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에 고다르는 우리가 총체적 권력을 지니고 있는 온갖 형태의 수사학의 시기, 언어적 테러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다르는 자신이 영화의 평범한 고용인으로서 말과 이름이 지배하기 이전의 사물에 대해 말하고 싶고, 아빠와 엄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전의 아이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는 아직 이름을 갖기 전의 바다, 파도, 자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전(以前)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기원으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구스타브 쿠르베의 논란적인 그림이 상기시키듯이 기원으로의 회귀는 세계의 기원, 미스터리의 기원, 불명료함과 순수한 나체의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고다르는 <영화사>의 2A에서 사티아지트 레이의 <아푸의 세계>(1959)와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의 이미지를 혼합하고 여기에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영상과 흑백의 포르노그래피 영상을 연결하는 과감한 몽타주를 선보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영화예술의 아름다움의 가능성, 혹은 그것의 유년성이 철저하게 유린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세계의 몰락 이전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 이후, 체르노빌 이후, CNN의 공습이후, 9.11테러 이후에 잃어버린 세계와 시간을 되찾으려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아니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것입니다. 이후의 시간에서 이전의 가능성을 되찾는 것. 그래서 과거는 죽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다르에게 만약 영화가 현재의 예술이라면 그것은 과거의 현재(기억), 현재의 현재(직관), 미래의 현재(기대)라는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인데, 이는 일종의 데자뷰의 시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매 시대는 다음에 이어질 시대를 꿈꾼다고 말했던 이는 벤야민 입니다. 그는 새 것에서 자극받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판타지가 사실은 근원적 과거와 이어져있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사물이 존재하는데 왜 그것을 조작하려 하느냐’라는 로셀리니의 유명한 말은 이미지가 항상 거기에 존재하고 있기에, 그 이전에 있었기에 이후에 도래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는 세계로 우리를 내던지는 행위이다. 영화적 체험이란 결국 데자뷰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혹은, 시네마테크에서 고전영화를 보는 것이 이미 데자뷰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관객에게는 ‘어디서 본 것만 같은’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는 우리들 서로가 이미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사람들이라는 기묘한 체험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2011년 시네바캉스 서울’에서 그런 데자뷰의 신비한 체험을 함께 했으면 합니다.

글/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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