연출할 뿐 아니라 영화에 대한 글도 많이 썼던 사람들이라서 상대적으로 접하기가 쉬운 편이었다.

당시 고다르는 브레히트를 인용하여 리얼리즘은 현실을 재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 보여주는 것이라는 조금 헷갈리는 말을 했다(“Realism does not consist in reproducing reality, but in showing how things really are”). 이것이 그가 베르토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 영화의 실천: 작가주의의 폐기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은 이론과 실천이 섞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이 농부를 찾아가고, 농부들이 학생들과 같이 일하는 것처럼 말이다. 고다르 역시 이론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영화적 실천을 시도하려 했다. 그런 맥락에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고다르가 소비에트 영화의 ‘시네트랙트’로 대표되는 분절적인 짧은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마오주의를 선전하는 전단물 같은 짧은 이론적 문구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 예이다.

나아가 고다르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기를 원했다. 당시 고다르가 생각하기에 영화는 집단적인 것이었고 한 명의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는 할리우드와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고다르는 누벨바그를 통해 ‘작가주의’를 부각시켰지만 이번에는 작가주의와는 반대되는 것을 하고 싶어했다. 이 과정에서 고다르는 ‘지가 베르토프 집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무엇보다 작가로서의 감독 개념을 없애려 했다. 왜냐하면 영화는 집단적 운동이고, 대중을 일방적으로 교육시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찾아오게끔 유도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소 유토피아적이고 이상적인 생각이었다.

60~70년대의 고다르는 영화의 혁명적 실천을 위해 작가라는 개념을 지우려 했고, 관객을 영화의 중심에 놓으려 했다. <동풍>을 보면 고다르는 끊임없이 관객에게 말을 건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관객을 설득하는 이런 행동은 마치 마오쩌둥이 인민들에게 말을 걸었던 방식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물론 마오쩌둥의 경우에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부분이 컸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딱히 새로운 건 아니다.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등의 철학자는 이미 60년대부터 저자라는 개념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으며 저자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맑시즘과 영화

1950년대 말 고다르가 누벨바그를 시작할 때 그는 프랑스 전후 영화의 전통에 맞서면서 ‘시네마’의 개념을 새롭게 쓰려 했다. 그 방법론으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세트 촬영 거부, 독립적인 제작, 핸드헬드 촬영 같은 모험적 시도를 했다(개인적으로는 <네 멋대로 해라> 이후 진정한 의미의 누벨바그는 죽었다고 생각한다).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평론가이기도 했던 누벨바그의 멤버들은 『카이에 뒤 시네마』 등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에 대한 개념을 토론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누벨바그의 정신은 희미해졌고 감독들은 각기 다른 노선을 취했다. 이는 1920년대 러시아에서 벌어진 일과 비슷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고다르는 ‘마오주의 시기’라고 불리는 1966년에서 1972년 사이에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만들었다. 한편 1920년대 중반, 지가 베르토프는 ‘키노-아이’를 주장하며 감독은 현실과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야 하며 감독의 눈이 카메라의 눈이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이런 베르토프의 주장은 당시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진영 내에서도 갈등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에이젠슈테인 같은 사람은 베르토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에이젠슈테인은 이미 <전함 포템킨> 같은 영화에서 혁명을 말하기 위해 스펙터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나중에 만든 <10월> 같은 영화에서는 혁명을 묘사하기 위해 영화적 ‘조작’을 시도하기도 했다.

<동풍>의 첫 부분에도 이 영화를 베르토프 스타일로 찍을지, 에이젠슈테인 스타일로 찍을지 고민하는 대사가 나온다. 이는 영화라는 것이 재현에 그쳐서는 안 되고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제 인식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맑시즘적 관점에서 보면 그 현실이란 건 끝없는 계급 투쟁의 장이다. 1920년대의 맑시즘은 단순히 여러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역사를 서술할 수 있는 특별하고 새로운 학문이었다. 그리고 마오이즘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가 결국 노동자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1920년대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감독들은 영화를 단순한 광학적 기술이 아니라 현실을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 관점, 또는 학문으로 여겼다. 베르토프가 시도한 건 맑시즘과 시네마를 하나로 섞으려고 한 것이다. 베르토프에게 영향을 받은 고다르 역시 실패로 끝난 누벨바그 이후 다시 새로운 물결을 만들려고 했다. 이것이 내가 고다르를 경유해 생각하는 정치와 시네마의 관계에 대한 단초이다.


