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고전/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

가문의 내조만을 위해 살아가야 했던 여성들의 삶

[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1967)에는 의학발전에 지대하게 공헌할 마취약을 개발하는 과정을 다룬 점 외에도, 어머니가 아들의 아내에 대해 질투한다는 점, 그리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와 결혼 제도에 대한 비판이라는 보다 마스무라적인 테마가 있다.

 

하나오카 집안의 흥망성쇠를 함께하는 며느리 카에의 삶의 여정을 따르는 이 영화에는 그녀의 삶의 분기점이 되는 만다라게 꽃밭의 장면이 세 번 나온다. 그 처음은 카에가 8살 때로 그녀는 장차 시어머니가 될 여인의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한다. 어린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우아한 여성성의 절정. 만다라게꽃보다 더 아름다우며, 어린 소녀에게 있어서 만다라게의 독성만큼이나 치명적이었던 매력. 그녀의 삶은 그 이상향을 향한 여정이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의 얼굴도 모른 채 결혼을 결심한다. 그야말로 하나오카 가문에 입적하는 것으로서의 결혼인 셈이다. 하나오카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장남 운폐가 의학적 성취를 이뤄내 집안을 부흥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즉 운폐는 집안의 주인이다. 모든 여성들은 그를 위해 봉사하며, 이 때 집안의 안주인은 그 내조를 지휘하는 중심적 역할을 한다. 안주인은 어머니 한 사람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며느리 카에를 견딜 수가 없다.

 

어머니와 카에는 운폐에게(즉 집안의 부흥에) 더 가치 있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경쟁은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집안의 안주인으로서의 경쟁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으로서의 경쟁이다. 여성으로서의 욕망에는 그 선을 확정짓기 어려운 미묘한 성적 욕망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고 아들의 여자를 질투한다는 테마는 <눈먼 짐승>에서도 존재하는데,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에서 그것은 더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처음에 평화로워 보였던 두 여자 사이에 운폐가 끼어들면서, 이제 둘의 관계는 전면적으로 변한다. 가령 운폐가 처음 집에 돌아온 날, 어머니는 아들 부부의 첫날밤의 동침을 막으며, 그동안 카에를 마주 보고 잠들던 그녀는 이제 등을 돌려 돌아눕는다. 이 행동은 분명 어머니로서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성적 욕망에 의한 질투에 가깝다. 운폐와의 사랑을 나눈 후, 그녀가 스스로의 여성성을 자각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이상화 했던 어머니가 내면에 품고 있는 악질적인 면을 느끼고 말았을 때, 카에는 두 번째로 만다라게 꽃밭에 서게 된다. 이제 어머니를 향한 카에의 동경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에 남편에게 가치 있는 부인이 되기 위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운폐에게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생명을 건 왜곡된 경쟁. 그 경쟁에서 패배했음을 깨닫자마자 무너져 내리는 어머니를 보면, 그 경쟁과 안주인으로서의 위치가 그녀의 삶의 유일한 동력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그동안 아들을 낳지 못해 고생하던 카에는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자마자 곧바로 입덧을 한다. 그리고 곧이어 두 아들을 낳게 된다. 가문의 대를 잇는다 함은 곧 아들을 낳는 것이고, 이것은 가문의 안주인의 몫이다. 그렇게 카에는 마침내 안주인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가문의 대를 잇는 아들을 낳는 것이다. 이제야 그녀 자신이 바로 8살 때 보았던 이상화된 여성상으로서의 어머니와 완전히 같은 위치에 섰다. 그러나 이상화했던 그 우아한 어머니의 위치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내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그러기 위해 자기 자신의 주체적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그녀는 안다. 카에는 어머니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녀의 삶과 교감한다. 카에가 운폐의 여동생에게 자신과 어머니는 경쟁을 펼쳤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의 성공과 집안의 부흥에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녀는 눈이 먼 것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맛을 잃은 것 같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그토록 동경하던 위치에 그녀 자신이 오르고 나서 겪게 되는 허망함과 부질없음의 감정일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만다라게 꽃밭에서 힘없이 털썩 주저앉는다. 그 시절의 여성의 삶은 그런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가 거둔 나름대로의 성공은 부질없고 더 없이 허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가? 마스무라는 운폐의 여동생의 입을 빌린다. 그녀는 ‘자기는 엄마와 새언니의 경쟁과 질투에 가득한 증오의 시선들을 바라봐 왔고, 그러고 사느니 차라리 혼자 마음 편히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현대적 의미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말이다. (박영석)