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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

가부장제 속 억압받는 여자의 일생

[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는 단순하게 말해 가부장제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삶을 다룬 영화다. 아들(하나오카 세이슈)과 며느리(카에), 그리고 시어머니(오츠기)의 관계를 통해 그러한 삶을 보여준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시네마스코프를 최대한 활용한 독특한 화면구성을 통해 세 사람의 관계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적 심리를 묘사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매개가 되는 만다라게꽃은 여성의 삶의 고통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영화는 모범적인 여성상을 보여 주는 오츠기에 대해 카에가 품었던 존경심이 애증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나오카 세이슈가 외과수술에 필요한 마취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그녀들이 마취제의 실험대상이 되려고 경쟁하는 모습은 가부장제에서 아들과 시어머니, 그리고 며느리의 삼각관계가 첨예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되어 가면서 아내인 카에가 시어머니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녀는 처음부터 오츠기의 삶을 흠모하고 존경하여 그녀의 삶을 따라 배우려 했던 것이고, 남편에 대한 사랑을 얻기 위해 남편의 성공에 집착하는 모습은 표면에 불과했다. 오츠기가 만다라꽃밭에서 물을 주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와 같은 삶을 꿈꿨던 카에는 결국 눈이 먼 가운데 남편의 성공을 확인하고는 만다라꽃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여자의 일생’은 만다라게꽃이 만발한 모습에서 시작해서 가부장제의 숨막히는 밀실을 거쳐 다시 만다라꽃밭에서 마감된다.

가부장제의 숨막히는 밀실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 마스무라 야스조는 그의 다른 영화에 달리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에서는 인물의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또한 과감한 편집을 통해 속도감 있게 영화를 전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실내공간을 보여줄 때는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의 화면과 같은 절제나 담담함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데 시네마스코프와 카메라의 특이한 앵글의 결합으로 인해 공간은 미스테리하고 꽉 찬 밀실처럼 변모한다. 인물들의 감정은 다소 자제된 채로 표현되어 화면 전체는 은밀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이 옥죄어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간결한 디테일 속에서 인물들이 시네마스코프화면에 배치되는 방식 및 카메라의 독특한 시선과 위치에서 기인한 것이다. 심도가 시간적인 느낌을 준다면, 카메라의 연출법은 시스템의 숨막히는 억압감을 강조한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 그리고 그것을 모른 채 이용하는 아들의 이야기라는 단순한 구조에서 긴장감이 발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붉은 천사>에서와 비슷한 내적 깊이감을 만들어내는 꽉 찬 화면의 특이한 공간감은 타르코프스키의 <이반의 어린시절>에서처럼 광각렌즈가 만들어내는 원근법적인 깊이감과도 다르다. 그 깊이감과 인물들의 특이한 배치는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하면서 하나오카 세이슈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마치 폐쇄된 밀실에서 역적모의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또한 인물들의 역적모의를 숨어서 보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은 인물들의 관계나 심리를 모호하게 만든다.


한편, 이 영화는 한 화면 내에서 인물들의 각기 다른 행동과 그것을 엿보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 초반에 카에의 집에서 조부와 장차 시아버지가 될 세이슈의 대화가 한 켠에서 이루어지는 가운데 그것을 엿보는 카에의 모습이 그러하고, 하나오카 세이슈의 집 장면에서도 이런 장면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여자들은 엿보면서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따라 배우거나 각자의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만든다. 여기서의 엿봄은 연극에서의 ‘방백’과도 같다. 중요한 것은 엿보고 있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그녀들이 엿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켜보고 관찰하던 사람은 시스템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오카의 제자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속은 것을 알고는 속상해 하면서 오츠기가 울 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들은 화면의 중심에 주로 배치되지만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을 모른 채한다. 지켜보고 관찰한 자들만이 결국 시스템의 비밀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엿보고 있는 그녀들은 시스템 속에 있는 또 다른 관객과 같은 위치다. 비밀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몇 마디의 말들을 내뱉는 순간들이며, 대부분의 장면에서 그녀들의 표정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관객과 화면 속 인물에 동시에 향한 카메라의 시선은 화면에서 교차되면서 공간에 입체감을 부여하며 밀실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관계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만다라게꽃 역시 여성상을 보여주는 주요한 매개체이다. 이야기를 이끄는 만다라게꽃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삶의 고통을 슬프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장치다. 영화에서 여성의 삶은 표면적으로는 말에 의해 드러난다. 카에와 오츠기의 삶을 지켜봤던 시누이는 종양으로 죽어가는 순간에 당대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그녀들의 삶에 대해 말한다. 고통을 감추고 경쟁하듯 하나오카의 사랑을 얻기 위해 또 그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들의 삶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며느리로도 시어머니로도 살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이 카에의 삶(과 시어머니의 삶)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녀의 삶은 만다라게꽃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그 꽃의 기능은 적절한 양으로 환부를 치유하는 데 있고, 그 꽃을 사용할 때는 정신을 잃게 되며 과다한 사용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녀는 결혼해서 하나오카 세이슈의 집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러한 자신의 삶을 감지했고, 실제로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만다라게는 집 밖의 약초밭에 활짝 피어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답고 모범적인 여성상을 대변한다. 또한 오츠기와 카에의 삶을 이어지게 하는 매개체다. 고통없이 수술하기 위해 쓰이는 만다라게꽃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마취제로 쓰여서 정신을 잃게 만들듯이 그녀들은 남자의 사랑과 성공의 매개물이 되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카에는 마취제의 과다사용으로 결국 눈이 멀게 된다. 만다라게꽃의 독이 그녀의 삶 속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시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애증의 감정으로 인해 시어머니의 삶을 반복하는 카에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눈이 멀고 나서야 그녀는 시어머니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며, 시어머니를 닮은 아들을 낳는다. 영화에서 하나오카 세이슈는 화면의 중심에 놓여 있다. 마취약을 개발하고 실제로 성공했던 당대 시스템의 핵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주변적인 여성의 보이지 않는 고통과 그녀들의 삶을 내밀하게 드러내는 데 더 초점을 맞춘다. 그녀들의 고통스런 삶은 당대의 사회구조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지 못한 가운데, 다른 여성의 삶을 모방하려는 데서 기인한다. 마치 만다라게꽃처럼. 세 번 정도 등장하는 활짝 핀 만다라게의 아름다움과 그 만다라게가 집안의 성공을 위해 마취약이 되는 모습이 밀실같은 집안을 표현한 미장센과 대비된다. 마지막에 카에가 만다라게 꽃밭에서 죽는 장면은 오츠기의 삶을 반복한 후에 밀실같은 공간에서 빠져나왔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카에의 운명을 아프게 보여준다. (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