- 68혁명 이후

하지만 이걸로 고다르가 중국과 마오이즘에 끌린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 중국에서는 수백만 명의 인민이 사망한 비극이 있었고, 중국의 마오이즘을 프랑스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68혁명이라는 급진적 운동에 왜 동참했는지 질문하고 싶다.

전후 프랑스는 사실 가톨릭 전통이 강한 매우 보수적인 사회였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을 통과하며 제국주의가 붕괴되고 있는 시기였다. 고다르는 알제리 전쟁을 비판하는 <작은 병사>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정부에 의해 3년간 상영을 금지당했다.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은 드골이었는데, 끊임없이 시위가 일어나면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런 시기를 통과하는 프랑스 사회는 겉으로는 급진적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뒤에는 보수적 측면이 분명 있었다. 이를테면 1986년에 민영화되기 전까지 프랑스의 모든 TV 방송은 국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68운동은 프랑스라는 국가를 자유롭게 하려는 최초의 운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68혁명’이라 불리는 사회 운동 뒤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인 흐름도 있었고, 여성의 권리 신장(실제로 3년 뒤 여성의 낙태 권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성적 표현을 자유롭게 할 권리, 언론 자유의 권리, ‘자신이 될’ 권리에 대한 요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모순적인 건, 이런 운동들이 개인주의적인 동시에 집단주의적인 차원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68혁명에 대한 일종의 신화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어떤 모순이 존재한다.

당시 급진적인 운동가들이 선택한 마오주의나 트로츠키주의는 19세기의 관념을 20세기에 거의 그대로 가져와 활용했다. 그들은 공장으로 가서 노동자들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68혁명 당시 노동자들은 이를 반대했었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힘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소비에트의 옛 강령을 따르고 있었기에 어떤 면에서 매우 보수적 집단이었다. 68혁명은 드골 정권에 반대했지만 동시에 프랑스 공산당에도 반대를 해야 했다. 반대로 당시 노동자들 역시 68혁명을 통해 터져나온 모든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68혁명은 두 달 정도 격렬하게 이어지다 나중에는 곧 시들해졌고, 그나마 파리를 벗어난 교외나 시골에서는 잠잠한 편이었다. 그리고 68혁명이 끝난 후 이어진 시민 운동은 상대적으로 더 보수화됐으며 결국 73년쯤에는 그런 세력조차 다 사라지거나 무정부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등으로 분열됐다. 여기에 세대 차이까지 뚜렷해졌다. 68혁명의 동력은 어떤 면에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욕망이었는데, 그걸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약 20년 정도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운동의 동력은 약해졌다.

마오주의자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중국의 마오이즘을 프랑스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특히 신(新) 중산층의 부상 때문에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이 사라졌고 공장도 ‘동풍’으로 인해 사라지고 있었다. 영화의 새로운 방법론을 만들려고 했던 고다르는 <중국 여인>을 발표했지만 많은 관객을 기록하지 못했다. <동풍>은 말할 필요도 없다. 참고로 당시 크게 흥행한 작품은 현실을 아이러니하고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파리의 중국인(Les Chinois a Paris>(1974)이라는 코미디 영화였다.

이나라 고다르에 대한 꽤 거침 없는 비판도 들려주어서 더 흥미로웠다. 영화의 역사는 항상 여행의 역사였다고 생각한다. 고다르를 포함한 서구의 여러 지식인들이 중국에 매혹당했다고 했지만 사실 그 전에도 예술가나 지식인들은 항상 외부에 매혹을 느꼈었다. 68혁명 당시 고다르의 마오이즘에 대한 관심이 단지 ‘중국’이라서 그랬던 걸까? 어쩌면 영화가 항상 찾고 있었던 ‘외부’에 대한 하나의 사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위치를 바꿔서 생각해보면 지금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은 한국의 관객들도 프랑스라는 외부의 사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를 향한 이런 매혹과 관심의 사례 중 영화만이 갖는 특별한 점이 있는지도 듣고 싶다.

크리스티앙 페겔슨 어려운 질문이다.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전반이 동양에 대해 어떤 전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오늘 이야기한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그전에는 일본에 대한 이미지의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중국으로 대체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에는 중국풍 옷을 입는 게 유행하기도 했었고, 마오주의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 같은 다양한 맥락에서 만들어진 중국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60년대 중반 유럽의 지식인들이 중국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했었다. 정말 프로파간다적인 여행이었는데 이들은 실망스럽게도 현실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였었다. 나도 방금 고다르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60년대 당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정치적으로 진지하게 다룬 영화는 고다르의 영화를 포함해 한두 편 정도였고, 관객도 그리 많지 않았다.

고다르의 영화와 비교해서 보면 좋을 영화는 크리스 마르케의 작품들이다. 마르케는 마오주의자는 아니었고, 고다르가 ‘지가 베르토프 집단’을 만든 것처럼 러시아 감독 알렉산드르 메드베드킨의 이름을 딴 ‘메드베드킨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다. 20년대 에이젠슈테인과 베르토프가 서로 다른 노선 때문에 갈등했던 것처럼 고다르와 마르케도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관객 1 <동풍>은 고다르가 추구하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관객에게 충실히 전달하려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화법은 관객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난해한 측면이 있다. 고다르의 방식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크리스티앙 페겔슨 사실 오늘 영화가 다 끝날 때까지 관객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남아있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웃음). 이건 내가 고다르에게 특별한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68혁명 당시 이미 고다르에 대한 대중의 고정관념이 존재했다. 어디에나 남들보다 좀 더 급진적인 학생들은 있기 마련인데, 이들은 이런 낙서를 남겼다. “고다르는 당신이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멍청한 스위스계 친중국파이다.” 하지만 20년대 러시아의 베르토프 감독이 영화를 통해 혁명 사상을 전파하려고 한 것과 60년대 프랑스의 고다르가 하려고 한 것을 단순히 그 결과물만 놓고 비교하는 건 물론 힘들 것이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상영하는 <서른 살의 죽음(Half a Life)>(로맹 구필, 1982)이란 영화를 함께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68혁명 이후 트로츠키주의를 이끈 사람이 만든 영화로서, 68혁명 이후 좌절감을 느낀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들을 보면 68혁명에 어떤 취약점이 존재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어떤 사람들이 고다르보다 더 적극적으로 혁명의 운동성을 지속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내 생각에 고다르는 ‘운동’보다는 감독이란 위치를 지키는 데 더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관객 2 68혁명 이후 50년이 지났고, 여기는 프랑스가 아니라 한국이다. 내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계속 고민 중이다. 내 생각에 우리 사회는, 특히 젊은이들은 정부에 더 이상 저항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크리스티앙 페겔슨 고다르라는 사람 자체가 어떤 점에서는 순응주의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보수주의적이었다가 60년대 중반에는 아나키스트였고, 그 후로는 공산주의자들과 친분을 맺고 마오주의자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지금은 영화,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국이 오늘날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한 번 생각해보자. 그리고 세계 어디를 가나 다들 비슷하다. 프랑스의 젊은이들도 취직과 생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게 1968년이 흥미로운 건 지금과 달리 개인주의적이지 않은 면모가 있었고, 다름에 대한 관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가 개인주의적 방향으로 가면서 오히려 그런 관용이 사라지고 있는 면이 있다.

지금 중국은 21세기의 가장 거대한 모순이다. 최악의 공산주의와 최악의 자본주의가 합쳐졌고, 사람들이 거기에 순응을 하고 있어서 변화가 일어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 고다르가 중국에서 산다면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일시 5월 8일(화) 오후 7시 <동풍> 상영 후

사진 최현진 자원활동가

정리 김보년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